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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103화 (103/150)

103화 - 마법지원부대

“좋아, 그럴 줄 알고 준비해 두도록 했네. 곧 선생이 가야 할 곳을 알려줄 테니 그동안 조금이나마 쉬고, 가족들도 만나게.”

미리 만들어둔 것이 분명한 임명장을 책상 서랍에서 꺼내어 내미는 왕자의 행동에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건 그냥 ‘답은 정해놨으니 넌 대답만 하면 돼’라는 거잖아?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걸 보면 내가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막무가내이신 것은 여전하시군요. 제가 거절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그때’가 선생이 되라며 찾아왔던 때임을 눈치챈 왕자가 씩 웃어 보였다.

“어쩌긴? 그때처럼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 귀찮게 했겠지. 거기다 선생이 모른 체할 사람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말이야.”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쳐다보는 왕자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떠났어야 했던 일은 잘 해결된 건가?”

“네, 뭐… 완전히 마무리 짓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숨 돌릴 틈은 생겼습니다.”

아마도 말이지.

“그렇다니 다행이군. 아, 그러고 보니 아리안도 있었군. 어때, 단둘이서 지내는 동안 진도는 있었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해 옆에서 가만히 있던 아리안 누나는 갑작스러운 왕자의 물음에 기겁 했다.

“예,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 진도라니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더듬거리는 걸 보니 아리안 누나가 당황하긴 당황한 모양이다.

“쯧, 보아하니 아직 크게 진전되진 않은 모양이군. 그보다 두 사람 간의 감정은 보는 사람 모두가 다 아는데 이젠 그만 숨기는 건 그만하지? 모른 척해주는 것도 지겹단 말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왕자의 말에 아리안 누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그녀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에 왕자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미안하네. 장난 좀 친다는 게 너무 심했던 모양이군.”

“괘, 괜찮습니다.”

왕자의 사과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리안 누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겠어.”

그렇게 말하며 왕자는 근처에 있던 관리 하나를 가리켰다.

뭐가 그리 급한지 무어라 입만 끔뻑대고 있던 그는 우리가 자신을 쳐다보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전쟁 때문에 매일 회의가 이어지고 있거든. 선생이 왔다기에 잠시 빠져나왔는데 회의장에서 내가 빨리 돌아오길 기다리는 모양이야. 이래서 인기가 많으면 피곤하다니까.”

웃어 보이듯 말했지만 피곤해 보이는 것은 숨기지 못했다.

“그럼 난 이만 일하러 가보겠네. 선생도 이만 가보게.”

“예, 저하.”

왕자가 먼저 방을 나서고 난 후 나는 조금 전에 받았던 돌돌 말린 임명장을 펼쳐보았다.

마법지원단의 부단장으로 임명한다는 내용과, 유사시에 행할 수 있는 권력들에 대해서 적혀 있었다.

<쯧, 이 몸께서 함께하는 녀석에게 기껏해야 부단장이라니.>

카이서스는 내게 내려진 직책이 지원단의 단장이 아니라 부단장이라는 것이 불만인지 툴툴거렸다.

‘뭐가 불만이야? 책임자를 맡게 되면 얼마나 귀찮은데. 거기다 나는 전략 같은 것은 모르는 데다가 남들을 지휘할 능력이 못 돼.’

<네 녀석이 남들을 다룰 능력이 안 되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래도 드래곤인 내가 있는데 고작 부단장이라니.>

카이서스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툴툴거리거나 말거나 나는 왕자의 집무실을 나갔다.

* * *

왕궁을 나와 외가에 도착하니 이미 내가 도착했단 소식을 들은 어머니와 누나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다녀왔어요.”

잠시 입을 다문 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어머니가 다가와서 안아주었다.

“잘 다녀왔어.”

그 한마디의 말에 담긴 걱정과 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뻔한 것을 애써 참았다.

“어휴, 밖에서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 다들 할 이야기도 많을 텐데.”

나와 어머니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것이 보기 답답했던지 누나가 우리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조카는?”

자리에 앉으며 묻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한참 울고 보채다가 네가 오기 직전에야 잠들었어. 유모라도 붙이고 싶은데 엄마가 그건 절대로 안 된다잖아.”

“얘, 아이는 사람에게 맡기면 못써. 너만 아니라 사위도 시간 될 때마다 파라를 봐주잖니. 엄마도 너희를 직접 키웠어.”

“그건 너무 옛날 생각이라니까?”

“어머, 얘가 지금 내가 늙었다는 거니?”

두 사람의 대화에 곁에 서 있던 매형이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내게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뭔가를 떠올린 듯 조심스레 물었다.

“처남, 오기 전에 왕궁에 들르신 것은 어떻게 됐습니까.”

왕궁에서 일하다 보니 뭔가 아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왕자님이 이번 전쟁에 출전해 줄 것을 부탁하셨어요.”

역시나 뭔가 들은 바가 있는 듯 매형은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머니와 누나도 어두운 표정이 되어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마 며칠 후에는 출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어머니와 누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돌아오자마자 제대로 쉴 새도 없이 전쟁터로 가야 한다니.”

약간은 원망 섞인 투로 말한 어머니는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해봐야 이미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테니까.

그런 어머니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며 누나가 내게 말했다.

“너, 저번처럼 또 나자빠져서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돌아오면 정말 혼날 줄 알아.”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보다 아버지 쪽에서 연락 온 건 없어?”

어머니는 여전히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요새 그이는 물론이고 루엔과 티엔까지 통 연락이 없어. 몇 달 전까진 다들 편지는 꼬박꼬박 보냈었는데… 네 아빠와 형제들이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걱정이 되는구나.”

속해 있는 곳이 암살단이다 보니 당연히 걱정될 수밖에 없지.

거기다 나까지 돌아오자마자 전쟁터로 떠나니 걱정을 더하는 격이다.

“바빠서 그런 거겠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어디 던져놔도 알아서 잘 지낼 사람들이잖아요.”

“그렇지?”

내가 웃으며 말해주자 어머니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그리고 저는 편지 자주 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공을 세우거나 하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몸 성하게 돌아오렴.”

“걱정 마세요. 이래 봬도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는 몸이라고요.”

“가호를 받으면 뭐 해? 저번에 다 죽어가는 꼴로 돌아와 놓곤.”

내 말에 누나가 투덜거리며 말하자 어머니가 눈을 찌푸렸다.

“넌 꼭 지금 그런 말을 해야겠니?”

“아! 엄마!”

부지불식간에 뺨을 꼬집힌 누나가 호들갑스럽게 엄살을 피우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의 불안과 걱정을 애써 감추려 하며, 우리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내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지시하는 명령서가 도착했다.

* * *

무거운 분위기 속에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게이트로 향하는 내 뒤에 아리안 누나가 따라왔다.

그녀는 짐을 한가득 챙긴 상태로, 나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누나도 함께 가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전시 상황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데려가는 건…….”

끝까지 따라오겠다는 것을 차마 막지 못한 내가 다시 한번 조심스레 말해보았으나 아리안 누나는 단호했다.

“또다시 너 혼자 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잖아.”

다시 한번 돌아가라는 식으로 말하면 가만 안 둔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에 나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쯧쯧, 잡혀 사는 모습이 벌써 훤히 보이는군.>

더 이상 말은 안 해도 걱정하는 내 모습 때문인지 아리안 누나는 에휴,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받은 임명장에 1인에 한해서 조력자와 함께할 수 있다고 적혀 있어.”

“네?!”

아리안 누나의 말에 깜짝 놀라서 품에 고이 모셔둔 임명장을 꺼내보니… 정말이었다.

아리안 누나는 대체 어느 틈에 본 거람?

어리둥절해하며 쳐다보자 아리안 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문서라는 건 꼼꼼히 잘 봐야 하는 거야. 네가 제대로 안 보는 것 같기에 내가 따로 읽어봤어.”

아리안 누나의 충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임명장을 품에 넣었다.

아마도 이 부분은 왕자가 아리안 누나를 생각해서 넣어둔 항목인 모양이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게이트에 도착하여 왕실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보여주고 이동했다.

그리고 며칠 후.

대륙력 758년 10월 2일.

전선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가 배치받은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나와 아리안 누나가 임시로 만든 목책 가운데로 난 초소로 다가가자 초병이 가로막았다.

“정지하십시오. 신분과 용무를 밝히십시오.”

“라엘 드리안 자작입니다. 왕명으로 마법지원단의 부단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일행인 청색 마탑의 아리안입니다”

명령서를 받아 든 초병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경례를 올려붙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를 맞이한 초병이 동료에게 자리를 부탁하고는 안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가 돌아오는 사이 나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원래는 꽤나 규모가 큰 농가였을 곳에 목책을 두르고, 병사들이 쉴 수 있는 천막들을 지어두었다.

마법지원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법사라는 것을 드러내는 로브를 걸친 사람들의 모습도 자주 보인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갔던 초병이 돌아왔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단장께서는 바쁘셔서 조금 있다가 부르시겠답니다. 우선은 지내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안내해 준 곳은 병사들이 지내는 천막이 아니라 원래 있던 농가의 방 중 하나였다.

깔끔하고 편안한 방은 아니었지만 전장을 코앞에 두고 많은 걸 바라는 건 욕심이지.

일반 병사들처럼 천막에서 자지 않는 게 어디야?

일행인 아리안 누나에게도 방이 배정되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간단히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트럼벨에서 이곳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온 터라 잠깐 눈이나 붙일 셈이었다.

눈꺼풀을 꾸벅이며 잠들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침대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누, 누구?!”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는데 그 누군가가 말했다.

“쯧쯧, 이곳은 암살자를 막기에는 경비가 너무 허술하구나.”

이 목소리는……

“아버지?! 여긴 어떻게?”

“근방을 지나가다 네가 이곳으로 온단 소리를 듣고 들렀다.”

과연 암살집단의 수장이라 그런지 정보가 엄청나게 빠르네.

“그렇게 한가하면 어머니한테 연락이라도 좀 해요. 요즘 엄청나게 걱정하신다고요.”

“최근 제국을 조금 들쑤셨더니 귀찮게 따라붙더구나. 좀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라 어쩔 수 없다.”

괜히 연락을 주고받다가 서로 위험해질까 봐 그렇다는 거겠지.

“제국은 왜요?”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왔다. 드래곤과 친하다는 너라면 뭔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얼마 전 제국에서 활동 중인 우리 요원 하나가 버려진 마을로 많은 물자와 인력이 비밀리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알아냈다.”

어… 대충 들어도 뭔가 심상치 않은 게 나올 거 같은 이야긴데.

“대체 뭐였어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확실한 건 우리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리 우리가 잠입에 능숙하다 해도… 제국의 황궁만큼이나 엄중한 보안을 뚫고 들어가는 건 무리거든. 아니, 차라리 황궁으로 들어가는 게 좀 더 쉬울 거다.”

황궁보다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의 보안이라니.

대체 그 안에 뭐가 있다는 거야?!

“물론 우리도 구경만 한 건 아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물자들을 여기 적어놨으니 한번 살펴봐라.”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는 내 앞에 두꺼운 서류 뭉치 하나를 별것 아니라는 듯이 툭 던졌다.

서류 뭉치를 받아 들어 읽어보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희귀하고 위험한 물건들에서부터 별 가치 없어 보이는 잡품들까지.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흠, 나도 잘 모르겠구나.>

카이서스에게서도 그리 만족스러운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끄응=…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내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하자 아버지는 그러냐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군. 혹시 모르니 그건 가지고 있어라. 어차피 네게 주려고 만든 사본이니.”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뭉치를 품속의 마법주머니에 넣다 말고 문뜩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조직에서 힘겹게 얻어낸 정보를 외부인인 제게 함부로 줘도 돼요?”

“수장의 특권이라는 거지, 거기다 조직에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아들이라면 완전히 외부인도 아니지.”

음… 그다지 모범적인 리더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떨떠름해하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이만 가겠다는 듯 돌아섰다.

문을 열고 나가다 문뜩 생각난 듯 아버지가 말했다.

“아, 그리고 근방에 쥐새끼가 있기에 처리해 뒀다.”

그 말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진짜 쥐를 잡았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닐 테니까.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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