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재발
보물 창고 한쪽 구석에서 나와 얼굴을 보는 것도 거부하던 아리안 누나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마음을 추스른 듯 어색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니까 마음에 두지 않아줬으면 해.”
아직 덜 추스른 듯하지만 티 낼 필요는 없겠지.
“정말로 괜찮아요.”
내가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아리안 누나는 뭔가 찜찜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체 내가 정신이 나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얼굴이 말이 아닌데…….”
그제야 내 얼굴을 본 아리안 누나가 머뭇거리며 물어왔다.
누나의 걱정에 나는 주변에 있던 수많은 보물 중 하나를 쳐다보았다.
반짝이며 빛나는 보물 위로 내 얼굴이 비쳤다.
퀭한 눈가와 푸석푸석해진 피부, 고통을 참느라 너무 이를 악문 나머지 흘렸던 핏자국이 입가에 조금 남아 있었다.
아무리 보통 사람이 아닌 나라고 해도 계승의 여파는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얼굴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다시 아리안 누나를 쳐다보았다.
걱정이 가득한 시선.
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나는 입가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소매로 스윽 닦아냈다.
“배고프지 않아요?”
그동안 뭘 제대로 먹지를 못했던 탓에 너무 배고팠다.
특히나 며칠간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더니 더더욱.
<제발 부탁이니 저 아이가 요리하게 두지는 마라.>
카이서스는 지난번의 그 사건을 떠올렸는지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직접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아리안 누나는 피곤한지 잠을 청했다.
아마도 부끄러움에 밤새 한숨도 못 잔 거겠지.
새근새근 잠든 아리안 누나를 바라보던 나는 담요를 덮어주고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자세를 취하며 앉아 마나를 움직였다.
이전과는 격이 다른 상쾌함과 힘을 지닌 마나가 전신을 휘감은 채 움직이며 심장으로 도달하자 서서히 모습을 갖춘 아홉 개의 고리에서 엄청난 밀도의 마력이 느껴졌다.
드디어 9서클에 도달한 것이다.
회전시키던 마나를 거두어들이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제 서클을 부수는 한 단계만이 남은 거지?’
<음… 그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다지 반가운 소리를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내 예상대로 카이서스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네가 서클브레이커에 도달할 방법 같은 건 아직 생각 못 했거든.>
‘뭐?!’
<생각해 봐라, 인간 따위가 서클 브레이커에 도달할 일 같은 걸 이 몸이 생각이나 했겠어? 너랑 어쩔 수 없이 함께하게 된 이후에도 생각은 해봤다만… 워낙 말도 안 되는 일이라서 말이지.>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서클 브레이커에 도달하지 못하면 너나 나나 다 죽는다며?!’
<그러니 나도 골치가 아프다는 거다. 뭐 일단은 9서클에 오르면서 어느 정도 시간은 벌었으니 방법을 찾아봐야지.>
‘시간을 얼마나 번 건데?’
<그건 나도 몰라. 애초에 인간이 9서클에 오른 것 자체가 처음인 일이란 말이다.>
‘끄응, 그럼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소리네.’
<그래.>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일단 돌아가자. 이런 지긋지긋한 곳엔 정말 1초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아.’
<뭐, 인마? 집주인에게 대놓고 그런 말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여기서 네가 한 짓들과 내가 겪었던 일들을 생각이나 해보시지?’
<흠, 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자신도 할 말이 없는지 카이서스는 그렇게 대답하곤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아리안 누나도 잠든 상태니… 일단은 나도 좀 자야겠어.
나는 앉은 상태에서 그대로 뒤로 누우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정말로 괜찮은 거야?”
카이서스의 둥지를 나와 산 아래로 내려가는 도중 아리안 누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다고는 해도 그곳에 있는 게 더 낫지 않아?”
카이서스의 둥지를 떠나기 전에 카이서스의 심장이 폭주하는 것을 늦췄다고 말해둔 터였다.
물론 내가 9서클에 도달한 것은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었어요. 그리고 슬슬 집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요.”
“돌아가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음… 누나가 환각에 당했을 때…….”
“다, 다음에 말해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던, 얼마 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자 아리안 누나는 황급히 말을 끊었다.
아무리 탐구욕이 강한 마법사라도 잊고 싶은 기억인 모양이다.
“그보다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진 걸 보니 다른 방법이 있는 모양이지?”
<쯧쯧, 이 멍청이에게 그런 걸 기대하다니, 콩깍지라는 게 무섭긴 무섭군. 사실 아무 계획도 없는데 말이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한, 또한 나를 진심으로 무시하는 말에 나는 속으로 위협했다.
‘야, 아무리 사실이라지만 계속 그러면 아리안 누나에게 특제 주스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이 미친놈이?! 그걸 마시면 너라고 멀쩡할 것 같으냐?!>
‘자꾸 그러면 그 고통을 무릅쓰고서라도 너를 엿 먹일 각오가 생길 것 같아서 말이야.’
<끄응, 하여간 인간이란…….>
혀를 차며 투덜거리면서도 입을 다무는 것이 느껴진다.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벌써 계절이 이렇게 변했네.”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피던 아리안 누나가 감탄하며 말했다.
우리가 카이서스의 둥지에 들어간 것은 봄의 초입이었는데, 지금은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카이서스의 둥지 내부는 일정한 밝기와 온도가 유지되다 보니 계절이 바뀌는 것도 전혀 몰랐네.
간만에 느긋하게 주변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저 멀리 언덕 아래에 마을이 보였다.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겠네.”
카이서스의 둥지에서 나와 한참 걷다 보니 시간도 어느새 점심때.
몇 달간 말리거나 절인 저장식으로만 식사를 해 먹다 보니 신선한 음식이 그리운 건 우리 둘 다 마찬가지였다.
절로 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우리 둘은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정작 도착한 마을의 분위기는 뭔가 이상했다.
한창 추수할 시기라 활기가 넘쳐야 할 마을 거리는 한산했고, 눈에 보이는 몇 안 되는 주민들의 얼굴도 그리 밝지 않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랑은 정반대의 분위기네.”
아리안 누나도 그 분위기를 느끼곤 조심스레 말했다.
이 마을은 카이서스의 둥지로 향하던 중 마지막으로 들렀던 마을이기에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거리에서 아이들이 웃으며 뛰놀던, 푸근한 분위기의 마을이었을 텐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봐.”
“그러게요. 식사만 하고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는 소곤거리며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이 세 개밖에 없는 자그마한 식당 안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단번에 우리가 외지인이라는 것을 알아본 주인은 테이블을 닦다 말고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상에, 요즘 같은 때에 이런 촌구석까지 여행이시우?”
무슨 의미인지 모를 말에 우리는 자리에 앉으며 되물었다.
“요즘 같은 때라니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식당 주인은 우리 물음에 오히려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산속에 처박혀 있다가 나오기라도 한 거유? 제국이 또 전쟁을 일으킨 것도 모르시우?”
“네?!”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을 서둘러야 할 듯하다.
나와 아리안 누나는 서로를 쳐다보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긋하게 식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네.”
아리안 누나의 말과 함께 우리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등 뒤에서 별 이상한 손님 다 본다며 투덜거리는 식당 주인의 말이 들려왔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여객 마차가 따로 없었기에 어느 농부에게 돈을 주고 건초를 실어 나르던 짐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근처의 큰 마을로 도착한 직후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가장 빠른 마차와 게이트를 이용해서 수도인 트럼벨로 향했다.
전쟁 탓에 수도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인지 줄이 길다 싶으면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는 신분을 밝혀서 우선 게이트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 덕에 출발한 지 나흘 만에 도착한 수도 트럼벨의 모습은 떠나기 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그사이 지나온 마을과 도시 모두 전쟁으로 인한 긴장감이 퍼져 있었지만 트럼벨만큼은 아니었다.
혹시 모를 제국의 계략을 대비하기 위함인지 대부분의 공공시설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트럼벨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짐도 풀지 않고 곧장 왕궁으로 향했다.
나를 알아본 근위병들 덕분에 입궁을 신청하고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듣자 하니 로라스 왕자가 내가 오거든 지체하지 말고 자신에게 보내라는 명을 내려두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본 왕자는 무척이나 피곤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은 정보부를 통해서 들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군. 오랜만이야, 선생. 우리 사이에 쓸데없이 예의를 차린 인사는 관두지.”
예를 취하려던 나와 아리안 누나에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피곤하긴 피곤한 모양이다.
“연락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왕자님이 부르셨다면 곧장 달려왔을 텐데.”
“후, 선생의 사정은 자세히 몰라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쯤은 뻔히 짐작하는데 어떻게 부르겠어? 게다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선생을 부르는 것도 미안하잖나. 저번에 제국에서 고생을 시킨 것도 있고 말이야.”
다짜고짜 마탑으로 찾아와선 선생이 되라며 떼를 쓰던 꼬마의 모습은 이젠 전혀 찾아볼 수가 없군.
시간도 시간이지만 자리라는 것이 왕자를 바꿨겠지.
약간은 감동받아 쳐다보고 있자니 왕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보다 이곳까지 오면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
무엇에 관한 것인지는 뻔하지.
“예. 오는 길에 가족과 스승님께 연락했을 때 대략적으로나마 들었습니다. 그리 좋지는 않다더군요.”
크라우드 왕국과 타이런 제국은 지난번의 전쟁으로 사이가 나빠진 지 오래였기에 양국의 국경수비대는 서로를 볼 때마다 말다툼을 하곤 했으나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전쟁은 아무런 경고도, 징조도 없이 벌어졌다.
해가 지고 난 직후, 타이런의 국경 수비대가 완전무장을 갖추고 국경을 넘어왔다.
그들을 제지하려던 국경수비대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고 공격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크라우드 국경수비대는 수많은 사망자를 냈으나 가까스로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타이런 제국은 자국 영토 내에서 크라우드의 국경수비대가 타이런 국경수비대를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갑작스러운 전쟁에 인근의 군대가 국경으로 모였고, 제국에서도 군대를 국경으로 파견했다.
경계를 하긴 했으나 서로 전쟁 준비는 하지 않았던 상황에서의 전쟁 선포에 각지의 군대가 모이느라 한동안은 조용했다.
그러나 이 주 전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크라우드의 군대가 조금씩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맞아. 매일같이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더 많이 올라오고 있지. 그런데 오는 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연락을 했으면서 왜 내게는 하지 않은 건가?”
약간은 툴툴거리며 말하는 왕자의 모습에 나는 난감해졌다.
“아시다시피 왕가에 통신을 연결하는 것은 절차도 복잡하고 오래 걸리잖습니까. 바삐 오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내가 선생에게 연락이 온다면 곧장 연락하라는 언질을 미리 해뒀을 거라는 건 생각 못 했다니 아쉽군. 아무튼, 이렇게 먼저 찾아와 줬으니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지. 이번 전쟁에 선생의 힘을 좀 빌려줘.”
참전이라, 솔직히 전쟁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싫은 기억뿐이지만……
애초에 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트럼벨로 오면서 대충은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왕자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