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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100화 (100/150)

100화 - 쉴 틈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서 지내는 달콤한 생활을 살짝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내 비밀을 말한 다음 날 내가 맞이한 상황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라엘, 수련에는 건강을 챙기는 것도 중요해. 우선 먹는 것부터 잘 챙겨야 해.”

그렇게 말하며 아리안 누나가 내민 것은 그릇 가득 담긴, 이전에는 무엇이었는지 전혀 짐작이 불가능한 갈색의 진득한 액체였다.

뭔가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의 가래 같기도 한 이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누, 누나. 이건 대체?”

내가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몸을 살짝 떨며 물었다.

“각종 몸에 좋은 채소와 열매 등을 갈았어. 계산대로라면 오랫동안 앉아서 수련해도 몸과 정신을 개운하게 해줄 거야.”

아리안 누나의 말에 나는 다시 야채와 열매였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아, 저기 뭔가 비명 지르는 형상 같은 게 보이는데.

<라엘, 내가 오랫동안 살아온 직감과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건대 이건 절대로 먹어선 안 될 것 같다. 마나의 폭주로 죽기 전에 정신적인 쇼크로 죽을지도 몰라.>

나 역시도 이런 것은 먹기가 무척이나 꺼려졌다.

카이서스의 진심 어린 조언을 받아들여 거절하기 위해 아리안 누나를 보는 순간.

기대와 긴장으로 가득한 표정을 보니 차마 사양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끄응, 모습과 향은 무지막지하지만 설마 잘못되지는 않겠지.

그리고 의외로 맛이 괜찮을지도 모르잖아.

<아, 안 돼, 이 미친놈아!>

카이서스가 놀라 소리치는 것을 무시하고 그릇에 담긴 그것을 마셨다.

…크아아악!

지금의 내가 남들보다도 예민한 미각을 가져서인지, 아니면 원래 이것의 파괴력이 엄청난 것인지.

맵고 짜고 쓰고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혀를 생으로 뜯어내고 거기에 모래를 발라서 비벼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금세 혀가 마비된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찾아왔던 그 강렬한 고통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몸을 움찔움찔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선 나와 감각을 공유하는 카이서스의 비명이 울려대고 있었다.

<갸아아악!>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비명만 질러대는 것을 보니 드래곤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모양이다.

잠시 눈앞이 하얘지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걱정과 죄책감으로 물든 아리안 누나의 얼굴이 보였다.

“괘, 괜찮아? 그, 그렇게 맛이 없어?”

본인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듯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큭, 좋은 마음으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난 아니다! 나는 지금 화산과도 같은 분노가 가득 차오른다!>

응, 아니야.

남의 머릿속에 멋대로 눌러앉은 드래곤의 분노 따위 내 알 바가 아니지.

<크으으…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녀석들에게도 저걸 먹여서 내 분노를 퍼뜨리는 수밖에!>

무슨 드래곤이 이렇게나 한심 그 자체인지……..

나는 아리안 누나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는 혀끝에 느껴지는 고통을 참았다.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있자 아리안 누나는 눈치를 살피더니 내가 내려놓은 그릇을 들더니 조금 남은 그것의 맛을 보려는 듯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아, 앙 데!”

혀의 마비가 덜 풀렸는지 이상한 발음으로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스스로 죽음과도 비슷한 것을 자초하는 모습은……

“윽, 조금 쓰네.”

…어?

<뭐, 뭐라?!>

나와 카이서스가 반쯤 죽음을 맛본, 그 고통을 마시고도 아리안 누나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고작 조금 쓰다는 말이 전부였다.

“조, 조금 쓰기만 하다고요?!”

“응? 응.”

아리안 누나는 내 황당하다는 반응에 마찬가지로 황당한 모습이었다.

자신에겐 조금 쓰기만 할 뿐인 음식인데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나는 다시 그 죽음의 음식을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저 아이의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나도 전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혹시… 나 놀리는 거야?”

살짝 화를 내려는 듯한 누나의 모습에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녜요! 분명 제가 먹었을 때는 끔찍한 고통이……”

그 고통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자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님을 느낀 것인지 아리안 누나는 다시 영문을 몰라 했다.

<…잠깐, 어떤 재료를 섞은 건지 물어봐라.>

갑작스러운 카이서스의 말에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아리안 누나에게 그 말을 전했다.

“재료? 재료라면……”

아리안 누나가 천천히 내뱉는 것들은 나도 알고 카이서스도 아는 재료들이었다.

머리를 맑게 해주고, 체력을 키워주는 그런 것들.

<흐음…….>

대답을 듣고 아무 설명도 없이 생각에 잠긴 카이서스에게 채근했다.

‘야, 뭔데 그래?’

한참을 생각한 이후에야 카이서스는 말했다.

<어쩌면, 네 몸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것 있지 않느냐. 어느 생물에게는 해가 되기는커녕 이로운 것이 다른 생물에게는 독이 되는 것들.>

확실히 그런 게 있지, 다른 동물들은 잘 먹는데 인간에게는 독이거나, 혹은 그 반대인 것들.

‘그럼 대체 뭐가 그 끔찍한 맛을 느끼게 한 건데?’

내 물음에 카이서스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다만 저것에 들어간 것들은 앞으로 피하는 게 좋겠다.>

조금 전의 그 끔찍한 고통을 떠올린 나는 카이서스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결국 그 고통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채로 아직 그것이 남아 있는 그릇을 치웠다.

“흠, 흠. 어찌 됐건. 최대한 효율적으로 빠르게 9서클의 벽을 뛰어넘어야 해. 아직 인간들은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니 쉽지만은 않을 거야.”

조금 전 자신이 만들었던 음식으로 인한 해프닝을 잊으려는 듯 아리안 누나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진지한, 하지만 조금은 조급해 보이는 듯한 누나의 태도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수련을 위해 여기 오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카이서스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고요.”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아리안 누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우선 방법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수련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자, 지금부터 바로 시작하자.”

그렇게 말하며 미트라움 원반이 있는 곳으로 등을 떠미는 아리안 누나의 모습에선 결연함이 넘쳐나서 살짝 두려워질 정도였다.

<흠, 이제야 이놈이 게으름을 덜 피우겠군.>

아니, 내가 언제 게으름을 피웠다고 그래?

<수많은 인간 마법사들이 네가 한 수련에 비해 얻은 성취를 알게 되면 허탈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르니 어디 가서 그런 헛소리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니, 애초에 나처럼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익히게 된 사람과 다른 마법사들을 비교하면 안 되지!

지난번에 마탑에서 지낼 때 봤던 다른 마법사들을 생각하면… 으으!

그들은 수면과 식사도 최대한으로 줄여가며 명상하고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각종 마법서들을 찾아서 탐독했었다.

눈이 퀭하고 걸을 때마다 비틀거리는 것이 마치 좀비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지.

지독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인 그런 사람들과 비교하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게으름뱅이일 거다.

확실히 제대로 쉬지도 않고 혹독하게 스스로를 갈고닦는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무척이나 편하게 지금의 경지에 오른 것이긴 하지.

그 대신 머릿속에 짜증 나는 드래곤을 데리고 산다거나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야.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젓고는 미트라움 원반 위에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심호흡과 함께 내면 깊숙이 집중했다.

* * *

아리안 누나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함께 수련을 시작한 지 네 달 정도가 지났다.

카이서스의 둥지 내부는 온도가 거의 일정했기에 계절의 변화를 체감할 수는 없었지만 바깥은 한창 더위가 기세를 부리고 있겠지.

“후우, 영 진전이 없네.”

명상에서 깨어난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런 진전조차 없으니 초조하고 답답한데, 그 상태에서 매일같이 가만히 앉아서 명상과 마나운용만 하고 있자니 더욱 갑갑해지는 기분이야.

카이서스가 취미로 둥지에 모아둔 마법서들을 읽으며 뭔가를 얻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그 내용을 모두 알고 있는 카이서스가 머릿속에서 읊어대니 굳이 읽을 필요도 없고.

“너무 조급해하지는 마.”

한숨을 내쉬는 내 모습에 어느새 곁에 다가왔던 아리안 누나가 걱정하며 말했다.

누나 역시도 계속해서 둥지 안의 수많은 마법서들을 뒤지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느라 지치고 초췌한 얼굴이었다.

그 마법서들의 모든 내용은 카이서스가 알고 있는 것임에도 아리안 누나는 드래곤과 인간이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수 있다며 포기하지 않았다.

“아리안 누나…….”

최근엔 나를 위해 방법을 찾는 시간을 늘리느라 스스로의 수련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미안함에 그저 이름만을 부를 뿐이었다.

“난 절대로 네가 죽는 걸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을 거야. 너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라도 할 거야.”

피곤함이 잔뜩 묻어 나오는 표정과 목소리였지만, 눈만큼은 힘이 담겨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아리안 누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너도 포기하면 안 돼.”

“물론이에요.”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나도 포기할 수는 없지.

흔들리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잡았다.

<흠, 이러면 어떨까…….>

한동안 기분이 가라앉아선 묻는 말 외에는 먼저 말을 하지 않았던 카이서스가 입을 열었다.

내게 묻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말이었다.

“무슨 말이야? 뭔가 떠오른 거라도 있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묻자 아리안 누나가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쳐다보았다.

“카이서스 님이 뭐라고 하셔?”

내 물음의 대상이 카이서스라는 것을 눈치챈 누나가 물었다.

그나저나 누나도 참, 카이서스라고 편하게 부르라고 해도 계속 존칭을 붙이네.

물론 카이서스의 의견 따위는 반영하지 않고 말하긴 했지만.

역시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마법의 최고봉에 위치한 종족인 드래곤에 대한 경의를 가질 수밖에 없으려나.

나는 조용히 카이서스의 말을 기다렸다.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방법이긴 하지만… 한번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다.>

‘뭔데?’

<일단 저 아이의 도움이 필요한데, 괜찮겠냐?>

“…아리안 누나가 도와줘야 한다는데요?”

갑자기 아리안 누나가 필요하다는 말에 약간 불안해하면서도 말을 전달했다.

“조금 전에도 말했잖아. 나는 뭐든지 할 거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에 내 안에서 카이서스의 음흉한 웃음이 들려왔다.

<후후후, 이성적이지 않은 방법이긴 하지만 해볼 수밖에 없지.>

‘뭐?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데?’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내 물음에도 카이서스는 속 시원히 말해주는 대신 다짜고짜 말했다.

<저 아이더러 저기 왼쪽 구석에 있는 회색 상자 안에 있는 붉은 표지의 책을 읽어보라고 해라.>

‘뭔가 수상한데?’

<뭐? 나를 못 믿는다는 거냐?>

‘너를 믿느니 바르기만 하면 머리카락이 새로 자란다는 수상쩍은 기름을 길거리에서 파는 대머리 아저씨를 믿겠다!’

<그럼 그냥 이대로 있을 거냐?>

“으음…….”

못 믿으면 어쩔 거냐는 듯한 카이서스의 물음에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침음을 흘렸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이대로라면 바뀌는 것이 없다.

‘좋아,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먼저 살펴보겠어.’

회색 상자 안에는 이것저것 용도를 모를 물건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카이서스가 말한 붉은 표지의 책을 집어 든 나는 이리저리 둘러보고, 펼쳐보았다.

일단 소설책 같은데 [라니엔 강가에서 만난 미인과의…….]

‘이딴 걸 왜 보물 창고에 모아둔 거야?’

표지의 색이 붉은 이유가 성인소설이라서 그런 거였냐?!

언뜻 펼쳐보았던 부분도 차마 어린아이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그런 민망한 내용이었다.

<꽤 재미있거든.>

재미를 떠나서 왜 이딴 걸 아리안 누나에게 보여주라는 건데?!

어이가 없어서 눈을 찡그리며 다시 책을 상자에 넣으려는데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아리안 누나가 제목이 적힌 책 표지와 내 얼굴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이 분명한 그녀의 반응에 나는 황급히 소리쳤다.

“카이서스가 장난을 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누나에게 보여주라고 해서 제가 먼저 확인해 봤는데 이런 책이더라고요!”

내가 들어도 변명처럼 느껴지는 말이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어.

내 말에 아리안 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가 들고 있던 책에 손을 뻗었다.

“카이서스 님이 내게 보여주라고 했다고? 그럼 한 번…….”

그렇게 말하던 아리안 누나의 손이 붉은 책에 닿는 그 순간.

“…누나?”

눈앞에서 아리안 누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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