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 드래곤-99화 (99/150)

099화 - 고백

‘아리안 누나는 정말이지… 얼굴을 계속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변태 새끼, 몇 시간이나 너랑 같은 걸 봐야 하는 정상적인 드래곤 생각도 좀 하지 그러냐.>

‘내가 변태라는 것과 네놈이 정상적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겠어.’

<눈 감고 있는 사람 얼굴을 몇 시간 동안 빤히 쳐다보는 건 드래곤이 아니라 인간에게 물어도 변태 자식이라는 말이 나올 거다.>

‘후우, 진정하자.’

저 성격 나쁜 도마뱀은 남을 열받게 하는 게 삶의 보람인 자식이야.

<뒤의 말도 들리거든? 상대를 열받게 하는 건 네놈이다. 인간들 중에서 연인들만 보면 죽이고 싶어 하는 것들이 왜 있는지 알 것도 같군.>

카이서스와 투닥거리는 사이에 천천히 눈을 뜬 아리안 누나는 곧바로 보이는 내 얼굴에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조금 전부터요.”

나 역시 가볍게 웃으며 아리안 누나의 말에 대답해 주자 카이서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저 아이에게 말을 전할 수만 있었다면 이 변태 놈이 다섯 시간이나 음흉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고 전해줬을 거다.>

‘음흉이라니?! 애정이 가득한 시선이거든?’

<흠, 그거 내가 예전에 유희를 하던 때에 만난 범죄자 놈들이 많이 하던 소리 같은데.>

끄응, 말을 말자.

아리안 누나는 원반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이런 엄청난 걸 너만 썼단 말이야? 이러니까 못 따라가는 게 당연하지.”

슬쩍 흘겨보며 투덜거리는 그 모습도 내겐 그저 예뻐 보일 뿐이다.

그나저나, 아리안 누나도 원반에 계속 눈이 가는 모양인데.

저런 효능이라면 마법사에게 있어선 금은보화보다도 더한 가치를 지닌 것이니까.

음, 원반 위에 나와 아리안 누나가 함께 올라가도 될 것도 같은데.

크기가 두 사람이 동시에 올라가서 앉아도 될 정도니까.

<안타깝게도 그건 위험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쓰게 되면 각자의 증폭된 마나의 파장이 충돌하고 엉켜서 서로에게 해가 될 거다. 너야 죽지는 않겠지만 저 아이는 확실히 죽을걸?>

나의 지나가는 생각을 읽은 카이서스가 결과를 말해주었기에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끄응, 그럼 어쩌지? 교대로 번갈아가면서 원반을 이용해서 수련해야 하나?’

<아무리 네가 멍청하다 해도 지금 처지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카이서스의 말대로 나는 서둘러 서클 브레이커에 도달하지 않으면 고통 속에서 죽어갈 처지니까.

‘그래, 그렇지.’

어쩔 수 없이 납득하면서도 뭔가 마음이 무거웠다.

아리안 누나가 내게 빌려달라는 식의 말을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더욱 나를 신경 쓰이게 한다.

반년이나 잠든 나를 곁에서 지켜보며 기다린 사람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으니까.

착잡한 내 심경을 읽은 듯 카이서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어쩔 수 없지. 그냥 다른 미트라움 쟁반을 가져와서 써라.>

‘뭐? 이거 재료 구하기도 힘든 거라더니 두 개나 있었어?’

<장식용과 소장용은 따로 두는 것이 기본 아니냐?>

‘보통은 안 그러거든?’

<그래서? 싫냐?>

‘그 소장용은 어디 있는데?’

<저쪽 뒤로 가면 소장용 물품 창고다. 거기서 잘 찾아봐라.>

‘음, 설마 또 거기 안에서 내가 찾아야 하는 거야?’

<알아서 잘 찾아봐라. 소장용을 사용하게 된 것도 짜증 나는데 내가 찾아주기까지 해야 하냐?>

‘사실 너도 어디 둔 건지 기억 안 나는 거 아냐?’

<크크, 모든 것을 기억하는 드래곤에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내 귀중한 소장용 수집품을 그냥 쓰게 해주는 건 싫거든.>

말은 그렇게 해도 육신을 잃어버리면서 뭔가 뇌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

아니, 애초에 지금은 뇌도 없는 상태던가?

‘젠장, 아무튼 내가 일일이 찾아야 한다는 거군.’

<물론, 그리고 기대해도 좋을 거다. 나의 소장용 보물들은 엄청나니까!>

거 듣기만 해도 암담해지는 소리로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리안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어딜 가려고?”

나의 내면에서 이루어진 대화를 들었을 리가 없는 아리안 누나가 의아해하며 물었지만 나는 대답 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드래곤이 여기 외에 따로 숨겨둔, ‘소장용’ 창고로 간다고 하면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욕심이 생길 거다.

내가 아무 말도 않자 아리안 누나는 슬쩍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여기에 있는 것들 중 일부를 몰래 챙기면 어쩌려고?”

<뭐, 뭣이?!>

‘진정해. 어차피 넌 이제 쓰지도 못하잖아. 게다가 지금 가려는 곳이 더 중요한 곳 아냐?’

<그, 그건 그렇지만. 흠!>

카이서스는 농담이라도 기분 나쁜 기색이었지만 내 알 바 아니지.

“누나를 믿으니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따라가겠다던 기세이던 누나는 김이 샜다는 듯 말없이 미트라움 원반 위에 다시 앉더니 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아무래도 수련이나 더 하고 있을 생각인가 보다.

<거참, 이놈 평소에는 눈치도 없고 생각도 없는 것처럼 굴더니 가끔씩 그럴싸한 모습을 보인단 말이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평소처럼 멍청한 모습으로 금방 돌아오지만 말이다.>

‘뭐야?!’

나는 카이서스와 속으로 아옹다옹대며 소장용 창고의 문으로 향했다.

일반 창고의 한쪽 구석에 있는 문 앞에 선 나는 나는 지난번에 수많은 보물 사이에서 미트라움 원반을 찾느라 고생했던 것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문을 열었다.

‘…야, 어째서 소장용이 일반 창고보다 더 크고 양도 많은 건데?!’

대충 봐도 조금 전에 있던 창고의 1.5배는 커 보이고, 각종 아티팩트나 보물이 더 많은 공간이 나타났다.

<뭐, 그런 거 있잖느냐, 딱히 쓰거나 전시해 두진 않을 건데 남 주기는 아깝고 그러다 보니 몰래 짱박아두는 것들. 그런 것도 함께 있거든.>

‘왜 소장품을 쓰레기랑 같이 두는 건데?!’

<쓰레기라니! 꼭 필요하거나 갖고 싶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것들이라니까!>

‘정상적인 표현으론 그런 걸 쓰레기라고 하는 거다!’

정리정돈과는 담을 쌓은 듯한 드래곤에게 속으로 소리를 질러봐야 바뀌는 건 없었다.

결국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쓰레기와 보물이 가득 차 있는 거대한 소장품 창고 내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대략 몇 시간 동안 쓰레기와 보물들을 뒤졌을까, 간신히 익숙한 모양의 은색 원반을 찾을 수 있었다.

얇기는 해도 사람이 누울 수 있을 정도로 큰 금속 덩어리다 보니 혼자 들어서 옮기기는 힘들지만 굳이 완력을 쓸 필요는 없지.

“그래비티.”

마법으로 미트라움 원반에 가해지는 중력을 약화시키면… 짜잔, 나 혼자서도 가볍게 들 수 있게 된다는 거다.

중력을 마법으로 세밀하게 조작하는 것은 꽤나 고난이도이지만 나는 8서클의 마법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아무리 보는 사람도 없고 네 속마음을 듣는 것도 나뿐이라지만… 이런 별거 아닌 것으로 의기양양해하는 것은 좀 그만두지 그러냐.>

‘드래곤에게 있어서는 별것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존재들에게 있어선 대단하거든?’

아주 잠시나마 의기양양했던 것은 사실이기에 나는 툴툴거리며 원반을 운반했다.

일반 보물 창고로 돌아오자 아리안 누나는 기다리다 지쳤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발견한 나는 혹시나 그녀가 깰까 봐 조심스레 다가갔다.

바닥에 미트라늄 원반을 내려놓고는 누나의 뺨에 몰래 입을 맞췄다.

“응?! 뭐, 뭐야?!”

그 감촉에 깜짝 놀랐는지 아리안 누나는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이내 그 감촉의 범인이 나라는 걸 알아채고는 안심한 듯 웃어 보였다.

“깜짝이야. 갑자기 드래곤이라도 돌아온 건 줄 알았잖아. 왔으면 말이라도 하지 그랬어.”

“그냥 누나에게 뽀뽀하고 싶어서요.”

내 말에 아리안 누나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너는 정말 귀엽다니까. 하지만 다음부터 나를 깨워줄 때는……”

웃음기가 맴돌던 누나의 얼굴이 진지해지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입술에 달라붙는 부드럽고도 강렬한 향기와 감촉.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는 나에게 아리안 누나는 다시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깨워줘.”

“네, 네…….”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황에서도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끔 이 아이를 보면 떠오르는 녀석이 있단 말이지…….>

뭔가 추억에 잠긴 듯 카이서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리안 누나의 행동에 넋이 나간 나로서는 쓸데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며 뺨을 가볍게 쓰다듬어 준 아리안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뭘 좀 먹고 쉴 곳부터 마련하자. 이곳에서 얼마나 수련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 하잖아.”

“네.”

마법 주머니에서 식량을 꺼내어 식사를 하고는 마찬가지로 마법 주머니에서 꺼낸 침낭과 각종 생필품을 정리했다.

마법 주머니가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이곳까지 식량과 생필품들을 들고 오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을 거다.

어느 정도 가져온 짐들을 다 풀고 나자 아리안 누나가 손을 털며 침낭을 들어 보였다.

“오늘은 이만 쉴까? 여기선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긴 하지만 대충 자야 할 시간인 것 같아.”

카이서스의 둥지에 들어올 때가 점심때가 지난 시간이었으니… 지금은 아마 밤이 깊었을 거다.

“그러는 게 좋겠네요. 오늘은 첫날이니까요.”

아리안 누나의 말에 동의하며 모포를 바닥에 깔고 누웠다.

아무래도 안에서도 시간을 확인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나야 카이서스에 의해 신체가 바뀌어서 어지간한 정도로는 몸이 상하지 않는다지만 아리안 누나는 아니니까.

생활 리듬이 엉망이 되어버리면 몸도 상하거니와 수련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잘 자요.”

간단하게 만든 잠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려는데 아리안 누나가 쳇, 하고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정말로 그냥 자게? 첫날이니까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나 하다가 자려고 했는데.”

약간은 실망한 듯한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눈을 뜨며 소리쳤다.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당황하는 내 기색이 재미있었는지 누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누나는 바로 옆에 모포를 깔고 누워선 나를 바라보았다.

꽤나 가까웠기에 누나의 체향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내가 살짝 긴장한 것을 느낀 건지 아리안 누나는 재차 풋! 하고 웃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확실히, 처음 만났을 당시의 아리안 누나는 나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지.

“그러게요. 전 아직도 누나가 왜 저를 싫어했던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싫어하긴. 우리 마탑의 라이벌이자 존경하던 분의 제자이니 얕보이기 싫었을 뿐이야.”

그러고는 쑥스럽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자기 목숨을 걸고 날 구해주는 어떤 바보 때문에 괜히 경쟁심을 가지는 게 한심하다고 느껴져서 어깨에 힘을 좀 뺀 거고.”

그 바보라는 건 나인가?

<역시 네 녀석이 바보라는 건 저 아이도 이미 아는 사실인 것 같구나.>

‘아마 네가 주로 말하는 바보와는 다른 의미일걸?’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많이 바뀌었어요. 그때는 누나가 웃는 모습이 엄청나게 예쁠 거라는 걸 몰랐거든요.”

전에는 기분이 좋을 때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쌀쌀맞을 뿐인 표정이었는데, 이제는 누구나가 호감을 가질 만한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니까.

“…혹시 그런 거 다른 사람이 가르쳐 준 거니?”

“네? 뭘요?”

그런 거라는 게 뭘 말하는 건지 몰라 내가 의아해하며 되묻자 아리안 누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입을 굳게 다문 채 생각하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국에서 무슨 일을 겪은 건지, 그리고 서둘러 수련하려는 이유는 내게도 말해주지 않을 거니?”

“그건……”

다들 궁금해하던 것이었으나 내가 대답하기를 꺼려 했기에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갑작스러운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아리안 누나는 내 뺨에 손을 얹었다.

“내가 널 도울 수 있게 해줘.”

진심이 느껴지는 누나의 눈동자에 마음이 격하게 흔들린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을 눈치챈 카이서스가 툭 내뱉듯 말했다.

<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믿고 말고는 이 아이의 선택이니까.>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말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카이서스와의 만남부터 시작이었다.

집을 나온 내가 숲을 헤메다 카이서스의 둥지로 들어선 것부터,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들 모두를.

한참 후에야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카이서스와의 이야기를 모두 토해낸 나는 눈치를 살피며 아리안 누나를 쳐다보았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려 했으나 충격이 심한지 누나의 동공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보였다.

당연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겠지.

설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거 인간 마법사들에게 가장 위험하고 걸리기 쉬운 게 정신병이라더라.>

‘제발 넌 좀 닥쳐, 이 상황에 헛소리가 나와?’

이 상황에서도 신경을 긁어대는 카이서스에게 속으로 소리치고는 다시 아리안 누나의 얼굴을 살폈다.

계속해서 표정이 바뀌던 아리안 누나는 이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떠진 아리안 누나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남았다고?”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도 단호한 목소리로 묻는 것은 그 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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