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 드래곤-97화 (97/150)

097화 - 비늘

수프 한 그릇을 모두 비우자 아리안 누나는 그제야 안심한 듯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이제 한동안 바빠질 테니 쉬어두는 게 좋을 거야. 다들 널 만나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거든.”

흐음, 왕자와 같은 반응이 하나가 아니라면 꽤 피곤할지도 모르겠는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실소를 지어 보이곤 쟁반을 들고 나가려던 아리안 누나가 뭔가 생각난 듯 멈칫했다.

“그… 가슴에 난 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한동안 조심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갑자기 알아듣지 못할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미 아리안 누나는 방을 나선 이후였다.

“무슨 소리지?”

<고마워하는 게 좋을 거다. 사실 저 아이가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하곤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기 위해 네 몸을 매일 닦아주는 것을 자청했다더군. 뭐,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말이야.>

대체 무슨 소리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상의를 걷어 아리안 누나가 말한 것을 찾아보았다.

“…이게 뭐야.”

고개를 내려 그것을 발견하곤 나도 모르게 말했다.

가슴 한복판, 심장 바로 윗부분에 타오르는 루비와 같은 빛깔의 무언가가 돋아 있었다.

마치 이전에 카이서스가 살아 있었을 때 보았던, 그의 몸을 뒤덮고 있는 비늘과 같은 모양이었다.

카이서스의 것에 비해 무척이나 작고, 방향도 반대였지만 분명 비늘이었다.

<사실 나도 전혀 예상치 못한 건데, 왜 하필 이게 생긴 건지…….>

‘그러니까 이게 뭔데?!’

<뭐긴 뭐야. 아무리 너라도 들어는 봤을 거 아냐. 역린이다, 역린.>

여, 역린이라면 분명 드래곤의 유일한 약점이나 다름없다고 알려진 부분? 하지만 보통은 다른 비늘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는다던데, 이건 너무 드러났잖아!

<역린이 파괴될 정도의 공격이면 어차피 가슴이 뚫릴 텐데, 그럼 어차피 죽을 텐데 뭔 상관이야?>

아, 그건 그렇지.

아무리 불사신이라고 알려진 존재라도 대부분 머리가 잘리면 죽는 것과 비슷한… 이 아니라!

“이런 게 왜 생긴 거냐고!”

너무 답답한 마음에 소리치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드리안 자작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들어가도 될까요?”

문 앞을 지나던 건지, 아니면 앞을 지키고 있던 건지는 몰라도 즉각적으로 들려오는 반응에 나는 황급히 상의를 다시 똑바로 입으며 대답했다.

“아, 아무 일도 아녜요!”

“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밖이 다시 조용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나는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역린을 만져보았다.

분명 금속과도 같은 단단한 감촉인데도 손끝으로 만지자 피부를 건드린듯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인간과 뒤섞이게 된 드래곤이 선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라고 모든 걸 알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끄응,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카이서스조차도 모른다는데 내가 뭔가를 알아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겠지.

‘일단 이건 넘어가고, 그동안 뭔가 들은 것 없어? 내가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넌 주변의 소리를 들었다며.’

<보통 환자 주변에서 세계정세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녀석들은 별로 없어서 말이지. 대부분 네 걱정을 하는 쓸데없는 소리들뿐이었다.>

그런 좋은 소리를 들은 것이 저런 놈이라니, 더럽게 애석하네!

투덜거리며 나는 다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일단은… 돌아왔으니 한동안은 좀 쉬어야겠어.

타이런 제국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휴식을 맘먹자마자 카이서스가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좀 곤란하다.>

‘뭐가 곤란한데?’

<이번에 네가 성장의 계절의 겪으면서 내 심장에도 영향을 줬는지… 각성하는 속도가 좀 더 빨라진 것 같다.>

…어, 그러니까 카이서스의 심장이 내 몸을 잠식하며 나를 죽이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저번에 짐작하기로는 최대 3년이라고 했었다.

그때로부터 내가 잠들어 있었던 기간까지 포함해서 1년이 지났으니 2년도 채 남지 않은 셈.

2년이라는 시간 안에 9서클의 벽을 뛰어넘고, 그 뒤의 벽도 깨야 한다는 것도 암담한데 더 줄어들었다고?!

‘어, 얼마나 남은 거야?’

<10…….>

‘시, 십 개월이라고?!’

<…9… 8…….>

‘…어? 어어?!’

<짜식, 놀라긴. 당연히 농담이지. 대충 1년 정도라고 보면 될 거다.>

‘미친놈아, 지금 그런 농담 할 때냐?!’

점점 줄어가는 숫자에 눈앞이 암담해지다가 농담이라는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성장의 계절로 순식간에 8서클에 오른 것은 좋지만 남은 시간도 절반으로 줄어들다니.

‘하… 그래도 1년이면 충분하군.’

<오, 네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다니 성장의 계절을 겪는 동안 뇌도 변화한 건가?>

‘유서에 무슨 내용을 써야 할지 생각하기에는 말이지.’

<내게 시간만 충분했더라면 다른 녀석을 찾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서로 그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그보다 농담까지 할 정도라면 대책 같은 건 있는 거겠지?’

카이서스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도 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상황에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결론을 내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일단은 8서클이라는 경지에 적응하고, 내 수준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겠군.

<유서는 안 쓰냐?>

기껏 마음을 다잡았던 차에 속을 긁어대는 카이서스의 말에 고함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밖에서 누가 들을까 봐 나는 터져 나오는 고함을 힘겹게 참기 위해 침대 위에서 발버둥 쳤다.

“끄으…….”

<큭큭큭, 그렇게 똥줄 탈 필요는 없다. 심장의 잠식이 빨라질수록, 네 몸 또한 한심한 인간의 수준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 말에 내가 고함을 참기 위해 팔다리를 퍼덕이던 것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단 9서클부터 빠르게 올라가자꾸나. 큭큭큭…….>

9서클을 대충 누워서 책 읽는 것처럼 말하는 카이서스의 말에 나는 이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을 말했다.

‘그보다 꼭 그렇게 웃어야 하는 거야? 꼭 삼류소설에 나오는 악당 웃음소리 같다고.’

<시끄러, 이건 나름대로의 전통과 역사를 가진 웃음이라고!>

무슨 헛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카이서스가 그렇게 말하니 믿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 안에 마나의 막을 둘렀다.

이러면 바깥에서 마나의 파동을 느낀 누군가에게 방해받을 일은 없겠지.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심장의 마나서클을 일깨웠다.

* * *

대륙력 758년 3월 21일

내가 크라우드의 왕궁에서 눈을 뜬 지도 닷새가 지났다.

매일 찾아오는 아리안 누나를 제외하면 다들 내가 편히 쉴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인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 덕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마나를 운용하며 이것저것을 할 수 있었다.

심장의 각성이 빨라지며 내 몸의 변화도 커졌다는 카이서스의 말이 사실인 듯, 이제 막 올라선 8서클의 일부나마를 겨우 닷새 만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후우.”

반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몸이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되어가고 있어서일까.

요 며칠간 한두 시간씩만 자고 수련을 했음에도 전혀 피곤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창밖으로 떠오르는 해를 본 나는 몸이 뻐근하지 않음에도 습관처럼 어깨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소와 식사를 제외하면 특별한 용건 없이 들어오지 말아달라 부탁한 탓에 차를 끓여 마시는 것도 나 스스로 해야 했다.

은제 주전자에 담긴 미지근한 물을 마나의 힘으로 데우고 찻잔에 차를 우려냈다.

티타임을 마치곤 욕실로 가서 가볍게 몸을 씻었다.

욕실을 나와 옷을 갈아입기를 끝마쳤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드리안 자작님, 일어나셨는지요?”

“네. 무슨 일이죠?”

문 밖의 시종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오늘 점심에 자작님의 가족분들과 지인분들께서 만나러 방문하신다고 합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들 만나러 오고 싶은 것을 내가 힘들까 봐 참아왔다고 했었지.

그런 사람들이 온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준비하고 있을 테니 다들 조심히 오시라고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태연하게 대답은 하긴 했지만… 다들 어떻게 봐야 할지 조금은 고민인걸.

어머니와 누나는 물론 스승님도 내 걱정을 무척이나 많이 하셨을 텐데.

설마하니 얼굴을 보자마자 분노의 스매시를 맞는 건 아니겠지?

* * *

설마는 역시였다.

분노의 스매시에서 분노가 눈물로 바뀌었을 뿐 스매시는 스매시였다.

“라엘! 이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간만에 아들을 만나는 것이라 그런지 곱게 차려입으신 어머니는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을 왈칵 터뜨리며 달려오시더니 내 어깨를 철썩철썩 때리시며 소리쳤다.

“어, 어머니, 아파요.”

아프게 할 생각은 아니셨겠지만 나름대로 힘이 실린 탓에 꽤나 아팠다.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하는 내게 그다음 스매시가 작렬했다.

“맞아!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네 생각에 밥도 제대로 못 드셨다고!”

으악, 이건 진짜 아프다.

아들에 대한 걱정이었던 어머니의 손과는 달리 누나의 손에는 원망까지 실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누나는 예전부터 우리 형제들 중에서 힘이 좋았지.

“누나! 살려줘!”

이러다 또 드러누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몸을 뒤로 뺐다.

한참 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때는 적어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생각으로 지냈겠지만…….

이번에는 내가 깨어나지 못하고 누워만 있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봐서 그런 것 같다.

“여, 여보. 그쯤 해둬. 처남 잘못도 아니잖아. 응?”

매형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말리고 나선 후에야 누나는 진정한 듯 심호흡하며 물러났다.

두 모녀가 진정하고 나서야 한걸음 뒤에 서 있던 스승님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는 괜찮은 거니?”

음… 스승님, 아무렇지 않은 척 걱정하시지만 조금 전까지 화나셨을 때 보이시던 표정으로 다가오시던 거 다 봤거든요?

어머니와 누나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 표정이 풀리시던데… 설마 어머니와 누나가 아니었으면 스승님에게 등짝을 맞을 운명이었던 건가?!

“이젠 멀쩡해졌어요. 오히려 전보다 더 좋아진걸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스승님은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으나 이내 그 이상함의 원인을 찾지 못한 듯 원래 표정으로 돌아갔다.

원래라면 8서클이신 스승님께서 나도 8서클이 되었단 걸 눈치채셨을 거다.

하지만 지난번에 타이런의 제3 마법병단장인 유리아 발더스를 만날 때 스승님이 직접 주셨던 마나를 왜곡시키는 팔찌.

그것 때문에 스승님조차도 지금의 내 성취를 알아차리지 못하신 듯하다.

“그래, 그런데 어째서 네가 정신을 잃고 반년이나 깨어나지 못한 건지 말해줄 수 있겠니? 로라스 왕자님께서 물어도 말해주지 않았다던데.”

마법사답게 스승님은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을 잠시 생각하던 나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지금은… 말씀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점점 드래곤처럼 몸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쉽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혹시… 그가 너에게……”

내가 이유를 명쾌하게 밝히지 못하자 스승님은 어두운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차마 말을 끝맺지도 못하는 스승님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아뇨. 그 사람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니.”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그동안 루리스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무척 걱정하셨을 테지.

“다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이제 괜찮으니까요.”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이젠 뭘 할 거야? 제국에 붙잡혀 지내던 것도 끝났잖아.”

원래대로라면 1년의 시간 중 아직 한 달 정도가 남긴 했지만 먼저 돌려보낸 것은 제국이니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

누나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글쎄, 한동안 혼자 조용히 수련을 할까 해. 아참, 그러고 보니 조카는?”

누나가 임신 4개월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집에서 유모가 돌봐주고 있어. 아직 너무 어려서 왕궁에 데려오기는 힘들어서.”

“그럼 일단 조카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네.”

“당연하지. 그럼 보러 안 올 생각이었어?”

약간은 툴툴거리며 말하는 누나의 모습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 * *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왕자의 배웅을 받았다.

“조금은 섭섭해, 선생.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선생을 그만둔다니.”

뚱한 표정으로 말하는 왕자의 모습은 3년 전 그대로였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또다시 한동안 개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워야 할 수도 있어서요.”

“에휴, 사정이 있다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한번 선생은 영원한 선생이라는 말 알지? 다음에 내가 부르면 다시 와야 하는 거 알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뿐이죠.”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왕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는 배웅하지 않을 거야. 조심해서 가게.”

“네.”

나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왕궁을 나왔다.

왕궁을 나서자마자 아리안 누나와 네팔렌 백작가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널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바빠서 나만 왔어.”

“누나와 오붓하게 갈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됐네요.”

농담을 섞은 내 말에 누나는 흐뭇하게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갈까?”

“네.”

나는 아리안 누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를 태운 마부도 내 마음을 아는지 천천히 마차를 몰아 네팔렌 저택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