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 드래곤-96화 (96/150)

096화 - 성장의 계절

출구를 나온 내가 본 것은 불타고 있는 페루스의 도시였다.

“샅샅이 뒤져라!”

“살아남은 놈들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찾아!”

이미 한차례 전투를 치르고 난 이후인 듯 길 곳곳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대부분이 페루스들의 것이었다.

“아, 안 돼…….”

<흥분하지 마라.>

“지금 흥분하지 않게 생겼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죽어나가는데?!”

곳곳에 타인의 피를 묻힌 채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지나가던 제국병사들이 내 외침을 듣고는 돌아봤다가 인간의 모습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려 계속 움직였다.

만일 내가 말하는 빌어먹을 놈들이 자신들의 잘나신 황제라는 걸 알았다면 그냥 지나가진 않았겠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외침이 귀에 들어왔다.

“도망친 놈들을 찾았다! 저쪽이다! 놓치지 마라!

고개를 번뜩 들어 그 외침이 들려온 곳을 쳐다보았다.

투구로 얼굴을 가린 기사 하나가 검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악을 쓰듯 소리 지르고 있었다.

서, 설마!

나는 허겁지겁 제국군들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는 방향은… 며칠 전 노을빛 바람이 내게 보여주었던 소원을 비는 동굴과 같은 방향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전력을 다해 달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살려야 해.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는 이름의 힘을 이용한다면 조금이나마 제국군을 멈춰 세울 수 있을지 몰라.

그사이에 페루스들을 설득하면… 목숨만이라도 건질 수는 있을 거야!

달려가는 와중에도 머릿속을 수많은 생각들이 가득 채웠다.

하지만 모두 다 쓸모없는 생각들이었다.

“모두 불태워!”

“나오지 않는다면 나오게 만들어줘라!”

동굴 안쪽으로 제국군 병사들이 기름이 든 주머니를 던지고, 마법사들이 파이어 볼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와 동굴 안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안쪽에서부터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악!”

“어머니!”

고통과 원한으로 얼룩진 비명 소리들이 귀를 타고 머릿속으로 박히며, 나는 분노에 집어삼켜졌다.

“야, 이 개새끼들아!”

갑자기 나타난 내가 페루스들이 내뱉는 비명과도 흡사한 소리를 내지르자 제국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살기로 얼룩진 흉포한 시선들을 받으며 나는 마나를 운용했다.

“파이어… 쿨럭!”

하나 나는 끌어올린 마나로 마법을 시전하기도 전에 내장이 꼬이는 듯한 고통과 함께 쓰러져 버렸다.

“이, 이게 무슨… 크악!”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내가 바닥에 쓰러진 채로 몸을 뒤틀거나 말거나 제국군은 언제 돌아봤냐는 듯 하던 짓을 계속했다.

<역시, 성장의 계절이었군.>

‘하필 이런 상황에 무슨 개같은 소리야?!’

목소리를 내뱉는 것도 쉽지가 않아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모든 드래곤들이 해츨링 시절에 한 번씩은 겪게 되는 거다. 보통 한 계절 내내 앓기에 성장의 계절이라 불리지.>

‘난 드래곤이 아니잖아!’

<그래서 나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너도 일부는 드래곤이라고 걸린 모양이다. 이것 참 흥미롭군.>

‘지금 흥미롭다는 말이 나와? 지금도 저 빌어먹을 놈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잖아!’

속으로 소리치는 내 말에 카이서스는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분노로 눈과 귀가 멀기라도 한 거냐? 어차피 이젠 구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 같다만.>

그 말에 정신을 차라니 더 이상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불을 질러대던 제국군도 어느새 자리를 떠버린 곳에는 역겹고 매캐한 냄새만이 가득했다.

“아, 아아……”

어떠한 말도 나오지 못하고 그저 신음과도 같은 소리만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쯧,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좋네.”

곁에서 들린 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곁에 서 있던 바이엔이 잔뜩 언짢은 시선으로 아직도 연기가 피어나는 동굴을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국군을 먼저 공격했다가 죽었다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문제 삼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실패로군, 실패야.”

말의 내용과는 달리 전혀 감흥 없는 무심한 목소리였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가 애초에 그런 거였나?

내가 먼저 공격하게 해서 그걸 빌미로 날 해치우려고?

<멍청한 것들이군. 명분이니 뭐니 하는 자기네 기준으로 생각하는군. 누가 먼저 공격했건 우리에게 그건 전혀 신경 쓸 게 아닌데 말이야. >

카이서스와 바이엔이 머릿속과 옆에서 무어라 말하고 있었지만 점점 들리지 않았다.

‘날 좀 내버려 둬……’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점점 시야가 흐려지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크아아, 이 얼간이가 조용하니 따분하기 짝이 없군! 대체 언제쯤에나 정신을 차릴지!>

문뜩 들려온 카이서스의 짜증 가득 섞인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시, 시끄러……’

머리가 멍해서 그 짧은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는 것도 힘겨울 정도였다.

<음?! 이런 빌어먹을, 이제야 깨어난 거냐!>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반가워하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떠보려 애쓰며 대답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입 밖으로 말을 내뱉으려 했으나 나온 것은 힘없는 신음 소리뿐이었다.

<그거라면 아마 이 아이가 대답해 줄 거다.>

‘그게 누군데?’

라고 묻자마자 귓가에 무척이나 듣고 싶었던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엘? 라엘! 너 깨어난 거야?!”

무언가가 요란하게 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들려온 것은 아리안 누나의 목소리였다.

…어?!

나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눈을 뜨려 애썼다.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것을 사용하듯 뻑뻑한 느낌을 받으며 힘겹게 눈을 뜬 내 앞에 아리안 누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아리안 누나가… 어떻게?”

영문을 몰라 멍하니 쳐다만 보는 나를 아리안 누나가 와락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갑자기 혼수상태로 돌아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영영 못 깨어나는 건 아닐까 걱정했잖아!”

약간은 화를 내듯 소리치는 그 목소리에서는 나를 걱정했던 것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감정이 격해진 탓인지 그동안 힘들었던 것을 내게 토해내듯 말하던 아리안 누나의 말을 듣던 중 뭔가가 이상함을 느끼곤 말을 끊었다.

“자, 잠깐만요. 방금 눈을 떠서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돌아왔다니요?”

혼란스러워하는 내 모습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내게서 떨어진 아리안 누나가 내가 정신을 잃고 있던 사이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타이런에서 돌아온 지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 갑자기 제국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이 죽은 듯이 잠든 너를 마차에 실은 채로 보내왔어.”

그렇게 말한 누나는 그날의 감정이 떠오른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할 거라던 사람이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깨어나지 못하는 건… 꽤 힘들었어.”

괴로워 보이는 누나의 표정을 보며 나는 황급히 카이서스에게 물었다.

‘카이서스. 대체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야?’

<흠, 대충 반년 조금 넘었을 거다.>

바, 반년 이상이라고?!

어림잡아 생각했던 것보다도 긴 시간에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반년 이상 누워 있었다는 게 사실이었는지 갑자기 움직이려 하자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휘청거렸다.

내가 넘어지려 하자 아리안 누나가 깜짝 놀라 붙잡아준 덕분에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찰박.

침대를 나와 바닥에 닿은 발끝에서 미지근한 감각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는 세숫대야와 수건이 떨어져 있고 물이 쏟아진 듯 온통 흥건하다.

마치 환자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는 듯한… 설마?

<그래, 네가 잠든 동안 저 아이가 널 돌봐준 거다. 욕창이라도 생길까 봐 몸도 움직여 주고 이곳저곳을 닦아주더구나.>

‘흐에엑?!’

“아, 이것 좀 치울게. 이제 막 일어났으니 조금만 더 누워 있어.”

내 시선이 닿는 곳을 확인한 아리안 누나가 태연하게 나를 다시 눕혀주고는 수건으로 물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차마 혹시 어느 곳까지 닦았었냐고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아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누웠다.

<곳곳을 다 닦아주던데? 아주 조심스레 닦아주는 것이 나쁘지는 않더구나.>

‘아, 좀 그런 건 굳이 말하지 말라고!’

그보다 저 자식은 내가 정신을 잃고 있던 사이에 내 감각을 통해 그 손길을 느꼈다는… 아, 아니 그게 아니지.

‘반년 넘게라니, 한 계절치고는 너무 긴 것 아니야?!’

보통 1년은 4계절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봄과 가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런 저주받은 곳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한 계절이 반년이나 지속돼?

<아무래도 절반은 인간인 네 신체가 적응하기엔 너무 많은 마나였던 모양이지. 심지어 모두 받아들이지도 못했고 말이야.>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는 카이서스의 말을 듣다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어 되물었다.

‘많은 마나라니?’

<성장의 계절이란 건 해츨링이 성룡이 되기 전에 마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몸을 바꾸는 거다. 마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신체의 변화에 적응하느라 깊은 잠에 빠져드는 거지.>

때마침 대야와 수건을 치우기 위해 아리안 누나가 자리를 뜬 터라 나는 조심스레 마나를 움직여 보았다.

‘헉!’

<쯧, 성장의 계절을 거치고도 고작 이 정도라니, 처참하군.>

카이서스는 그렇게 말했으나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엄청난 양의 마나에서 느껴지는 농밀함은 나에게 아찔함을 느끼게 했다.

이렇게 엄청난 마나라니……

‘설마 나 8서클?’

<적어도 9서클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건만… 부끄러우니 그쯤해라.>

그렇지 않아도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나를 운용했더니 머리가 어질했다.

마나를 거두어들이자마자 아리안 누나가 당황한 기색으로 들어섰다.

“라엘, 방금 무슨 일이야?”

“네, 네?”

“방금 엄청난 마나가 여기서 느껴져서……”

아리안 누나도 뛰어난 마법사이다 보니 조금 전의 그 농밀한 마나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지.

“어… 그러니까… 추, 축하 같은 거예요. 저를 가호하는 드래곤이 제가 깨어난 것을 축하해 주더라고요.”

<넌 정말 착하게 살 수 있을 거다. 거짓말을 더럽게도 못해서 누굴 속이거나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카이서스의 말대로 내가 즉석에서 지어낸 말을 아리안 누나가 믿을 리는 없을 거다.

잠시 나를 쳐다보던 아리안 누나는 또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멀쩡했던 것도 드래곤의 영향이니?”

“네?”

반년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말에 내가 잠시 이해하지 못해서 되물었다.

“상태가 더 나빠질까 봐 네게 뭐라도 먹여보려 여러 사람이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삼키질 못했거든. 그런데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건강이 좋아져서 그냥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

내가 반년이나 굶은 상태라고?

그다지 배가 고픈 느낌은 없는데?

그 말에 카이서스가 코웃음을 치며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런 게 필요할 리가? 네 몸은 그동안 차오르는 마나로 바뀌어가던 중인데. 그런 순수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방해만 될 테니 몸이 스스로 거부한 거다.>

확실히 드래곤이 아니고서는 설명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기이한 현상이긴 하군.

“어… 드래곤의 영향이긴 하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아리안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좀 더 자세히 말해줄 거라 믿어.”

부드러운 그 시선에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거야 원, 다음에 내가 유희할 때 배운 연기라도 가르쳐 주든가 해야겠군.>

카이서스의 한심해하는 목소리 뒤로 아리안 누나가 깜빡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참, 네가 깨어난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지. 많은 사람들이 네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아리안 누나가 나가자 나는 그제야 방 안을 제대로 살펴보았다.

지낸 시간보다 비워둔 시간이 더 많은 내 집은 아니었다.

<크라우드의 왕궁 안이다. 그 왕자 녀석이 너를 가장 좋은 곳에서 치료해야 한다며 데려왔지.>

로라스 왕자에게 받은 호의를 생각하면 감사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뭔가 한편으로는 부담도 되는군.

혼자 남은 동안 내면을 관조하며 성장의 계절로 인해 바뀐 내 상태를 확인하던 중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황급히 눈을 뜨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로라스 왕자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선생! 정신을 차렸는가?! 어디 불편한 곳은 없나?!”

“왕자님!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드리안 자작은 아직 환자이옵니다!”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 군.

시종이 난감해하거나 말거나 성큼성큼 다가온 왕자가 내 손을 붙잡았다.

“대체 그놈들이 뭔 짓을 했던 거야? 멀쩡하던 사람이 왜 반년이나……!”

당연히 제국에서 내게 뭔가를 했을 거란 생각에 분노로 말을 맺지 못하는 로라스 왕자의 모습에 나는 턱을 긁적였다.

제국이 죄 없는 페루스들을 학살하는 등 잔혹한 짓을 수없이 저지르기는 했지만.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은 따지고 보면 사실 카이서스 때문인데 말이지.’

<뭐? 그게 왜 내 탓이냐?>

‘그야 네가 나에게 이상한 것만 먹이지 않았다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 아냐.’

<드래곤의 심장을 이상한 거라고 말하는 미친놈은 너뿐이다.>

카이서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힘이 담긴 심장이건 뭐건 그런 건 원하는 작자들에게나 귀중한 거지, 난 전혀 원하지 않았다고.’

내가 원했던 건 그저 적당한 곳에 적당히 정착해서 적당히 먹고사는 거였는데 말이지.

뭔가 일이 너무 커져 버린 것 같다.

내가 카이서스와 대화하느라 아무 말도 없자 왕자의 곁에 서 있던 시종이 조심스레 말했다.

“드리안 자작이 마음을 추스른 후에 물으시지요.”

내가 너무 끔찍한 일을 당해서 차마 말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뭐, 굳이 해명하기 귀찮았기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으음, 그렇군. 내 너무 흥분한 것 같군. 이제 막 일어난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하면 안 되겠지. 깨어난 모습은 봤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네. 괜찮아지면 만나러 오게.”

왕자가 손을 흔들며 나가자 그를 따라왔던 한 무리의 수행원들도 돌아갔다.

소란스러웠던 방이 순식간에 다시 조용해지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으려하는 순간 재차 문이 열렸다.

아니, 내가 깨어난 게 반가운 건 알겠는데 좀 쉬자고.

보통 중환자가 깨어나면 하루 이틀 정도는 안정을 취하게 해주는 게 정상 아냐?

난 반년이나 일어나지 못했던 중환자라고!

뭐, 물론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지만 보통은 그렇다는 거지.

“피곤하지?”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아리안 누나니까 괜찮지, 암, 괜찮고말고.

“그동안 안 먹어도 괜찮았다고는 해도 혹시나 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아리안 누나는 쟁반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걸쭉한 수프가 담긴 그릇이 쟁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겉은 밋밋해 보이지만 은은하게 풍기는 구수한 냄새가 나를 자극하며 배 속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음식물 같은 건 먹으면 오히려 안 좋다고 카이서스가 그러지 않았나?

<성장의 계절이 끝났으니 먹어두는 게 좋을 거다. 아직도 너의 대부분은 하등한 인간이니 말이다.>

듣기에 그리 좋지 않은 단어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알아서 무시하고 해석하자면 먹어도 된다는 거군.

“잘 먹을게요.”

내가 쟁반의 그릇에 손을 뻗자 아리안 누나가 내 손등을 탁! 하고 치더니 짐짓 엄하게 말했다.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파서 누워 있던 것과는 뭔가 다르기는 하지만 굳이 거절하지는 않기로 했다.

내가 예상한 대로 아리안 누나는 그릇을 자신이 들더니 수프를 한술 떠서 내밀었다.

“아, 해.”

“아, 아아…….”

입을 벌리자 아리안 누나가 떠먹여 주는 수프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확실히 왕궁 주방에서 만든 수프라 그런지 맛있지만 아리안 누나가 직접 먹여주니 더 맛있는 것 같다.

이렇게 누군가 먹여주는 건 어릴 때 잔뜩 열이 났을 때 이후 처음인 것 같은데… 헤헤.

“그런데 누나, 다른 사람들은… 헙.”

말을 하다 말고 입안으로 들어온 숟가락에 입을 다문 나를 아리안 누나가 슬쩍 흘겨보았다.

“지금은 우리만 있잖니.”

“넵.”

더 이상 다른 걸 물었다간 화낼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올 거야.”

<쯧쯧, 자주 있는 일이긴 하지만 너의 눈치 없음에는 재차 놀라는구나.>

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 둘만 있게 해주려고 배려해 주는 건가?

한마디로 공인된 관계 뭐 그런……?!

‘그럼 수행원을 우르르 끌고 나타났던 왕자님은?’

<너한테 배웠으니 너 같은 놈이 된 거겠지.>

‘앗, 아아…….’

혀를 쯧쯧 차는 카이서스의 말에 나는 차마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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