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 불타는 평화
제국인들과 창고에서 함께 지내는 것은 정말 힘겨운 시간이었다.
지금까지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기는 해도 일단은 개인 방에서 혼자 지냈었는데.
칸막이도 없는 곳에서 나에게 호감이라곤 쥐뿔도 없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으려니 갑갑해서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페루스의 도시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오후.
어제와 같이 머릿속으로 수련을 하던 도중 창고 문이 열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의 말랑 발바닥이 들어왔다.
“장로님들께서 보자고 하신다.”
드디어 페루스의 지도층들과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그 말에 여기저기 흩어져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던 제국인들이 진지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잘됐군. 이곳의 벌레들을 세는 것도 지겨워지려던 참이었는데.”
사절로서 함께 온 제국인들 중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사내가 툴툴거리며 일어섰다.
따로 자기소개는 하지 않았으나 풍기는 분위기나 말투에서 군인이라고 짐작되는 자였다.
“흥! 준비를 마치거든 나와라. 뭉그적대지 말고.”
그의 말을 무시라도 하듯 말랑 발바닥은 코웃음을 치며 할 말만 하고는 다시 나가 버렸다.
“자, 그럼 저 야만인들과 결판을 내러 가봅시다.”
말랑 발바닥의 무시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 군인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둘 나설 채비를 하며 움직였다.
다들 말도 없이 움직이는 모습에 나는 왠지 모를 소름이 돋았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었다.
“뭐 해. 너도 준비해.”
바이엔이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재촉했기에 나도 내키지는 않지만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채비를 마친 내가 창고를 나오자 동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말랑 발바닥이 우리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따라와라.”
역시, 그 며칠 사이에 인간들에 대한 악감정이 사라질 리 없겠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숨어서 지켜보는 시선들을 느끼며 우리는 도시 중앙의 길을 걸어갔다.
이국적이기 짝이 없는 페루스의 도시 정중앙에는 오래전에 잘려 나간 듯한 커다란 나무 밑동만이 있었다.
잘리기 전에는 장정 네다섯이 끌어안아야 할 정도의 아름드리나무였을 것이다.
“다 왔다.”
“저걸 테이블로 쓰는 건가? 하지만 의자는 보이지 않는데.”
학자풍의 제국인이 손가락으로 모자를 매만지며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도시 중앙의 나무 밑동은 커다란 테이블로 써도 될 정도로 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랑 발바닥은 나무 밑동을 향해 소리쳤다.
“장로님들! 이방인들을 데려왔습니다!”
그 외침에 나무 밑동 옆의 땅이 불쑥 올라오더니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제국인 몇몇이 허!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안으로 들이시게.”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던 말 머리의 페루스는 노인과 같은 컬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말랑 발바닥은 말대꾸 없이 순순히 우리를 아래로 내려보냈다.
나무 밑동의 아래의 공간은 꽤나 넓었다.
수십 명이 족히 들어올 수 있을 공간 중앙에 화로를 두고 일곱 명의 페루스들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다들 동물의 얼굴인지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손의 주름을 봤을 때 다들 나이가 지긋한 듯했다.
저들이 아마 페루스의 장로들이겠지.
그들 사이에서 주름이 없는 사람은 춤추는 강아지풀뿐이었다.
흠, 춤추는 강아지풀의 신비한 능력을 생각해보면…… 내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지.
아씨라고 불리긴 하지만 다들 배려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
“앉으시구려. 그대들의 말을 들어드리리다.”
함께 앉은 장로들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춤추는 강아지풀이었다.
페루스들 사이에서 사만이라는 존재는 장로보다 존중받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앉으라고? 우리더러 의자도 없이 땅바닥에 앉으라는 거요?”
딱 봐도 귀하게 자란 듯한 귀족으로 보이는 제국인 하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런 그를 춤추는 강아지풀과 장로들은 나무라지 않고 그저 지그시 쳐다만 보았다.
“됐소. 우리가 대접이나 받자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잖소.”
중년 군인이 잘라 말하며 장로들 맞은편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말과 행동에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군소리를 하지 못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귀족 사내만이 눈을 찡그리며 서있었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자 바이엔이 말했다.
“여기 있는 사절이 황제 폐하의 뜻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시선은 장로들에게 향한 채로 바이엔은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일단은 명목상으로는 사절인 내게 황제의 뜻을 전하라는 거다.
일단은 잘되건 안 되건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면 사절로서 행세는 해야 하니까.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황제의 뜻을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타이런 제국의 황제께서는 여러분들이 제국에 복속되기를 원한답니다. 그리고 제국에게 거역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징표로…… 여러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을 바치라는 군요.”
제국, 아니, 인간들을 싫어하는 그들로서는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법한 말에도 춤추는 강아지풀과 장로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역시 되도 않는 소리를 하러 온 거였군!”
뒤에서 장로들을 보필하듯 서 있던 말랑 발바닥이 버럭 화를 내는 것을 봐선 그들에게 모욕적인 것은 확실한데도 말이다.
“가만히 있게나, 젊은 전사여.”
장로 중 하나가 제지하자 말랑 발바닥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장로들은 말랑 발바닥과는 달리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흐음, 저 젊은이가 그 사람인가?”
“생각보다는 평범하게 생겼구먼.”
“너무 약해 보이는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과 생김새를 평가하는 말에 나는 의아해할 뿐이었다.
평범하다거나 약해 보인다는 말이 좀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일단은 반박하기 어려우니까 넘기도록 하고.
‘그 사람’이라니?
마치 이전부터 나에 대해서 들어봤다는 태도였다.
춤추는 강아지풀에게 뭔가를 들은 모양이긴 한데, 대체 뭘 들었기에 장로들이 이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지?
“감히 황제께서 보내신 사절을 무시하는 건가!”
아직까지도 서 있던 귀족 사내가 불쾌해하며 소리쳤다.
아니, 가장 무시했고 무시하고 있는 건 댁들인데요.
장로들은 귀족 사내의 말에 놀라울 만큼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나마 한 명이 대답을 해준 것이 다였으나 그 대답도 귀족 사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뭐, 댁들 황제지 우리 황제는 아니잖소. 우리 눈에는 그저 태어난 것 하나만으로 으스대는 인간들 중 하나일 뿐이오.”
“무, 뭣이?!”
귀족 사내가 충격을 받은 듯 말까지 더듬으며 삿대질을 하거나 말거나 장로들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 젊은 인간이여. 그대의 이름은 뭔가?”
“라, 라엘 드리안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내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장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라엘 드리안? 재미있는 이름이구먼. 나는 사막의 강물이라네.”
“아뇨, 그냥 라엘인데요.”
“지금 뭐 하는 거요?! 우리와 대화할 생각이 아예 없는 거요?!”
충격에서 벗어난 귀족 사내가 재차 소리치자 여우의 머리를 한 장로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거 지금 하고 있잖나. 이 젊은이가 사절이라며? 사절과 친분을 쌓고자 이야기하는 중인데 댁이야 말로 뭐 하는 게야? 멍청하면 말이라도 말아야지, 쯧.”
태연하게 막말까지 섞어가며 하는 말에 그는 재차 충격에 빠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중년 군인이 끼어들었다.
“당신들은 제국이 두렵지도 않소? 우리의 군대가 온다면 이 별 볼 일 없는 도시쯤은 순식간에 불타리라는 것쯤은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당신들이라도 알고 있을 텐데.”
태연하게 살벌한 이야기를 하는 중년 군인의 말에 처음에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라 한 말 머리의 장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살짝만 흔들었음에도 워낙 길쭉한 얼굴이다 보니 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리는 것도 그리 좋지만은 않다오. 거기에 바꾸지 못한다는 것까지 알게 되어버리면 결코 달갑지 않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말 머리 장로는 아까부터 옆에 놓여 있던 차를 마셨다.
말의 머리로 차를 마시는 것은 꽤나 불편해 보인다.
특별히 맞춤 제작 한 잔이 아니면 마시기도 힘들겠는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 장로의 말에서 뭔가를 눈치챘는지 중년 군인이 장로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둘러보곤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들은 처음부터 우리의 제안을 들을 생각조차 없는 것 같군.”
“애초에 댁들이 내민 것이 제안이긴 했나? 일방적으로 겁박하며 요구한 거지.”
여우 장로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하자 중년 군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럼 어째서 우리를 도시 안으로 들인 거지?”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화할 생각도 없으면서 굳이 도시 안으로 데려오고, 장로들과 만나는 자리까지 마련하다니.
제국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 역시도 의아해하며 장로들을 쳐다보았다.
“뭐, 굳이 말하자면… 저 젊은이를 한번 보려던 거지.”
여우 장로가 나를 쳐다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같은 페루스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인간인 나로서는 장로의 여우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네? 저요?”
나를 보기 위해서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되묻자 여우 장로는 물론 다른 장로들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흥, 이런 동떨어진 곳에도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에 대한 소문이 퍼진 건가?”
귀족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리자 춤추는 강아지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깥에선 그리 불리는 게요? 우리는 그런 것까지는 알지 못한다오.”
“그럼 왜 이 사람을 만나려고 한 겁니까?”
곁에 있던 바이엔이 나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나 역시 그 이유가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직 비밀이라오.”
무엇 하나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는 그들의 행동에 더 이상의 회담은 무의미한 일이라 여긴 것인지 중년 군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앉아 있어봐야 시간 낭비일 것 같군. 우린 이만 돌아가겠소.”
“조심히 가시오.”
춤추는 강아지풀과 장로들은 일어서는 제국 사람들을 붙잡지 않았다.
“이번에는 사절의 목을 치지는 않을 듯하니 다행인가?”
다른 사람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던 바이엔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페루스들더러 들으라는 듯 말했다.
그렇게나 날 죽게 만들고 싶은 거야?!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춤추는 강아지풀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는 무고한 이들은 해치지 않으니.”
이전의 사신들은 죽어도 할 말 없는 짓을 저질렀었다는 것을 돌려 말하는 거겠지.
“갈 거라면 늦장 부리지 마라.”
우리가 떠난다는 말에 말랑 발바닥이 재촉했다.
거의 내쫓기듯 말랑 발바닥의 안내를 받아 창고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흥, 이 누추한 곳도 이젠 안녕이로군. 문명으로 돌아가면 몸부터 씻어야겠어. 몸에서 짐승들의 누린내가 나는 것 같으니 말이야.”
귀족 사내가 짐을 챙기는 와중에도 투덜거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역할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 작자의 역할은 불평불만과 주변 사람들을 도발해서 시선을 끄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보다 황제께서 지시하신 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으니 어찌해야 할지…….”
한숨을 내쉬듯 말하는 중년 군인의 말에 귀족 사내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놈들의 감시가 삼엄하여 나갈 수조차 없었잖습니까. 어차피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찾다니?
대체 뭘?
아무래도 황제는 다른 사절단들에게 무언가 밀명을 내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거라니, 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내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쳐다보고 있자니 중년 군인이 귀족 사내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들이 대화를 멈추고 짐을 챙기던 것을 마저 했다.
어쩐지 뭔가 불안한데, 대체 뭘 감추고 있는 거지?
몹시도 불길했으나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페루스 전사의 안내를 받아서 동굴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우리를 안내한 페루스가 돌아가자 중년 군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색의 작은 보석이었다.
갑자기 보석을 왜 꺼내나 싶던 순간 그가 손에 힘을 주어 보석을 부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보석에 담겨 있던 마나가 해방되며 빛을 발했다.
안에 담겨 있던 마나를 느끼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가공된 아티팩트였다.
“그건 뭡니까.”
내가 묻자 그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곧 알게 될 거네.”
그렇게 말한 그는 먼 곳을 응시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0여 분쯤이 지났을까.
콰앙-!
거대한 폭음이 저 멀리에서부터 들려왔다.
“시작했군.”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게 대체……”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숲 속에서 한 무리의 군인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전투를 치를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전 병력이 이미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하딘 마갈록 중장님,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좋아. 지휘소로 안내하도록.”
“지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내가 소리쳐 묻자 새로 나타난 군인들을 앞장세우던 하딘 중장이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내미신 호의의 손길을 내친 자들에게는 파멸뿐인 것이 당연하지 않나.”
“고작 그런 이유로 조용히 살고 있는 저들을 공격한다고요? 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네의 동의 따위는 필요 없다. 이건 제국의 결정이니. 자네는 구경이나 해. 만약 방해했다간…….”
그 결과에 대해선 말을 아끼며 하딘 중장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동했다.
바이엔과 호위대, 그리고 나는 덩그러니 그곳에 남겨졌다.
“이럴 거라면 왜 나를 이곳에 보낸 거죠?”
허탈한 내 목소리에 바이엔이 무신경한 태도로 대꾸했다.
“나야 모르지. 따라가서 구경할 생각 없으면 이만 우리는 돌아가자.”
귀찮음이 역력히 묻어 나오는 바이엔의 모습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페루스의 도시에서 만났던 노을빛 바람이 떠올랐다.
“이대로 갈 수는 없어요!”
나는 뒤돌아서서 조금 전에 나왔던 동굴로 달려 들어갔다.
“이봐요! 어딜 가는 겁니까?!”
“막지는 마. 뒤만 따라가도록 하자고.”
뒤에서 호위대와 바이엔의 말이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계속해서 달렸다.
어두컴컴한 동굴을 얼마나 달렸을까, 출구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