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 노을빛 바람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에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분명 내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는 것은 아직 말하지 않았을 텐데?
심지어 내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카이서스가 곁에 항상 있다는 것은 모를 텐데!
내가 당황하자 카이서스가 혀를 끌끌 찼다.
<멍청한 녀석, 눈치라는 것을 좀 키워보거라. 아까부터 저 아이의 태도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거냐? 처음부터 너에게 대우를 해준 것은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이 몸을 느꼈기에 그런 것 아니겠느냐.>
잘난 척하는 카이서스의 말에 조금 짜증은 났지만 사실인 듯했다.
“대체 어떻게……?”
“본녀의 하찮은 재주라고 해두지요.”
<사만이라는 것은 샤먼이라는 것들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운명을 읽고, 영혼과 소통하는 뭐 그런 거지.>
카이서스가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운명을 읽는다는 말도 안 되는 말에 내가 잠시 침묵하자 강아지풀도 조용히 나를 쳐다보며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다시 강아지풀이 입을 열었다.
“비록 소녀는 능력이 모자란 탓에 당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는 못하지만… 당신께서는 들으시겠지요.”
나와 카이서스를 대할 때는 자신을 칭하는 말조차 다르군.
대체 이 쓸모없는 드래곤이 뭐가 대단하다고 저렇게 대접해 준담?
<시끄럽고, 저 아이가 내게 뭔가 하고픈 말이 있는 모양인데 말해보라고 해라.>
“말씀하시죠.”
듣고 있다는 것을 말하자 반짝이던 강아지풀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변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걸고, 여러 길 중 하나를 고르시게 되실 겁니다. 하나 고민치 마시고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해 주시기를.”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카이서스라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으려나?
<…아무리 나라도 저런 건 모르지. 하여간 어쭙잖게 미래를 보고 다니는 녀석들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다니까.>
카이서스 역시 알 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 말을 하려고 기다리고 계셨던 건가요?”
“지금은 별것 아닌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시겠지만 막상 선택을 하게 되실 때… 제 말을 떠올려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숙여 보인 강아지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귀공에게도 할 말이 있소이다.”
“저한테도요?”
나의 되물음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참으셔야 할 거요.”
“…네?”
앞뒤 다 잘라먹고 말하는 강아지풀의 어법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만간 참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울 일이 있을 거외다. 하나 참으셔야 하오. 하늘의 법도가 지엄한지라 더 자세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시오.”
으음, 고통스러운 일이라니 뭔가 기분이 찜찜해진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니 나로서는 고개를 끄덕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더 이상 자리를 비우면 걱정할 이들이 있으니 이만 돌아가 보리다. 그들과 있는 것이 거북하다면 도시를 둘러보는 것은 어떻소? 본녀가 권했다 하면 막으실 분은 없을 거외다.”
그렇게 말한 강아지풀은 밟고 서 있던 가지를 훌쩍 박차고 자리를 떠났다.
강아지풀이 떠난 자리에 혼자 서 있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앞이 막막함을 느끼며 답답해하는 나에게 카이서스가 가볍게 말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저 아이가 말한 대로 구경이나 해봄이 어떠냐? 페루스의 도시라면 네 녀석에게는 꽤나 신기할 텐데.>
‘이 상황에 도시 구경 할 맘이 생기겠어? 넌 아무렇지도 않아? 너도 모든 것을 건 선택을 하게 된다잖아.’
<하하하! 내가 걸 것이 뭐가 있느냐? 기껏해야 내가 머물고 있는 네놈이 죽는 것뿐이겠지.>
생각해 보니 이미 죽어 있는 카이서스에겐 그다지 겁먹을 일이 아니구나.
그보다 내가 죽는 거면 엄청나게 큰 선택이잖아?!
<멍청한 생각 말고 구경이나 가도록 하자. 나도 페루스의 도시는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끄응, 구경이나 하고 있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머릿속에서 떠들어대는 카이서스의 목소리에서 진한 흥미가 느껴졌기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가 여기서 구경을 시켜주지 않았다간 한참이나 머릿속에서 투덜거리며 떠들 것이 분명했으니까.
창고 근방을 떠나 페루스들의 주거지 쪽으로 들어서자마자 곳곳에서 경계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거봐, 이 상황에서 무슨 구경을 하겠다고?’
<내 알 바가 아니지.>
정작 시선들을 받아내는 나로서는 열불이 터져 나오는 대답이었으나 지금 돌아서기에는 아쉬웠기에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시선에 주변을 구경하기는커녕 걷는 게 힘들어질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의 감정이 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나쁜 인간들! 여긴 또 왜 온 거야! 그렇게나 우리를 억지로 끌고 가서 괴롭히고 싶은 거야?!”
내 앞에 털이 북슬북슬한 강아지의 얼굴을 한 페루스 아이가 튀어나와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아, 아니, 나는 그럴 생각은 없는데……?”
“거짓말! 그럼 왜 우리 도시를 염탐하고 있는 건데?”
당돌한 꼬마의 말에 다른 페루스들도 같은 생각인지 주변에서 말리지는 않고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춤추는 강아지풀 님이 도시를 구경해 보라고 해서……”
내 입에서 강아지풀이 언급되자 꼬마가 내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또 거짓말! 춤추는 강아지풀 님은 지금까지 이곳에 온 인간들에게 그렇게 말하신 적이 없단 말이야! 넌 정말 거짓말쟁이구나!”
“아, 아니거든?! 춤추는 강아지풀 님이 그렇게 말한 거 맞거든?!”
<쯧쯧, 한심한 놈 같으니. 저런 꼬맹이와 말다툼이나 하느냐?>
‘아, 아니! 억울하잖아!’
거짓말쟁이로 몰려 억울해하는 가운데 멀리서 페루스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새하얗고 긴 귀를 지닌 토끼 머리의 페루스였다.
“아이고, 늦지는 않은 것 같군. 조금 전에 춤추는 강아지풀 님께서 인간 하나가 이쪽으로 지나갈 텐데 그는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셨단다. 꽤나 곤란해하고 있을 터이니 서둘러 가보라 하시더니, 역시 틀림이 없구나!”
토끼 페루스의 말에 내 앞에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던 강아지 꼬마가 멋쩍은 듯 손가락을 은근슬쩍 내렸다.
“춤추는 강아지풀 님이 그러셨다면 그런 거겠지!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맞았으니까.”
스스로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이며 진지하게 말하는 꼬마의 모습에 어이없어한 것도 잠시.
“좋아! 춤추는 강아지풀 님이 허락하신 인간이라면 내가 직접 구경시켜 줄게. 뭐가 보고 싶어?”
웃기는 단어라며 비웃던 단어가 알고 보니 친구 어머니의 성함이었을 때처럼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한 꼬마가 안내자를 자처했다.
“어, 어? 난 이곳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그냥 춤추는 강아지풀 님이 구경해 보라고 해서 말이야.”
“음, 그럼 채소밭을 구경시켜 줄게!”
채, 채소밭? 이렇게 뜬금없이?!
아, 페루스들의 이름이 우리와 다른 것처럼 꼬마가 말한 채소밭이라는 이름이 뭔가 다른 것을 지칭하는 걸지도…….
…는 개뿔.
그냥 내가 알고 있는 채소밭 그 자체였다.
“봐봐! 끝내주지?”
푸른 채소들이 가득 펼쳐진 채소밭을 의기양양하게 가리키며 꼬마 페루스는 자랑하듯 말했다.
“어? 어어. 대단하네.”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표정이었기에 그 외의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여기 있는 건 조금 전에 본 인형 나무 할아버지가 가꾼 건데 당근이 엄청 아삭하고 맛있어! 그리고 저쪽은……!”
신이 나서 밭의 작물들을 소개하고 있는 꼬맹이를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 인간아, 배고프지? 이거 먹어볼래?”
그렇게 말하며 꼬마가 뽑아 든 것은 인형 나무 할아버지라는 분이 길렀다는 당근이었다.
그런데 주인 허락도 없이 막 뽑아 먹어도 되는 거야? 이거 서리 아냐?
어린아이 팔뚝만 한 튼실한 당근을 받아 든 나는 아직도 묻어 있는 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저기, 내 이름은 인간이 아니라 라엘 드리안이거든?”
인간아, 라고 부르면 뭔가…….
내 말에 커다란 눈을 끔뻑인 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노을빛 바람이야!”
뭔가 찜찜하지만 일단은 통성명을 했으니 된 거겠지.
열심히 흙을 털어낸 당근을 한 입 베어 무니 노을빛 바람이 말한 대로 아삭한 식감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원래 당근을 싫어하는 나였기에 아무리 좋은 당근이라 해도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한입 베어 문 당근을 조심스레 내린 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각각의 채소가 싱그러움을 빛내는 밭은 보기엔 좋았지만 사실 거름 냄새 때문에 그다지 오래 있는 것은 곤란할 듯했다.
“구경시켜 주고 싶은 건 이게 다니?”
자신감 넘치게 안내자를 자처하고 나서기는 했지만 별다른 생각은 안 했었는지 예상외로(?) 내가 채소밭에 빠져들지 않자 노을빛 바람은 고민에 잠겼다.
“으음, 그럼 동굴 탐험 할래?”
아니, 이건 도시 구경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얘랑 놀아주게 되는 것 같은데.
뭐 상관없으려나, 뭘 하건 자기네끼리 뭔가를 하고 있는 제국인들과 같은 공간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게다가 아무리 춤추는 강아지풀이 보증했다 해도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 페루스들은 나를 불편해하겠지.
“앞장서.”
“와! 너도 기대해도 좋을 거야! 거긴 정말 놀기 좋거든!”
안내하기로 했었던 것은 이미 까맣게 잊은 듯 노을빛 바람은 동굴로 놀러 갈 생각에 잔뜩 신이 난 듯했다.
노을빛 바람이 지름길이라며 안내한, 길이라고 말하기도 민망스러운 수풀 사이를 이동했다.
“헉헉, 천천히 좀 가지 않을래?”
페루스의 운동신경이 인간과는 달라서인지, 아니면 어린아이 특유의 엄청난 활동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쫓아가기가 힘들었다.
멀쩡한 길도 아닌 수풀 사이를 헤치고 가야 했기에 나로서는 잠시 후회가 될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시 구경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이 녀석이 안내해 주는 척하면서 실은 골탕을 먹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헉헉거리며 투덜대자 앞장서던 노을빛 바람이 잠시 멈춰 서더니 의아해하며 돌아보았다.
“너 많이 허약하구나? 미리 말하지 그랬어? 다 왔으니까 조금만 참아.”
엄청난 약골 취급에 조금은 발끈했지만 참기로 했다.
저 녀석은 어린아이고 난 어른이니까!
어쩐지 카이서스가 속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깨끗하게 무시했다.
체력 단련을 따로 하지는 않았었지만 일반적인 수준이었고, 카이서스의 심장을 얻고 난 후에는 좀 더 건강해진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 느낌이 착각이었던 건지 아니면 페루스란 종족 자체가 신체 능력이 뛰어난 건지…….
그보다 보통 다 왔다는 말은 믿어선 안 되는 말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5분만 더 자고 일어난다는 말과 동급인 거라고.
어른들에게 받은 용돈을 부모님이 가져가시곤 나중에 두 배로 돌려준다는 말만큼이나 믿어서는 안 되는 말이지.
난 그 말을 믿었다가 동네 어른들의 잔심부름을 해서 모았던 용돈 모두를 영영 빼앗겨 버리고 말았었지.
난 다시는 그런 거짓말에 속지 않을……
“다 왔다!”
노을빛 바람의 말대로 시야를 가리던 수풀을 팔로 걷자마자 그리 크지 않은 공터와, 그 뒤로 네다섯 명은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아직 세상은 믿을 만할지도 몰라.
<갑자기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거냐? 난데없이 무슨 헛소리를 그리 열정적으로 지껄이는 게야?>
시끄러! 용돈을 빼앗겨 본 적 없는 사람은 그 고통을 모른다고!
<흠, 아무래도 제대로 맛이 간 것 같은데.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소리를 진지하게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긴 듯한 카이서스는 무시하고 동굴의 입구를 살폈다.
도시의 입구로 쓰이는 동굴과 비슷하게 이끼가 곳곳에 묻어 있는 평범한 동굴처럼 보일 뿐이었다.
설마 이 동굴도 다른 곳으로 연결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이걸 보여주려고 한 거야?”
“그럴 리가! 안쪽은 엄청 끝내준다고!”
그렇게 말한 노을빛 바람이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며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조금 전에 보았던 채소밭을 생각해 보면 별로 기대는 되지 않지만… 일단은 따라가 볼까.
어두울 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동굴 내부는 꽤나 밝았다.
대체 어디로 들어오는 것인지 모를 햇빛이 내부를 희미하게나마 밝혀주고 있었다.
나처럼 시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주변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신기하지?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이 안까지도 빛이 들어오더라니까?”
뭐… 신기하긴 하지만 카이서스의 둥지에 있는 보물 창고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다.
카이서스의 창고는 그야말로 별천지였으니까.
천장에 빼곡히 박혀 있는 보석들이 마법의 힘을 받아 빛나고, 그 아래의 수많은 보물들이 그 빛에 다시 반짝이는 화려한 그 모습이란…….
“그치만 이게 다가 아니란 말씀! 이 안으로 들어가면 더 멋진 게 있어!”
내 시원찮은 반응에 오기가 생겼는지 노을빛 바람이 내 손을 잡고는 안쪽으로 이끌었다.
무슨 꼬맹이의 힘이 이렇게 센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정도였다.
“야 잠깐만! 이러다 넘어……?!”
힘으로 끌려가던 나는 넘어지겠단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멍하니 입을 벌렸다.
“헤헤, 끝내주지?”
노을빛 바람의 말대로 눈앞에 나타난 동굴 안쪽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동굴 안임에도 불구하고 개울이 흐르고, 그 주변엔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위를 하늘거리며 떠다니는 반딧불들은 춤추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야말로 어릴 적 꿈꾸었던 동화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이었다.
카이서스의 둥지에 있던 창고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게 할 정도로 번쩍이는 화려함이었다면 이곳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감동 그 자체였다.
멍하니 둘러보는 내 모습에 노을빛 바람도 만족스러웠던지 의기양양해했다.
“이렇게나 멋진데 어른들은 함부로 못 들어오게 한다니깐? 그래도 이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거니까 괜찮겠지!”
아무래도 나를 위해 안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곳에 오고 싶어서 나를 데려온 것인 것 같았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여긴 대체 어디야?”
“간절한 소원을 비는 곳이야. 나쁜 사람들이 들어오면 큰일 난다는데 넌 춤추는 강아지풀 님이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까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정말이지 춤추는 강아지풀에 대한 믿음이 엄청나군.
그나저나, 소원을 비는 곳이라고?
주변을 둘러본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이런 신비한 곳이라면 그런 영험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믿을 법하군.
“근데 소원은 잘 안 이뤄주나 봐.”
조금 전과는 달리 약간은 뚱한 표정으로 말하는 노을빛 바람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멀리 갔다는 엄마랑 아빠가 돌아오기를 엄청 진지하게 빌었는데도 안 들어줬거든.”
노을빛 바람에게 나는 별다른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멀리 갔다는 노을빛 바람의 부모님은 아마도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거겠지.
“어른들 말도 잘 듣고 심부름도 열심히 하고 다른 애들 괴롭히지도 않았는데. 왜 내 소원을 안 들어주는지 모르겠다니까?”
입을 삐죽 내민 채로 투덜거리던 노을빛 바람이 약간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면 내가 나쁜 아이라서 그런 걸까? 혹시 내가 기억 못 하는 나쁜 짓을 한 걸까?”
조금 전까지 활력이 넘쳐나던 모습은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풀이 죽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아냐! 그럴 리가. 인간인 나에게도 잘 대해주잖아.”
그 말에 순식간에 노을빛 바람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치? 그치! 난 정말 착한 아이라니까? 그런데도 어른들은 맨날 말썽쟁이라고만 한다고!”
기뻐하는 표정이 마치 어릴 때 동네에서 자주 놀았던 강아지를 보는 듯하다.
그 강아지는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꼬리를 격하게 흔들어대곤 했었지.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자동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것을 간신히 참으며 나는 다시 주변을 감상했다.
그러던 와중 내 눈에 확 하고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저 꽃은 이름이 뭐니?”
수없이 아름다운 꽃들 사이에서 시리듯이 푸른 꽃 하나.
아리안 누나가 떠오르는 꽃이었다.
색이라든가 모양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아리안 누나의 머리색은 갈색이니까.
그저… 그냥, 그냥 떠오르게 만들었다.
“응? 저 꽃? 저건 나도 처음 보는데?”
자주 이곳에 왔던 노을빛 바람도 그 꽃이 신기한 기색이었다.
저 꽃을 아리안 누나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졌다.
“좋아, 인심 썼다! 마음에 들면 가져가도 돼! 대신 잘 키워야 돼?”
애초에 자기가 기른 것도 아닌데 선심을 쓰는 노을빛 바람이 조금 우습기는 했으나 어느새 나는 그 꽃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노을빛 바람의 말대로 꺾어 가는 것이 아닌 주변의 흙까지 캐내어 가져가려면 어떤 것에 담아야 할까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떠올려 보던 차였다.
“이런! 거기 누구냐? 노을빛 바람과… 인간?!”
주변을 지나다 기척을 느끼고 들어와 본 페루스에 의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독수리의 얼굴을 한 그 페루스는 부리를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인간을 이곳에 데려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으… 춤추는 강아지풀 님이 이 인간은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대요.”
잔뜩 주눅 들어선 우물쭈물 말하는 노을빛 바람의 모습에 독수리 페루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서 나와라. 그리고 인간, 당신도.”
흘겨보듯 말하는 독수리 페루스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노을빛 바람과 함께 동굴을 나왔다.
독수리 페루스가 안내해 준 멀쩡한 길을 따라 창고로 돌아왔다.
“들어가라. 아무리 춤추는 강아지풀 님이 좋게 보셨다 해도 웬만하면 돌아다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독수리 페루스의 뒤를 노을빛 바람이 이쪽을 힐끗힐끗 돌아보며 따라갔다.
“잡아먹히지는 않았군?”
숙소로 쓰는 창고에 들어서자마자 여전히 자기네끼리 뭔가를 논의하고 있던 바이엔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거 참 재미없는 농담이군요.”
나의 대꾸에 바이엔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
아직 잠을 청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나 확실히 할 것도 없는 데다가 제국인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도 불편했기에 잠이나 자기로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뭔가 몸이 무거웠다.
자리에 침낭을 깔고 누운 나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