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 또 쓸데없는 짓
대륙력 757년 8월 22일.
결혼 당사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채로 며칠간 이어진 피로연이 끝나고 각국의 사절들이 귀국을 서둘렀다.
그건 크라우드 왕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또다시 선생을 두고 돌아가자니 마음이 아프군.”
“그런 것치고는 홀가분해 보이십니다만?”
“하하, 너무 티가 났나?”
제국의 능구렁이 같은 작자들을 상대하느라 지쳤었을 테니 돌아간다는 게 반가울 만도 하지.
멋쩍게 웃는 왕자의 곁에 있던 아리안 누나가 내 손을 잡았다.
“다음에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해야 해. 아프거나 하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짐짓 겁이라도 주듯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 모습마저도 아름다웠다.
“걱정 말아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내가 다짐하듯 대답해 주자 그제야 누나의 얼굴이 사르르 풀렸다.
우리는 꽤나 오랫동안 다시 만나기 힘들 것이 당연했기에 느긋하게 작별을 나누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드리안 자작, 황제 폐하께서 부르신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호칭으로 불러오는 바이엔이었다.
“지금… 당장이요?”
너무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해하며 묻자 바이엔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황제 폐하를 기다리시게 할 셈인가?”
약간은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표정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황제의 귀에 괜한 소리가 들어가면 손해를 보는 건 나일 테니까.
속으로는 온갖 욕을 내뱉으면서도 겉으론 얌전히 상황을 받아들인 나는 아리안 누나와 로라스 왕자를 돌아보았다.
“그런 이유로 가시는 걸 배웅하진 못할 것 같아요.”
내 표정과 목소리에서 아쉬움을 느꼈는지 로라스 왕자는 웃어주었다.
“하하, 괜찮아. 나도 어린애가 아니니 선생이 배웅해 주지 않는다고 울거나 삐치지는 않는다네.”
로라스 왕자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수행원들이 서 있는 곳으로 가서 돌아갈 준비를 하라 일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 뭔가 기분이 찜찜해.”
조용히 곁으로 다가온 아리안 누나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못 미덥기는 하지만 카이서스도 도와줄 테니까요.”
<거참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말이로구나.>
카이서스가 어이없어하며 비꼬았지만 늘 그랬듯 무시했다.
아리안 누나는 애써 담담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작게 미소 지어주더니 뺨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해주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이 광경이 보기 싫었던지 바이엔이 기분 나쁘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쯤 하고 이만 가지.”
“예, 예. 갑니다, 가요.”
더 미적거렸다간 신경질을 부릴 것 같아 돌아서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아리안 누나를 몇 번이나 돌아보며, 나는 바이엔의 뒤를 따라갔다.
제대로 배웅도 못 하고 내가 끌려간 곳은 황제의 거처인 제1 궁전이 아니었다.
“여긴……?”
정원수 사이로 나 있는 돌길을 제외하면 건물이라 할 만한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인적은 드물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정성껏 손질한 듯 잘 꾸며져 있었다.
“황실 정원 중 하나다. 폐하께서 즐겨 산책하시는 곳 중 하나지.”
누군 소중한 사람과의 배웅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는데 정작 불러낸 작자는 느긋하게 산책 중이었어?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애써 숨기며 바이엔의 뒤를 따랐다.
정원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걷자 정원수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연못이 보였다.
그리고 연못을 끼고 지어진 정자에 누군가가 주변에 서 있는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망할, 산책 중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짜증 나는군.
“라엘 드리안 자작을 데려왔습니다.”
바이엔이 도착을 알리자 정자에 누워 있던 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황제께서 너를 부른 건 사실이지만 직접 만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대신 나를 보내시더군.”
황제가 부른 것만 해도 짜증 나는데 하필 루리스라니.
나의 짜증이 살심으로 대체되었다.
저 인간을 기다리게 할까 봐 아리안 누나와의 시간을 방해받았다니!
<거기에 아리안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나의 얼굴을 보고도 루리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떤가. 얼간이들 때문에 생긴 짜증을 해소하기엔 꽤 괜찮은 곳이지.”
그렇게 보이긴 하지만 어떤 빌어먹을 놈 때문에 생긴 분노를 해소하기에는 부족해 보이는데.
내가 아무 말 없이 노려보고만 있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본론을 꺼냈다.
“페루스라는 종족에 대해서 아나?”
그의 입에서 나온 낯선 이름에 나는 분노하던 것도 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루스?”
발음조차도 낯설었다.
갑자기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에 의아해하는 사이 카이서스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호오, 페루스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그럴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카이서스는 뭔가 아는 모양이었다.
‘그게 뭔데?’
<신의 저주를 받아 야수가 된 인간들이지. 뭐, 사실 그건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고 사실은 그냥 인간과 맹수를 섞은 것처럼 생겨먹은 종족일 뿐이지만.>
‘그런 종족도 있어?’
<워낙 희소한 데다 자기네끼리 숨어 지내며 인간들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들이니까. 오히려 저놈이 알고 있다는 게 더 신기할 정도다.>
그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종족인가?
카이서스의 말에 뭔가 불안해졌다.
갑자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종족들을 언급하다니.
뭔가를 꾸미는 꿍꿍이의 냄새가 났다.
“갑자기 그 종족은 왜 이야기하는 거죠?”
“이번에 그 야만인들이 숨어 사는 도시를 발견했는데… 그곳은 제국의 영토 안이다. 황제께서는 그들이 제국에 복속되기를 바라시더군.”
“그래서요?”
“자네가 사절로 가서 그들이 황제 폐하께 복속되게끔 설득해 줬으면 하네.”
“그걸 왜 저한테 시킵니까?”
나를 자신들의 사절로 부려먹겠다는 말에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몇 번이나 보내봤지만 별 성과 없이 돌아와서 말이지. 목 아래 부분을 그곳에 두고서 말이야.”
어… 그러니까 이전에 사절로 갔던 사람들은 모두 죽어서 머리만 돌아왔다는 거네?
그런 위험한 곳에 나를 보내겠다고?
정말로 임무를 빙자해서 나를 해치우려는 것 아니야?!
내가 경계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루리스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야만스러운 것들이라도 드래곤을 등에 업은 자를 상대로는 얌전할 테지.”
“정말 그럴 거라고 확신합니까?”
내가 의심하며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흐음… 페루스라, 페루스… 이 제안, 받아들여라.>
그때 페루스라는 이름을 되뇌며 생각하던 카이서스가 나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말했다.
‘뭐? 못 들었어? 거기 갔던 사람들은 다 죽어서 나왔다고 하잖아!’
<거 잔소리 말고 내 말대로 해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해서 위험해진 적이 있었냐?>
‘하나하나 전부 말해줘?’
<흠, 흠! 일단 가겠다고 해! 뭔가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것 같아 그러는 거니까!>
확실히, 강대한 제국이 알려지지도 않은, 숨어 사는 종족을 발아래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하아, 어쩔 수 없죠. 황제께서 내린 명령이시라면 따르는 수밖에.”
결국 못 이기듯 내뱉은 대답에 루리스는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그럼 이만 돌아가서 떠날 준비를 하게. 길잡이와 호위들을 준비시켜 두지.”
곧바로 떠나라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데.
“그런데… 나까지 그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다음엔 누굴 보낼 셈이죠?”
문뜩 떠오른 것을 묻자 루리스는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자네가 보기엔 우리 황제께서 인내심과 자비가 넘치는 분 같던가?”
내가 가서 뭔가를 얻지 못한다면 무력을 동원해서 다 쓸어버리겠다는 거로군.
페루스라는 종족이 얼마나 강한지, 몇이나 되는지는 몰라도 제국을 상대로는 결과가 너무 뻔하지.
그것을 짐작한 내가 아무 말도 않자 루리스가 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바이엔을 따라 정원을 돌아나가며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 어깨에 쓸데없이 무거운 게 실린 느낌이다.
* * *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마차를 멈춰 세운 마부의 말에 우리는 각자의 짐을 챙겨서 내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산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말 그대로의 첩첩산중.
그나마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게이트로 이동하고도 사흘이나 내리 마차를 타고 이동했건만.
이제는 제대로 된 길조차 없는 산속을 걸어야 한다니.
벌써 넘어온 산만 두어 개는 되는 것 같은데 아직 더 가야 한단 말이야?
대체 페루스 종족은 왜 이런 오지에서 사는 거야?
“경치 구경이나 하고 있을 시간 없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움직여.”
이번에도 나를 감시하기 위해 함께 온 바이엔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앞장섰다.
“바이엔 씨는 걱정도 안 돼요? 지금껏 사절로 갔던 사람들이 모두 머리통만 돌아왔댔잖아요.”
루리스에게 들었던 말을 언급하며 내가 묻자 바이엔이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모르는 모양인데 사절 외의 수행원들은 멀쩡히 돌아왔다. 그리고 다행히 난 수행원이고 네가 사절이지.”
아니, 그거 전혀 다행이 아닌데요?!
“으음, 갑자기 배가 아파져 오는데 좀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참아,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페루스 족의 구역이다.”
애초에 정말로 화장실이 급한 건 아니지만 그게 참으라고 참아지는 거던가?
솔직히 말해서 쉽게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길잡이들이 앞장서며 정글도로 수풀을 헤치며 길을 만들었다.
바이엔과 호위대가 주변을 둘러싼 터라 걸음을 늦추지도 못하고 얼마나 이동했을까.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씩 들려오던 주변의 풀벌레와 새소리가 갑자기 사라졌다.
들리는 거라고는 우리 일행들의 발소리뿐.
“…놈들의 구역에 들어온 것 같군. 다들 긴장을 늦추지 마라.”
공기의 변화를 눈치챈 것이 나만은 아닌지 바이엔이 낮은 목소리로 일행들에게 경고했다.
바이엔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숲속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이방인들!”
위협하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멈춰 선 바이엔이 담담한 목소리로 마주 소리쳤다.
“우리는 타이런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사절이다! 그대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 말에 숲속에서 조금 전 목소리의 주인인 듯한 사람이 수풀을 헤치며 걸어 나왔다.
“황제가 보냈다고? 또 지난번처럼 무례한 헛소리를 하러 온 건가!”
보통의 사내들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는 큰 덩치에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 손에는 커다란 도끼를 쥐고 있는 채였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가지가 미처 가리지 못한 부분으로 터질 듯한 근육이 위협하듯 꿈틀거렸다.
그 외에 특이한 점이라면 머리가 수사자와 비슷하게 생긴 맹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낯설고 기이한 그 모습에 몇몇이 당황한 듯했으나 바이엔은 당황하지 않고 대응했다.
“앞서서 왔던 자들이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안으로 안내해 주지 않겠나? 멀리서 온 손님을 너무 박하게 대하는 것 아닌가?”
당당한 바이엔의 태도가 뻔뻔스럽게 느껴졌는지 사자 머리는 콧김을 내뿜었다.
“흥! 보나 마나 너희 황제의 노예가 되라는 헛소리겠지! 들을 필요도 없다! 돌아가라!”
사자머리는 당장이라도 손에 든 커다란 도끼를 휘두를 듯 험악한 기세로 소리쳤다.
바이엔이 재차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사자 머리를 제지한 것은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누군가였다.
“그만. 잠시 멈춰보오.”
고양이 머리의 페루스는 자그마한 체구라서 사자 머리의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었다.
사자 머리와는 달리 치렁치렁한 옷차림 때문에 체형을 알 수는 없었으나 목소리는 젊은 여자의 것이었다.
자신보다도 한참이나 작은 고양이 여자의 말에 사자 머리는 얌전히 도끼를 내리며 옆으로 물러섰다.
고양이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날카로워 보이는 눈이 우리들을 훑어보다가 나에게서 멈춰 섰다.
잠시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고양이 여자가 돌아서며 말했다.
“저들을 도시로 안내하시게.”
당장이라도 엉망진창이 될 줄 알았던 분위기에서 나온 그 말에 놀란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춤추는 강아지풀 아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자 머리가 고양이 여자의 말을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런데 춤추는 강아지풀이라니? 뜬금없이 강아지풀은 왜 찾는 거야?
<그거 아마 저 여자의 이름일 거다. 페루스 족의 작명법은 인간들이 이해하기 어렵거든.>
의아해하던 나는 카이서스가 해준 말에 더욱 황당해졌다.
그게 이름이라고? 아니, 무슨 이름을 그렇게 지어?
“말랑 발바닥, 안내하시래도.”
음… 강아지풀이란 이름은 양반인 거 같기도 하고.
담담하게 재차 안내하라 명하는 강아지풀의 모습에 말랑 발바닥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사자의 표정이라는 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좋은 표정은 아닌 듯하다.
“날 따라와라. 허튼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는다.”
위협적인 목소리와 기세였으나 말랑 발바닥이라는 이름을 들은 이상 조금 전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