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 드래곤-91화 (91/150)

091화 - 황제의 결혼식

결국 나는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누나.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저 제가 늘 보아온 아름다운 누나인걸요.”

이 말에 내 안의 카이서스는 물론이고 왕자마저도 조금은 짜증 난단 표정을 지었다.

<웩, 육체가 없다는 게 다행이란 생각을 할 거라곤 나도 몰랐군. 육체가 있었다면 분명 토했을 거다.>

“하, 하하… 사랑을 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정말이로군.”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해하고 있자니 아리안 누나는 그저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제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어요?”

<아무래도 이상한 건 네 뇌인 것 같다.>

내 물음에 왕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고 아리안 누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곧 시작하려나 보다.”

고개를 돌린 아리안 누나의 귓가가 살짝 붉어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일까.

아무튼 그녀의 말대로 결혼식이 시작된 듯했다.

저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황제의 새로운 비가 천장 없는 마차를 타고 들어서자 길가에 구경 나온 제국 백성들이 축하하는 소리겠지.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황궁 내부라서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점점 환호성이 가까워져 오며 식장 내의 사람들의 얼굴에도 기대감과 흥분, 혹은 긴장감이 진해졌다.

“황제 폐하의 비가 되실 파이썬의 모니카 파이썬 공주께서 입장하십니다!”

아마 이것이 모니카 공주가 파이썬의 공주로서 불리는 마지막 순간일 것이다.

황실 관리의 외침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모니카 공주가 입장함을 알렸다.

경쾌하고 밝은 음악이 울려 퍼지며 황궁을 둘러싼 벽 사이로 나 있는 커다란 남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새하얗게 치장된 지붕 없는 마차가 들어섰다.

화려한 좌석 위에는 마찬가지로 새하얀 웨딩드레스와 베일을 걸친 모니카 공주가 앉아 있었다.

베일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허어, 정말로 아름다운 광경이로군.”

“어쩜! 나도 저런 결혼식을 치르고 싶어.”

곳곳에서 황궁 내부까지 초청된 귀빈들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사정이 어떻건 구경꾼들에게 있어 이 모습은 무척이나 멋진 광경이었을 테니까.

확실히 겉으로만 보기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이다.

“음? 그런데 보통은 신랑이 먼저 입장하지 않나요?”

문뜩 떠오르는 생각에 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제국은 뭔가 결혼식 풍습이 다른 건가?

내 물음에 왕자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해 주었다.

“신랑이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이시잖나. 누군가를 기다리게는 해도 기다리지는 않는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아내를 맞이하는 자리에서도 그러는 건가.

신부를 맞이하는 경쾌하고 음악이 울려 퍼지며

마차에서 내린 모니카 공주가 바닥에 깔린 새하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주례단상 앞에 섰다.

경쾌하던 신부 입장곡이 멎고, 곧이어 황실 관리가 황제의 입장을 알렸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십시오!”

이번에는 웅장하고 경건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신부가 시내를 행진하여 들어선 것과는 달리 광장에 연결된 건물의 문이 열리며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참석한 하객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이했다.

공주가 들어설 때 감상을 이야기하던 것과는 달리 모두가 입을 다문 채로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야말로 황제의 권위가 이 공간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고요한 가운데 울려 퍼지던 웅장한 행진곡이 멎고,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고개를 드십시오!”

관리의 말에 그제야 다들 고개를 들고 황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목까지 잠근 하얀 셔츠와 검은 예복 바지와 재킷을 걸치고,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붉은 망토를 걸친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신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례단상의 성직자가 황제에게 조심스레 무어라 말하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주례로 선 제국 내에서 가장 높은 직위의 성직자의 목소리가 음성증폭 마법을 통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아마도 좀 전에 성직자가 황제에게 한 말은 시작해도 되겠냐는 물음이었던 듯하다.

“어느 때보다 맑고 화창한 오늘, 우리는 신께서도 축복하시는 두 분의 혼인을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신랑이신……”

여느 결혼식이 다 그렇듯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주례의 주례사가 시작되었다.

다들 지루하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티도 내지 못하는 힘겨운 시간이 흘러갔다.

“…그럼 이제 신랑께서는 신부의 베일을 걷어주십시오.”

간신히 주례의 기나긴 말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식이 진행되었다.

황제가 손을 뻗어 모니카 공주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걷어 뒤로 넘기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아름답군요.”

“파이썬 왕국의 공주들은 다들 미녀라더니, 사실인 것 같군.”

모니카 공주는 원래부터 미인이었던 데다 신부 화장을 해준 사람들도 장인이라 불릴 정도의 사람이었을 테니까.

다소곳이 서서 눈을 내리깔고 있는 모니카 공주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도 황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있었다.

“오늘 축복받은 두 분의 혼인으로 타이런 제국과 파이썬 왕국에 평화와 번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직자의 말이 다시 길어질 듯하자 황제가 언짢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았다.

“…흠, 흠! 그럼 이제 신부께서는 신랑의 손에 입을 맞추어 변함없이 따르고 존경할 것을 맹세하십시오.”

서로의 입술에 맹세의 입맞춤을 하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결혼식의 모습이 아니라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 같았다.

모니카 공주가 자신에게 내민 황제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입을 맞추자 성직자가 선언했다.

“이 예식의 주례로서 두 분의 성혼을 신의 이름으로 엄숙히 선포하는 바입니다!”

성직자의 선언과 동시에 박수와 환호성이 광장을 가득 채웠다.

결혼식이 무사히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황궁 성벽 너머에서도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에 반해 파이썬 왕국의 사절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보니…….

애써 웃으며 박수를 치고는 있으나 그다지 진심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성직자가 웃는 낯으로 황제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는 단상을 내려갔다.

황제는 가볍게 손을 들어 하객들에게 흔들어 보이고는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모니카 공주와 함께 나타났던 문으로 사라졌다.

황제가 하객들의 환호와 함께 사라지자 황실 관리가 단상에 올라 소리쳤다.

“태양이 빛나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귀빈 여러분! 저희가 정성껏 준비한 식사와 여흥을 즐겨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곳곳에서 수많은 시녀들과 관리들이 각종 진귀한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나타나 하객들의 앞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광장의 빈 공간에는 어느새 무희들과 악사들, 재주꾼들이 자리를 잡고 공연을 시작했다.

“정말이지 화려하기 그지없네요.”

동원된 사람들의 숫자나 모습에서부터 음식 하나하나까지.

내가 앞에 놓인 식용 꽃으로 장식된 샐러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저 샐러드일 뿐인데도 무척이나 화려했다.

이 많은 하객들에게 샐러드만 이렇게 제공하려 해도 엄청나게 많은 요리사들을 갈아 넣었을 거다.

물론 황제의 결혼식 피로연에 나올 음식은 샐러드가 끝이 아니겠지.

어쩐지 먹기가 아까울 정도라 쳐다만 보고 있는 사이 아리안 누나가 포크로 자신의 샐러드를 헤집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화려함 속에 감춘 것뿐이지. 제국의 수많은 부와 명예는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얻은 것들이 대부분이잖아. 우리 나라도 그중 하나고.”

제국을 향한 적대심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아리안 누나의 모습에 로라스 왕자는 태연하게 샐러드를 포크로 집어 먹으며 말했다.

“너무 솔직하지는 말게나. 일단 우리는 초대받은 손님 입장이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샐러드를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품위 있었다.

늘 느꼈던 거지만 옆에서 식사를 함께 하는데도 다른 세계의 사람 같다.

괜히 왕족이 아니라는 거겠지.

나는 타이커스 황제와 모니카 공주, 아니 모니카 황후가 사라진 문을 쳐다보았다.

“모니카 님이 잘 지내셨으면 좋겠네요.”

씁쓸한 마음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지난번에 호위했을 때 이야기를 나눈 것도 있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향에서 지내게 된 것에 동질감이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쉽게 그리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황제는 결혼 첫날임에도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애초에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이 아니었기에 모니카는 그것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며칠 전부터 결혼식을 준비하고 치르느라 무척 피곤했기에 그녀는 잠을 청했다.

낯선 방, 그리고 호화롭고 고급스럽지만 불편한 침대에서 밤을 보낸 모니카는 다음 날 아침 방을 나서려다 눈을 찡그렸다.

“지금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거지?”

궁전 내부를 구경이나 할 겸 방을 나서려는 것을 문 앞에 서있던 근위병들이 막아선 것이다.

그녀의 물음에도 근위병들은 묵묵부답으로 앞을 막아설 뿐이었다.

“비켜라.”

모니카가 억지로 힘으로 그들을 밀쳐내며 나가려 했다.

겉으로 봤을 땐 짐작도 못 할 괴력에 밀려난 근위병들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서둘러 그녀를 막아서려 했다.

“감히 근위병이 황후에게 손을 대겠다는 건가?”

서슬 퍼런 그녀의 말에 근위병들은 움찔했다.

“부탁드리옵니다. 제발 방으로 돌아가 주소서.”

울상이 되어 부탁하는 그들의 모습에도 모니카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싫다면 어찌할 건가?”

모니카가 싸늘한 얼굴로 묻자 근위병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가시려거든 나가셔도 됩니다만, 그들의 목이 날아가겠지요. 그 가족들도 함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모니카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어둡고 음울한 인상의 사내가 보기 싫은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당신은… 크리스토 백작이라 했던가? 그게 무슨 말이지?”

모니카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고 묻자 루리스는 흠, 하고 가식적으로 생각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황후 마마를 방에서 편히 쉬시게 하란 명을 지키지 못했으니 그렇게 될 거란 말입니다. 아, 참고로 목이 날아간다는 건 해고된다는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몸과 머리가 분리된다는 뜻입니다.”

그 말에 모니카가 근위병들을 돌아보니 그들은 애써 침착하려 했으나 눈동자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이 방에서 나가지 말란 건가?”

“물론 저희가 어찌 황후 마마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한 자들은 처벌을 피하지 못하겠지요.”

황제라는 말에 모니카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작게 흘렸다.

대체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제국은 그녀를 방 안에 연금시킬 셈인 듯했다.

“황제 폐하와 직접 이야기하겠다. 파렐을 불러와. 알현 준비를 해야 하니까.”

분노를 억누르며 모니카가 자신의 시녀, 파렐을 찾았다.

“황후 마마의 유모라면 황제께서 명하신 일을 행하느라 오기 힘들 겁니다. 아마도 꽤나 오래 걸리겠지요.”

그 말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깨달은 모니카가 눈을 찌푸렸다.

“파렐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안타깝게도 그 시녀는 황후 마마를 모시기 힘들어지겠지요.”

으득-

악물고 있던 입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음에도 루리스는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파렐은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유모의 목숨까지 걸기에는 모니카는 그만큼 악독하지 못했다.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돌아서는 모니카의 등 뒤로 루리스가 말했다.

“지내시는 데에 불편한 점은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이자들을 부르시지요.”

“그리하지.”

방으로 들어간 모니카가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자 루리스는 실소를 머금으며 굳어 있는 근위병들을 쳐다보았다.

“자네들도 근무에 충실하게 임하도록 하게. 사람은 머리가 없으면 죽잖나.”

무시무시한 소리를 태연하게 웃으며 내뱉는 그의 모습에 근위병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근위병들만이 아니라 문 너머의 모니카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의 피를 보고 싶지 않거든 얌전히 있으라는.

문 너머에 서 있던 모니카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손에 힘을 주었다.

이곳으로 들어올 때 궁전 내부 통로마다 배치된 근위병들은 경비를 서는 것이라기엔 조금 이상한 분위기이기는 했으나 이런 것일 거라고는 예상조차 못 했었다.

“이런 씨……”

차마 끝까지 내뱉지 못한 욕설이 그녀의 입가에 맴돌았다.

갑자기 고향에 있을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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