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 소유권주장
“아, 아리안 누나?! 도대체 어떻게?!”
로라스 왕자는 보고 놀라긴 했어도 사절로 올 수 있는 신분이기에 납득이라도 되었지만 아리안 누나가 여기 있는 것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마찬가지인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리안 누나를 대신해 로라스 왕자가 웃으며 설명했다.
“핫하, 놀랐지? 아리안을 수행원으로 데려오느라 내가 힘 좀 썼지!”
왕자가 의기양양하게 말했으나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리안 누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만 벌리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웠던지 왕자가 작게 웃고는 말했다.
“이제 보니 선생과의 대화는 잠시 미뤄야 할 것 같군.”
“예, 예?”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내가 영문 모를 말에 되묻자 왕자는 아리안 누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나도 눈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야. 두 사람이 그렇게 애절하게 쳐다보는데 잠시라도 둘만의 시간을 줘야지.”
농담 섞인 왕자의 말에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대신해서 대답한 것은 아리안 누나였다.
“왕자님, 저희는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조금은 상기되긴 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응? 그런데 아직?
그녀의 말에서 뭔가를 눈치챈 듯 왕자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그럼 두 사람만 두고 모두 나가자고.”
왕자의 말에 아리안 누나를 제외한 수행원들은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응접실을 나섰다.
“아니, 잠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건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만?!”
갑작스레 감시 대상인 나를 두고 나간다는 소리에 바이엔이 반발하며 나섰다.
그 말에 왕자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그대와 무슨 상관인가? 설마, 제국은 나의 선생을 죄수처럼 취급하는 건가?”
여차하면 정식으로 항의할 뜻을 내비치는 왕자의 태도에 바이엔은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밖에서 대기한다.”
결국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바이엔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그럼 잘해봐! 아, 참고로 저쪽 문 뒤에는 잠시 쉴 수 있도록 침대가 놓인 방이 있더군.”
마지막으로 나가며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왕자의 말에 나는 기겁해서 소리쳤다.
“와, 왕자님?!”
내 외침에도 이미 문은 닫힌 후였다.
아니,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분명 아직 왕자님은 성인이 아니실 텐데?!
“하, 하하… 왕자님의 농담이 과하시네요.”
멋쩍게 웃으며 돌아보니 아리안 누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방금 전의 소란은 금방 잊혀져 버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아리안 누나의 근처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 눈치를 살피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아리안 누나는 조용히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으, 응?
저건… 자기 옆에 앉으라는 건가?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곤 말없이 쳐다보는 누나의 모습에 나는 조심스레 이동했다.
옆에 앉기는 했어도 뭔가 어색해서 시선을 피하고 있자니 아리안 누나가 내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누, 누나?!”
갑작스러운 손길에 당황한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아리안 누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갑자기 내가 와서 놀랐지? 미안해.”
“아뇨. 사과하실 것까지는 없는데… 그보다 손은 왜……”
내 말을 끊으며 아리안 누나가 계속 말했다.
“너를 이곳에 두고 돌아갈 때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어. 돌아간 이후에도 자꾸 집중도 안 되고 우울하더라고.”
약간은 횡설수설하듯 말하는 아리안 누나의 얼굴은 내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누, 누나?”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에 내가 불렀지만 누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이번에 온 것도 내가 억지로 왕자님께 부탁드린 거야. 네 얼굴을 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거든.”
서, 설마 이거 그건가?
내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고 있자니 아리안 누나는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어.”
그게 무슨 소리지?
그녀의 말에 내가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코앞에 아리안 누나의 얼굴이 있었다.
누나는 눈을 감고 있었고, 달콤한 향기와 함께 내 입술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은 지워지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의 아리안 누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놀랐지.”
동의도 없이 입맞춤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아리안 누나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어… 괜찮아요. 놀라서 머릿속이 하얘진 것은 빼면…….”
더듬거리며 말하던 도중 아리안 누나가 재차 입술로 내 입을 막아버린 탓에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은 의미가 없었다.
첫 번째 입맞춤과는 달리 두 번째 입맞춤은 무척이나 격했다.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나와 아리안 누나는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누나의 입술, 치아, 그리고 말캉한 혀까지.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랄 정도였다.
<쯧쯧, 경험 없는 티를 팍팍 내는구나. 손은 거기가 아니라…….>
‘시끄러!’
분위기를 망치려는 카이서스를 곧장 제압하고는 아리안 누나와의 입맞춤에 집중했다.
찰나처럼 느껴진 달콤한 순간이 끝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두 번째는 정확히 5분 27초였다.>
아, 좀 그런 거 알려주지 말라고!
아쉽다는 듯 입술을 뗀 아리안 누나가 몽롱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땠어?”
“어, 어어… 처음이라 잘은 모르지만 엄청 좋았어요.”
내가 생각해도 못난 대답에도 아리안 누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내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이 다음은… 집으로 돌아가면 하자.”
아리안 누나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이며 전해지는 목소리에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멍하니 대답하는 나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던 아리안 누나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넌 이제 내 거라는 거, 알지?”
무척이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이만 나가자. 왕자님도 널 만나러 먼 길을 오셨는데 나만 너를 독차지하고 있으면 죄송하잖니.”
손을 잡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끄는 아리안 누나를 따라 응접실을 나갔다.
<흠, 어쩌면 너처럼 덜떨어진 녀석에게는 이 아이처럼 당찬 여자가 어울릴지도 모르겠군.>
‘으응.’
카이서스의 무시하는 말에도 나는 여전히 몽롱한 꿈속을 헤매느라 반발하지조차 못했다.
“응? 왜 벌써 나온 거야?”
아리안 누나의 손에 이끌려 다른 사람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서자 차를 마시고 있던 왕자가 의아해했다.
“일부러 침대까지 구해다 갖다 놓으라 했는데. 너무 빨리 나온 것 아니야?”
응접실 옆방에 침대가 있다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일부러 갖다 놓은 거였나!
잠시 의아해하던 왕자는 이내 뭔가를 떠올린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긴 긴장했으면 빨리 끝날 수도 있겠지.”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왕자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안 했습니다!”
아니, 왕자가 질 나쁜 아저씨나 할 법한 저런 성희롱을 대놓고 해도 돼?!
왕자가 배우는 것 중에는 성교육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조숙하잖아!
이런 농담은 나보다도 아리안 누나에게 더 기분 나쁠 듯해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아리안 누나는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로라스 왕자님. 남의 연애는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제 연인을 너무 괴롭히진 말아주세요.”
그렇게 말하곤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왕자는 잠시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내가 한창 그런 것에 관심이 많을 때라서 말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리안 누나의 입에서 나온 연인이라는 말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하이넨에 갇힌 이후로 가장 행복한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갔다.
통행 제한 시간을 이유로 바이엔에게 이끌려 내가 지내는 별궁으로 돌아왔다.
그 후 황제의 결혼식이 열리는 날까지 왕자님과 아리안 누나를 만날 수 없었다.
왕자님도 일국의 사절로서 온 것이기에 여러모로 바쁜 탓에 나를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나를 부른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아리안 누나도 수행원으로 따라왔기에 개인적으로 나를 만나러 올 수 없었고.
황제의 결혼식 때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황제의 결혼식이 열리는 날 아침.
나는 들떠 있었다.
황제가 결혼하건 말건, 제국이 축제 분위기이건 말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일단은 나도 하객으로 초대받았고, 국적이 크라우드인 이상 왕자님 근처에 앉을 수 있을 테니까.
결혼식장은 황궁 남쪽에 위치한 커다란 광장이었다.
하급 관리들의 안내를 받아 크라우드 사절단의 자리 근처로 안내되었다.
“오늘은 저번처럼 그쪽의 왕자가 제멋대로 굴지 않았으면 좋겠군.”
곁에서 있던 바이엔이 툴툴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아직 로라스 왕자를 비롯한 크라우드의 사절단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불만이면 직접 말하시든가요.”
황제의 결혼식이라고 예복을 차려입은 바이엔에게 그렇게 대꾸하곤 자리에 앉았다.
내 옆에 앉은 바이엔과 달리 나머지 호위대원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비들 틈에 섞여 있었다.
점점 하객들이 입장하며 각국의 사절들도 배정된 자리에 속속들이 앉기 시작했다.
“선생! 그동안 별일 없었지? 저 인상 나쁜 사람이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았어?”
오자마자 신경을 긁는 로라스 왕자의 말에 바이엔은 들리지 않도록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저야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죠.”
어색하게 웃으며 왕자의 말에 대답하고는 시선을 옆으로 향했다.
왕자와 조금 떨어진 곳의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아리안 누나도 작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앉지. 아, 거기 제국의 감시인.”
자리에 앉다 말고 자신을 부르자 바이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용건이신지요.”
“미안한데 자리 좀 양보해 주지 않겠나? 우리 선생의 옆자리는 임자가 있거든.”
내 왼쪽은 통로인지라 옆자리는 오른쪽의 자리 하나뿐이었다.
왕자의 말에 바이엔은 잠시 언짢은 기색을 띠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가지 못하는 것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떨어진 기둥 곁에 자리를 잡았다.
바이엔이 비키자 왕자는 아리안 누나에게 내 옆자리를 권했다.
“선생도 앉게.”
“감사합니다, 왕자님.”
왕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내 곁에 앉은 아리안 누나는 나에게 웃어 보였다.
“간밤에 잠은 잘 잤어?”
“네, 누나는요?”
“으음, 새벽 일찍 일어나서 뭘 하느라 조금은 피곤하네.”
“네? 무슨 일 있었어요?”
내 물음에 누나는 미소만 띤 채로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오히려 되물었다.
“오늘 어때 보여?”
“네? 아, 황제의 결혼식이라 그런지 경호가 삼엄하네요. 굉장히 화려하기도 하고……”
나의 단순한 감상에 아리안 누나가 피식 웃으며 말을 끊었다.
“그런 것 말고. 나 말이야.”
황제의 결혼식이 순식간에 그런 것 취급을 받은 것보다 자신이 어때 보이냐는 누나의 질문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듣기로는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꽤나 힘들어진다던데.
뭔가 달라졌나?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는데.
‘도, 도와줄래?’
나름대로 경험이 많다던 카이서스에게 도움을 구해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짧았다.
<싫은데?>
‘어째서?!’
<그야 물론 네가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게 대답하고 곤란해지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이 드래곤 놈의 용성이 더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기댈 구석이 사라진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연애는커녕 여자인 친구조차도 없었던 나의 뇌는 그런 고난이도의 대답을 내놓질 못하고 뻗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