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 황제의 결혼식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는 대답 대신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으…….”
그 소리에 나는 혀를 차며 재차 문을 두드렸다.
똑똑-
“괜찮아요?”
“끄으응, 머리 아프니까… 으으, 문 좀 그만 두드려.”
앓는 소리가 절반 이상이긴 해도 제대로 된 말이 돌아왔다.
“들어갈게요.”
들어간다는 말에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도 평소에 제대로 대답을 듣지 않고 내 방에 들어오곤 했으니까.
방으로 들어가 보니 바이엔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채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술에 취하지도 않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억지로 마시느라 고생하더니, 생각보다도 숙취가 심한 모양이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힘겹게 고개를 들어 보인 바이엔은 다 죽어가는 환자처럼 보였다.
옷도 갈아입지 못했는지 어제와 같은 차림이다.
“으으, 내 방엔 무슨 일이지?”
평소처럼 싸늘한 표정과 목소리로 대하려 하지만 숙취로 인해 힘겨워하는 것이 안쓰러워 보일 뿐이다.
“쯧쯧, 걱정돼서 와준 사람한테도 그러기예요?”
일단은 함께 이런저런 일도 겪은 데다 내가 제국을 떠날 때까진 계속 볼 사람이라 걱정해서 와줬더니.
“네 걱정 따윈… 으으.”
내 호의를 거부하려던 말도 끝까지 내뱉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는 모습에 나는 재차 혀를 차며 다가갔다.
“쓸데없이 허세 부리지 말고 이거나 마셔요.”
식당에 부탁해서 받아 온 차가운 꿀물을 내밀며 한 말에 그녀는 눈을 찡그린 채 툴툴거리면서도 순순히 받아 마셨다.
“아으…….”
뒤집혔던 속이 가라앉는지 조금은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으으, 죽을 것 같아.”
그래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것은 마찬가지인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을 흘렸다.
“어째서 넌 멀쩡한 거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어왔다.
“부러우면 그쪽도 드래곤이랑 친하게 지내시던가요.”
사실은 친하게 지내는 게 아니라 심장을 먹고 점점 드래곤과 비슷한 존재로 변화해 가야 하지만 말이야.
어깨를 으쓱거리며 농담처럼 대답한 말에 바이엔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뭐만 하면 드래곤이군. 그보다 함부로 여자 방에 들어오다니, 안 그런 줄 알았는데 꽤나 과감한 놈이군.”
“그쪽은 지금 남자 행세를 하고 있잖아요.”
“너는 내 성별에 대해 알……”
말하다 말고 그녀는 뭔가를 떠올린 듯 멈칫하더니 안 그래도 숙취로 창백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런 젠장.”
“왜 그래요?”
힘없는 목소리로 좌절하는 그 모습에 의아해하며 묻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내가 왜 술에 취해서 그런 짓을!”
술에 취했을 때 했던 무언가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양이다.
어제의 일을 슬쩍 떠올려 보았다.
결국 버티다 못한 바이엔이 정신을 잃었고, 그제야 공주는 우리를 별궁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공주 앞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건 아닐 테고.
“그런 짓이라뇨?”
“으으, 쓸데없는 소리를 해버리고 말았잖아!”
쓸데없는 소리… 아, 그건가?
공주가 내 사정에 대해 들었다며 제국에서 지낼 만하냐고 물었지.
나는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고 했다.
감시인인 바이엔 앞에서 제국을 욕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 후에 공주가 물었지.
‘라터스 자작은 어때요?’
평소라면 입에 발린 말로 넘어갔을 바이엔이었으나… 그때 너무 취해서 정신 줄을 반쯤 놓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지금까지 쌓여 있던 상사들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던 것이다.
자신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웠다며 상관들을 욕했었지.
술에 취해서 잊었을 줄 알았는데, 기억나는 모양이다.
“에이, 술 취하면 그럴 수도 있죠. 게다가 저희만 입 다물고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공주와 이야기하다 보니 그런 걸 떠들고 다닐 성격 같지는 않던데.
내 말에 바이엔은 똥 씹은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왜, 왜요?”
갑자기 얼굴을 코앞까지 가져다 대기에 화들짝 놀라며 묻자 그녀가 내 귀에 입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멍청하긴. 황궁 내에 눈과 귀가 없는 곳은 없단 말이다.”
그 말은 우리 외에도 어제의 이야기를 들은 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거고, 바이엔의 상관들에게 그 이야기가 들어갈 수도 있다는 거네.
“어… 힘내요.”
왠지 안쓰러워져서 응원해 주자 바이엔이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당장 내 방에서 꺼져!”
잠깐이라도 꾸물거렸다간 손에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기라도 할 기세였다.
* * *
타이런 제국의 황제 타이커스 프리드리히 타이런이 파이썬 왕국의 2공주 모니카 파이썬를 비로 맞아들인다고 공식 발표 되었다.
결혼식은 고작 한 달 뒤.
제국의 주인이 결혼하는 것이니만큼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이 무척이나 많을 것에 비하면 너무 짧은 준비 기간이었다.
서두르는 걸 보면 뭔가 사정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결혼식의 준비를 맡은 사람들이 불쌍하게 됐군.
부족한 시간은 결국 사람들을 갈아 넣어서 메워야 할 테니까.
축하 사절을 보내는 각국의 관계자들도 고생일 거다.
황제의 결혼식이니 어중이떠중이를 보내지도 못하고, 축하 선물도 엄선해서 고르는 등 할 일이 많을 테니까.
그것은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
특히나 사이가 안 좋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신경 쓸 게 많을 거다.
누가 사절로 올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이 왔으면 좋겠네.
황궁의 수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결혼식 준비로 여념이 없었지만 내가 머무는 별궁에선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평소처럼 방에 틀어박혀서 수련을 하며 지냈다.
* * *
황궁의 중심에 자리 잡은 제 1궁전은 궁전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높다.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쯧, 혀를 차며 돌아섰다.
황궁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황제의 결혼식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무척이나 바빴다.
게다가 결혼식 일주일 전인 오늘.
각국의 축하 사절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제국과의 거리에 상관없이 비슷한 날에 도착한 것을 보면 각국이 사전에 일정을 조율한 모양이다.
각국의 사절들까지 도착했으니 관리들은 더욱 바빠지겠지만 황제에게는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그의 심기에 거슬릴 뿐이었다.
“어차피 눈속임일 뿐인데 이렇게 요란을 떨어야 하나?”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그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황제의 물음에 조용히 서 있던 루리스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기에 더욱 제대로 해야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 폐하의 결혼식인데 준비가 소홀하면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괜한 의혹이 생겨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낫지요.”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 루리스를 쳐다보던 황제는 재차 혀를 찼다.
“쯧, 준비는 잘되어가나?”
“예, 황후가 기거할 제2 궁전의 준비는 이미 끝마쳤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모니카 공주만 들어가면 됩니다.”
“하필 힘들게 찾아낸 적격자가 파이썬의 공주라니. 덕분에 결혼까지 하는군.”
“어지간한 신분이라면 조용히 데려오거나 다른 방법을 썼겠지만… 적격자가 타국의 공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흥, 그리 오래가진 않을 테지만 그동안만이라도 황후라고 불릴 테니 나쁜 거래는 아니지.”
불만과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황제는 루리스의 말에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문뜩 생각난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보다, 감히 짐을 거스르려 한 것들은 찾아냈느냐?”
공주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습격했던 자들에 대해 묻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리스는 눈을 반쯤 감으며 생각했다.
“꽤나 치밀하게 준비를 했는지 아직까지는 배후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대가 제국의 힘을 이용하고도 알아내지 못하다니, 그것들도 만만찮지는 않은 모양이군.”
알아내지 못했다는 말에 황제의 목소리가 조금은 심각해졌다.
루리스가 황제의 권위를 빌려서 부리는 제국의 조직들 중에 어중이떠중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리조차 잡지 못했단 것은 가볍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것들이 뭔지는 몰라도 진행 중인 일들에 지장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루리스의 대답에 황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 보고할 것이 없거든 이만 물러가도록.”
손을 내저으며 돌아서는 황제의 뒷모습에 루리스가 조용히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던 루리스의 눈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일렁거렸다.
* * *
“나갈 준비 해.”
평소처럼 노크 같지도 않은 노크를 하고는 내 방으로 들어선 바이엔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용케도 내가 잠들어 있지 않거나 수련 중이지 않을 때 찾아온단 말이지.
뭐, 24시간 감시 중이니 들어와도 문제가 없을 때에 들어오는 거겠지.
그래서 노크도 제대로 하지 않는 걸 테고 말이야.
그보다 나갈 준비라니?
나는 약속된 기한이 끝나기 전까지는 이 별궁을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는 처지다.
간단히 말하자면 연금이랄까.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러 나설 때, 혹은 얼마 전에 모니카 공주가 불러냈을 때처럼 누군가와 만날 때만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나를 담당하는 바이엔의 상관이 승인해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누군가 나를 만나러 이 별궁에 찾아오는 것도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황제의 명령이 내려온 것은 아닌 것 같고, 다른 사람이 나를 찾는 모양이다.
“크라우드에서 온 손님인가요?”
황제의 결혼식이 치러지는 이 시기에 나를 찾을 사람이라면 역시 크라우드에서 온 축하 사절이겠지.
내 물음에 바이엔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준비나 하라는 듯 나가 버렸다.
아마 크라우드에서 축하 사절로 보낸 것은 마일렌 사이닉 공작이겠지.
아무래도 크라우드에서 황제에게 성의를 표시하려면 그쯤 되는 인물이 와줘야 할 테니까.
무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제국에 넘긴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제국에 왔으면 당연히 나를 찾겠지.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고 방을 나서니 역시나 바이엔과 그 수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지겹지 않아요?”
오랜만에 고국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에 약간 들뜬 내가 농담 삼아 말하자 바이엔이 코웃음 쳤다.
“그것 참 너무 멍청해서 대꾸하기도 힘든 헛소리로군. 뭐라 말할지 생각 좀 해봐야겠어.”
싸늘하게 대답하고 돌아서서 앞장서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뒤따랐다.
따로 알려주지 않아도 나는 각국의 사절들에게 내어진 궁전들이 모인 곳에 걸려 있는 크라우드의 국기를 찾을 수 있었다.
“안 그래 보이는데 꽤나 인기가 많은 게 신기하단 말이지.”
크라우드의 사절이 머무는 궁전으로 들어서던 중 바이엔이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겉으로는 안 그렇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보다 인기가 많다니?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크라우드의 왕자와 친하다더니, 정말인 것 같아서 말이지.”
“네?”
바이엔의 말에 의아해하며 되묻는 것과 동시에 안에서 누군가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달려 나왔다.
“선생! 오랜만이야!”
달려오던 이의 얼굴에 나는 깜짝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내가 예상한 마일렌 공작이 아니라 로라스 왕자였다.
“왕자님?! 대체 어떻게 이곳에?!”
갑작스러운 등장에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아 내가 얼떨떨해하자 왕자가 툴툴거렸다.
“선생은 내가 반갑지도 않나? 여길 왜 온 거냐는 듯한 말이로군.”
“아뇨! 그럴 리가요! 너무 예상치도 못한 일이라 놀랐을 뿐입니다.”
“그래? 하하! 놀랐다니 일부러 알리지 않고 온 보람이 있군.”
무척이나 즐거워하며 내 등을 두드리던 왕자가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지. 그런데 저들은 누군가?”
나를 잡아 이끌던 왕자가 슬쩍 바이엔과 호위대원들을 쳐다보며 속삭였다.
“제국에서 저에게 붙여준 사람들입니다.”
“흥, 감시인들인가. 꽤나 성격 나빠 보이는 자들이군.”
내 말에 왕자는 언짢은 표정으로 혀를 차며 속삭였다.
작은 목소리기는 했으나 바이엔이 듣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담담해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그동안 조금이나마 그녀에 대해 알게 된 나로서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꽤나 짜증 나 있다는 것을.
다만 상대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티를 내지 않으려 하고 있을 뿐이었다.
“으음,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시죠! 날이 덥습니다.”
서둘러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자리를 옮기려는 것도 있지만 실제로도 더웠다.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그늘 없는 바깥에 서 있는 것은 꽤나 뜨거웠으니까.
“하하, 그래! 들어가서 시원한 음료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지!”
왕자가 내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자 수행원들과 바이엔 일행들이 뒤따랐다.
응접실의 가장 상석에 왕자가 앉자 나는 예를 취하며 무릎을 꿇었다.
“인사드리는 것이 늦었습니다.”
“선생, 우리 사이에 무슨… 어서 자리에나 앉게.”
왕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하더니 다짜고짜 투덜거렸다.
“그동안 연락도 전혀 하지 않고 말이야. 섭섭했다고.”
왕자의 말에 자리에 앉으려던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칫했다.
“그, 그것이… 통신을 사용하려면 여러모로 복잡한지라…….”
마법의 사용이 통제된 제국의 황궁에서 통신을 사용하려면 무척이나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 전쟁을 치렀던 왕국의 사람인 내가 통신을 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왕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야, 농담. 그보다 선생, 내가 누구와 같이 왔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응?
또 누가 왔다는 거지?
왕자 이외에도 내가 놀랄 만한 사람이 왔단 말이야?
내가 자리에 앉다 말고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왕자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수행원 하나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째서 이런 자리에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건지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후드가 천천히 넘어가며 드러난 얼굴에 나는 왕자를 봤을 때보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