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 드래곤-88화 (88/150)

088화 - 공주와 독주

“그래도 아니 됩니다.”

겉보기에도 꼬장꼬장해 보이는 늙은 시녀는 자신이 모시는 이의 말에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가볍게 부탁해선 오랫동안 자신을 모신 시녀의 마음을 돌리기 어렵다고 여긴 건지, 공주는 작전을 바꾸었다.

“파렐도 알다시피 황제와 혼인하고 나면 지금과 같은 절반의 자유마저도 누리지 못할 거야. 오늘만이라도 맘대로 할 수 있게 해줘.”

힘없이 말하며 자신을 쳐다보는 서글픈 시선에 파렐은 신음만 흘렸다.

그러다 결국은 주인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파렐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시녀일 뿐인 제가 어찌 공주님의 뜻을 막겠습니까.”

약간은 불만이 섞인 듯한 파렐의 말에 모니카 공주는 언제 축 처져 있었냐는 듯 웃으며 능청스레 말했다.

“에이, 나를 어릴 때부터 키워준 거나 다름없는 파렐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두 사람은 평범한 주종 이상의 관계인 듯하다.

그렇기에 파렐도 끝까지 공주를 막지 못한 거겠지.

파렐도 공주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말이 싫지는 않은 기색이다.

히히 웃으며 파렐을 쳐다보던 공주가 우리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여기 오면서 내가 아끼던 술들을 이것저것 챙겨 왔거든. 도중에 문제도 있었는데 대부분 깨지지 않고 도착해서 다행이야.”

우리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결정을 내린 공주가 시녀들에게 술을 가져오라 손짓했다.

공주가 파이썬에서 가져온 술들이 테이블 위에 차례대로 놓였다.

각양각색의 술병들과 간단한 안주가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자 공주가 흐뭇하게 웃었다.

“자, 그럼 간만에 맘껏 마셔볼까. 여기 두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나가줄래?”

나와 바이엔만 남겨두겠단 말에 파렐이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공주님! 아니 되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합니까!”

이렇게 소리 높여 불안해하는 것은 이곳에 오는 동안 일어난 불상사를 잊을 리 없기 때문이겠지.

“괜찮아. 여긴 황궁 안이잖아. 내가 필요하면 죽게 두진 않겠지. 죽일 거였으면 언제든 죽였을걸? 안 그래?”

파렐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저렇게 말하는데도 안 된다고 하면 황궁의 보안을 믿을 수 없다고 제국인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난 제국인이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말이야.

“하나 사내들만 공주님의 곁에 남겨두고 자리를 비울 수는 없습니다.”

사실 둘 중 하나는 남자가 아니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파렐이 그것만은 따를 수 없다는 의미로 말하자 공주는 어쩔 수 없이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그럼 파렐도 여기 남도록 해.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들을 소리쳐 부르면 되잖아. 단, 끼어들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해. 한마디라도 잔소리했다간 아무리 파렐이라도 화낼 거야.”

결국 늙은 시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약간은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곳은 파이썬 왕국이 아니라는 것만 잊지 말아주시옵소서.”

돌려 말했지만 결국은 사고 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다.

파렐의 마음이 이해 가기도 했다.

자신이 모시는 공주님이 술에 취해 문제라도 일으킬까 봐 걱정되겠지.

거기다 이곳은 자신들의 영역도 아닌 제국의 황궁.

목격자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도 힘드니까.

주춤거리던 나머지 시녀들은 결국 공주의 매서운 시선에 어쩌지 못하고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공주의 곁에 시립한 파렐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아무 말 않고 있던 바이엔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째서 저희입니까?”

‘같이 술 마실 사람이 필요한 건 알겠는데 왜 하필 우리냐’라는 뜻을 지닌 바이엔의 물음에 공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희는 내 진짜 모습을 봤으니 피곤하게 연기할 필요도 없잖아?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니 잔소리하지도 않을 테고.”

깔깔 웃으며 슬쩍 파렐을 쳐다본 공주가 나와 바이엔의 앞에 놓인 크리스털 잔에 호박색이 감도는 술을 따라주었다.

자신의 잔에도 넘칠 정도로 술을 따른 공주가 잔을 치켜들었다.

“자, 그럼 마시자고! 설마 내가 주는 술을 마시기 싫은 건 아니겠지?”

국가는 다르지만 일국의 공주인 데다 자신이 모시는 황제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 여자다.

그런 모니카 공주가 손수 따라준 술을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바이엔도 잔을 들어 올렸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바이엔도 거절하지 못하는데 나라고 다를까.

단숨에 들이켜는 공주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술을 마시는 바이엔을 보다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크에엑!”

고운 빛깔과 달콤한 향기와는 달리 무척이나 썼다.

게다가 살짝 삼키기만 했을 뿐인데도 목구멍에서부터 화끈한 열기가 잔뜩 느껴질 정도로 독했다.

<무식할 정도로 독한 술이로군.>

나와 감각을 공유한 카이서스도 어이없어하며 투덜거렸다.

입안에 흘려 넣었던 것을 반도 넘기지 못하고 뿜어내며 콜록거리는 내 모습에 공주가 무척이나 즐거워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았다기에 기대했는데, 술에는 약한 모양이네?”

“켁, 켁! 제가 약한 게 아니라 이게 너무 독한 겁니다!”

콜록거리는 와중에도 힘겹게 입을 열어 반박했다.

나도 술을 많이 마셔본 것은 아니지만 여러 술을 마셔봤었다.

하지만 이 술은 지금껏 먹어본 술들이 음료수로 느껴질 정도로 쓰고 독했다.

간신히 속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진정시키곤 물었다.

“그보다 저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까?”

지금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기에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줄 알았는데.

모니카 공주는 코웃음 쳤다.

“흥, 내가 그 대단하신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의 이름도 몰랐을까?”

그렇게 말하고 공주는 그 독한 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마셨다.

“굉장히… 독하군요.”

술을 뱉어내며 난리를 친 나와는 달리 얼굴만 일그러뜨리고 있던 바이엔이 신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녀도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치? 이 정도가 아니면 난 취하기도 어려워서 말이야.”

이 정도로 독한 술이 아니면 취하기도 어렵다니 공주는 엄청난 주당인 모양이다.

깔깔거리며 빈 잔을 다시 채우는 공주에게선 처음 만났을 때의 우아하고 조신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지금껏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연기를 하셨던 겁니까?”

내가 묻는 말에 공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왕족이라고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왕실의 체면이라든가 여러 가지 이유로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서는 얌전한 척을 해왔지. 어지간한 배우들보다 실력이 좋다고 자부한다고. 복면을 뒤집어쓴 놈들만 아녔으면 너희도 끝까지 속았을걸?”

간만에 자신의 본모습을 타인에게 드러낼 수 있어서인지 공주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복면인에게 쫓길 때 떨던 것조차 연기였던 겁니까?”

공포에 질렸던 모습조차 연기라니, 지금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 그거? 사실 황제 때문에 짜증 나는 일을 겪는다고 생각하니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느라고 그런 거였는데?”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열받아서 그런 거였어?

태연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바이엔도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주는 잔을 들어 올렸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자신의 사정에 대해서 더 말하기 싫다는 듯한 공주의 태도에 바이엔과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서 잔을 들어 올렸다.

독하기 짝이 없는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빠르게 취기가 오르는 듯 바이엔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평소의 냉랭한 표정도 반쯤 풀려 있었다.

그녀가 술에 약한 게 아니라 마시는 것이 너무 독한 것이다.

술기운 때문인지 눈을 찌푸리던 바이엔이 나를 보더니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이 되었다.

“넌 괜찮은 거냐?

“어… 그런 것 같은데요.”

“말도 안 돼, 이렇게 독한 술을 마시고도?”

그러게, 어째서 난 멀쩡한 거지?

공주나 바이엔과 비슷한 양의 술을 마셨는데도 나는 멀쩡했다.

맛이 쓰고 목구멍을 넘어가는 느낌이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취한 사람이 자신이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색도 없었다.

지금껏 마셔본 술들 중에서도 가장 독한데 어째서 취하지 않는 거지?

바이엔의 물음에 의아해하는 내게 카이서스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거야 너의 몸이 점점 드래곤의 것과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다. 너의 절반은 드래곤인데 술 따위에 약해질 것 같으냐? 독도 마찬가지로 네겐 통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예전엔 술에 취하고 다음 날에 숙취에 고생한 적도 있는데?’

<그때는 내 심장을 취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고. 지금은 육체가 드래곤의 것에 더욱 가까워졌기 때문이지.>

‘그런 거야? 술은 물론이고 독에도 멀쩡할 수 있다는 거네. 대단한… 잠깐만, 점점 드래곤에게 가까워진다는 건 반인반룡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드래곤이 될 수도 있다는 거야?!’

독에도 면역을 지니게 되었단 말에 놀라워하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점점 드래곤과 가까워진다면… 막 비늘도 나고, 날개랑 꼬리도 생기고, 덩치도 산처럼 커지는 거야?!

<미친놈. 완전한 드래곤이 될 수 있다니, 헛소리를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혀를 차며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 머쓱해졌다.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애초에 영혼의 그릇이 드래곤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작고 초라한데 그게 가능할 리가 있겠냐! 다만…….>

“후후, 첫잔을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던 것치고는 잘 마시네?”

내면의 대화를 하던 도중 공주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 탓에 카이서스가 하려던 말은 듣지 못했지만… 뭐, 중요한 거라면 나중에 말해주겠지.

“너무 맛이 강렬해서 놀랐던 겁니다. 그런데 공주님도 대단하시네요.”

나야 말도 안 되는 사기급의 신체를 갖게 되었다 쳐도 공주는 어째서 멀쩡한 거야?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것을 제외하면 공주도 전혀 술에 취하지 않아 보였다.

“내가 어릴 때부터 마셔온 술이 얼만데! 이 정도로 취하지는 않는다고!”

자랑하듯 웃으며 이야기하는 공주의 모습에 곁에 서있던 파렐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부터라니, 공주의 음주 때문에 파렐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상한데.

아무리 내로라하는 주당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독한 술을 들이마시면 조금은 취할 텐데.

‘복면인의 습격 때 마차 문짝을 뜯어서 휘두르던 괴력도 그렇고… 대체 공주의 정체는 뭐지?’

<딱 봐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지.>

‘뭔가 아는 것 없어? 알고 보면 전설 속에 나오는 거인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거나…….’

<글쎄, 겉으로 봐서는 나도 모르겠는데.>

공주에게 트레이스 마법을 써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타이런의 황궁 내에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진이 펼쳐져 있으니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공주의 몸에 대한 비밀은 다음에 알아봐야겠다.

“음? 한 병을 다 마셨네. 이번엔 무슨 술을 마셔볼까.”

처음에 딴 무식할 정도로 독한 술이 다 떨어지자 공주가 눈을 빛내며 다음 술을 고르기 시작했다.

“으음, 저는 이미 취한 것 같으니 그만 마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병을 셋이서 나눠 마셨다고는 해도 보통 사람은 한두 잔만으로도 얼큰하게 취할 정도의 술이다.

힘든 기색이 역력한 바이엔의 말에 모니카 공주가 눈을 찌푸렸다.

“뭐야, 벌써 분위기 깨기야? 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술자리를 이렇게 금방 끝내자고?”

술을 강요하는 것은 매너가 아니지만 공주는 전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욕이라도 한바탕 쏟아내며 더 이상 못 마시겠다며 상을 뒤집어엎기라도 하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귀하신 분이다.

“…조금은 부드러운 술로 부탁드립니다.”

결국은 약간은 간절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좋아. 지금부터는 천천히 가자고.”

히죽 웃으며 다음 술병을 들어 보이는 모니카 공주는 이 술자리를 금방 끝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게다가 아직 창밖은 밝다.

나는 몰라도 바이엔은 술에 취해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도 보통 노력이 아니라 노오오오오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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