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 공주 본색
“아까 그거 한 방 더 날려!”
바이엔이 말하는 것은 포위망을 뚫을 때 썼던 익스플로전이다.
“무리예요! 이렇게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큰 마법을 써본 적이 없다고요!”
격하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시간과 집중이 필요한 마법을 시전하다 자칫 실수라도 했다간 마나가 폭주할 수도 있다.
그랬다간 적을 공격하긴커녕 마차가 박살 날지도 모른다.
물론 마차 안의 내용물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연습하고 익숙해지면 흔들리는 마상에서도 마법을 시전 할 수 있다지만 나는 아직 경험이 적다.
“쓸모없긴! 그럼 쓸 수 있는 마법이라도 써!”
그녀의 짜증 가득 섞인 외침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이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마법을 생각했다.
쉬우면서도 금방 시전 할 수 있는 것은 파이어 애로우 정도인가.
“순순히 공주를 넘겨라!”
어느새 복면인들을 태운 말은 마차를 가까이 따라잡았다.
나는 오른쪽 창문 밖으로 머리뿐만 아니라 상체를 내밀고는 마법을 시전 했다.
“파이어 애로우!”
낮은 서클의 파이어 애로우도 이 상황에선 이중 영창을 할 수 없었다.
화염의 화살이 날아가 가장 가까이까지 쫓아온 복면인에게 꽂혔다.
동료가 말에서 떨어져 목이 꺾이는 모습에도 복면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거리를 좁혔다.
“파이어 애로우!”
쉴 새 없이 화염의 화살을 날렸으나 적들은 너무 많았고,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게다가 오른쪽 창문으로 몸을 내민 나는 마차 왼쪽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볼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느새 마차의 왼편으로 접근한 복면인이 말을 박차고 뛰어올라 마차에 달라붙은 것이다.
마차에 매달린 복면인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내가 소리치기도 전에 대응한 것은 7호였다.
제복 상의를 열어젖히고 있던 그녀는 복면인의 목을 단검으로 베었다.
한 뼘도 안 되는 길이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너비.
들고 휘두르기보다는 투척용으로 보이는 단검이었다.
그녀의 제복 상의 아래에 숨겨두고 있던 수많은 단검들이 보였다.
“컥!”
목을 움켜잡으며 마차에서 떨어진 복면인의 최후를 무심하게 확인한 7호가 열린 문 밖으로 몸을 내밀며 단검을 뒤로 던졌다.
복면인이 가까이 붙을 때마다 단검을 던지는 7호에게 왼쪽을 맡겼지만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복면인들도 어중이떠중이는 아니었는지 말 위에서도 검을 휘둘러 7호의 단검과 나의 파이어 애로우를 쳐냈다.
그렇게 마차를 따라잡은 그들이 노린 것은 말과 마차의 연결부였다.
마차를 몰던 11호가 한 손에는 고삐를, 나머지 한 손으로는 검을 휘두르며 막으려 했으나 무리였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마차의 연결부가 복면인의 검에 끊어진 것이다.
네 마리의 말은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어둠속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에 비해 동력을 잃어버린 마차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더니 결국엔 멈춰 섰다.
마차 밖으로 튕겨 나갈 뻔한 것을 간신히 창틀을 붙잡아 버텨낸 나는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마부석에서 들려오는 11호의 말에 바이엔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달아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순순히 공주를 넘긴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마차 밖에서 복면 우두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에는 피곤과 성취감, 분노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섣불리 마차를 공격하면 모니카 공주가 다칠지도 모르니 기회를 주는 모양이지만 계속해서 시간을 끌지는 못할 거다.
“10초를 주겠다! 투항해라!”
그래도 10초는 너무 빠르잖아!
“10!”
우두머리가 초를 세는 것과 동시에 말에서 내린 복면인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그 수는 대략 60여 명.
뒤에 남아 시간을 끈 자들 덕분에 수가 줄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많다.
“어떡하죠?”
우두머리가 세는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아직인가.”
중얼거리듯 내뱉는 바이엔의 말에 나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의아해졌다.
아직이라니, 뭔가 기다리는 건가?
복면인들이 공격하길 기다리는 걸 아닐 테고.
그때였다.
“썩을, 이놈이나 저놈이나 자꾸 짜증 나게 하네. 야, 비켜봐!”
의아해하던 와중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는 가만히 앉아 있던 공주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으니까.
“고, 공주님?”
지금까지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보이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거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험악한 말투였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7호조차도 당황한 듯 얼떨떨해하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바이엔도 얼이 빠진 얼굴로 쳐다보았고 내 표정도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공주가 마차에서 내리려 하자 정신을 차린 7호가 앞을 막아섰다.
“고, 공주님, 안 됩니다!”
“돼!”
막아서는 7호를 귀찮다는 듯 가볍게 밀쳐내며 공주가 마차 문을 박차고 나갔다.
“윽!”
7호는 신음을 흘리며 의자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어, 어라?
분명 7호도 특무대 출신의 정예일 텐데, 어떻게 저렇게 간단하게 밀쳐낼 수 있지?
마차 안의 우리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공주가 제 발로 나오자 복면 우두머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모니카 공주를 모셔라.”
열린 문으로 밖을 보니 복면인 하나가 공주에게 다가왔다.
“이리로… 컥?!”
자신에게 손을 뻗는 복면인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는 공주의 모습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무, 무슨……! 설마 가짜인 거냐!”
고통스러운 비명을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지는 부하의 모습에 복면 우두머리가 경악했다.
“누가 가짜라는 거냐! 흥! 아바마마가 얌전하게 있으라고 해서 내숭 좀 떨고 있었으니 속이긴 했지만!”
고개를 갸웃거린 공주는 마차의 문짝에 두 손을 대고는 그대로 뜯어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공주는 맨손으로 마차의 문짝을 뜯어냈다.
뜯어낸 마차 문짝을 허공에 대고 가볍게 몇 번 휘둘러 본 공주가 그럭저럭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맙소사.
문짝을 뜯어냈을 뿐만 아니라 저걸 손에 들고 휘두른다고?!
공주가 타는 것이기에 겉으로는 수수해 보여도 화살과 같은 외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안에는 철판이 덧대어진 마차다.
문 역시 안에는 철판이 덧대어져 있을 텐데, 그걸 뜯어내선 들고 휘두른다고?!
공주이기 이전에 인간 맞아?
저 괴력은 대체… 설마 지금까지 보인 연약하고 예의 바른 모습은 전부 연기였다는 거고, 이게 진면목이라는 건가?
“황제에게 팔려 가는 것만 해도 짜증 나는데, 나를 납치하겠다고?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진짜 공주 맞아?
왕족의 품위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다들 충격을 받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거기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
복면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가운데 공주가 문짝을 휘두르며 먼저 달려들었다.
“고, 공주를 생포해! 조금은 다치더라도 상관없다!”
정신을 차린 복면 우두머리가 부하들에게 명령하자 바이엔도 서둘러 외치며 마차를 뛰쳐나갔다.
“우리도 공주님을 돕는다! 11호는 저 얼간이를 지켜!”
바이엔의 뒤를 따라 7호도 뛰쳐나갔고 마부석의 11호도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복면인들에게 달려들었다.
공주가 문짝을 크게 휘두를 때마다 복면인들이 하나둘 날아갔다.
휘두르는 속도도 빠르고, 문짝이 워낙 큰 탓에 피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죽이지 않고 생포하라니 복면인들은 죽을 맛일 거다.
<내가 지금껏 별꼴을 다 봐왔지만 문짝을 휘두르는 공주는 처음 본다.>
‘어… 보통은 그런 거 못 보는 게 정상이야.’
황당해하는 카이서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그마한 체구에서 대체 어떻게 저런 괴력이 나오는 거야?!’
<흐음, 아무래도 저 공주에겐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다.>
‘으음, 그 황제가 원하는 공주라면 평범할 리가 없겠지.’
나는 카이서스와 함께 공주가 싸우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채로 문짝을 휘두르는 공주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문짝에 부딪쳐 날아간 복면인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피를 토한다거나, 이곳저곳 부러진 몰골이었다.
철판이 덧대어진 커다란 문짝을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 댔으니 당연한 일인가.
7호가 특무대 출신답게 재빠르게 움직이며 복면인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단검을 휘두르고, 던지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목숨을 빼앗는 효율을 중시한 살인.
롱소드를 휘두르는 바이엔도 그 두 사람에겐 미치지 못해도 예상외로 뛰어난 실력이었다.
칼날을 가득 뒤덮은 채 일렁이는 마나의 기세를 보아하니 오러 마스터는 아니더라도 굉장한 실력.
어째서 기사가 아닌 사법관을 하고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다.
“라엘 님.”
마차 안의 나를 지키고 있던 11호가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도우라는 듯 불렀다.
그제야 나도 정신을 차리고 마법을 준비했다.
크게 다치게 하는 것조차 안 되기에 상대하기 힘든 공주, 그리고 뛰어난 실력의 바이엔과 7호.
“파이어 월!”
거기에 내가 11호의 보호를 받아가며 마법을 시전 하며 복면인들을 방해했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위인 복면인들이라 해도 피해가 누적되니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큭! 죽여도 상관없다! 황제의 손에 공주가 넘어가게 둬선 안 된다!”
열댓 명이 당하자 다급해졌는지 복면 우두머리가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 말에 공주를 공격하던 복면인들이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무리 엄청난 신체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실력에서 차이가 난다.
복면인들이 제대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공주의 몸 곳곳에 상처가 하나둘 생겨났다.
“이 썩을 것들이!”
공주가 당황한 듯 소리쳤다.
일국의 공주가 언제 목숨 건 혈투를 해봤겠는가.
분노보다 당혹함이 커지자 공주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바이엔과 7호도 다른 복면인들에게 가로막혀 공주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바이엔과 7호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복면인들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데다 숫자가 너무 많다.
공주가 문짝을 휘두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였다.
“크윽!”
그 와중에 바이엔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바이엔이 왼쪽 어깨를 당한 듯 피를 흘리고 있었다.
“파이어 애로우!”
그녀의 등 뒤를 노리는 복면인의 등에 빠르게 시전 할 수 있는 파이어 애로우를 날렸다.
“컥!”
바이엔의 등을 노리던 복면인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으나 전투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공주나 바이엔이나 7호나 이러다간 점점 상처가 늘어나서… 복면인들을 모두 해치우기 전에 우리 중 하나가 죽고 말 거다.
나를 노리고 마차로 달려드는 복면인들도 문제였다.
“파이어 볼! 파이어 애로우!”
11호가 막아주고 있기는 해도 점점 위험해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다가 정말 죽는 거 아냐?
카이서스가 말한, 마법 주머니 속의 탈출 수단을 꺼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응?”
바닥이 떨려오고 있었다.
멀리서 수많은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설마, 복면인들이 더 있었던 건가?!
나는 이중 영창으로 내게 달려드는 복면인들을 견제하고 공격하며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백여 기의 기마가 이쪽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올라탄 자들은 모두 어둠처럼 검은 색의 사슬 갑옷을 걸치고 검은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갑옷 아래에도 검은 제복 차림이었다.
보통 사람이 보면 전투마들 위로 어둠 속에서 안광만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지원… 군?”
내가 확신하지 못하고 중얼거린 것은 그들이 복면인의 지원군인지, 우리의 지원군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중얼거림에 곁에 있던 11호가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순간에도 그들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11호가 씨익 웃으며 소리쳤다.
“지원이 도착했습니다!”
“이제야 온 건가!”
11호의 외침에 바이엔이 검을 휘둘러 복면인 하나를 처리하며 화답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저 말투.
역시 아까 전에 쏘았던 신호탄은 저들을 부르는 용도였던 거다.
갑작스러운 지원군의 등장에 복면인들이 당황한 듯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어찌할지 물어보는 듯한 부하들의 시선에 복면 우두머리가 분통을 터뜨렸다.
“크윽, 제기랄! 전원 물러난다!”
“순순히 놓아줄까 보냐!”
상황이 역전되자 바이엔이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부상을 입은 바이엔과 7호 둘이서 달아나는 복면인들을 막기는 불가능했다.
마구 날뛰던 모니카 공주는 복면인들이 물러나기 시작하자 문짝을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드레스 곳곳에 튄 핏자국에 눈을 찡그리던 공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흐트러진 머리만 정돈했다.
그러고는 우리를 돌아보더니 검지를 입가로 가져다 대고, 씨익 웃으며 엄지로 목을 그어 보였다.
그녀의 몸짓이 의미하는 의미는 명료했다.
쓸데없이 떠들면 죽인다.
흥, 누가 그런 협박에 굴복할쏘냐.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머지 세 사람도 아마 나와 마찬가지였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