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 드래곤-85화 (85/150)

085화 - 탈주

“네놈들은 누구냐!”

공주의 수행원 중 하나가 칼끝을 복면인들에게 겨누며 소리쳤으나 당연히 알려줄 리 없었다.

그들은 말없이 사방에서 포위하며 다가왔다.

검은 옷에 복면, 거기에 각종 무기까지, 좋은 의도로 나타난 것이 아님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봐, 당신이 위험해지면 지난번처럼 드래곤이 도와주는 건가?”

곁에 있던 바이엔이 복면인들을 노려보는 와중에 속삭이듯 내게 물었다.

“아뇨,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

그때는 자신의 손이 닿았던 드라이어스 때문에 개입했지만 이번엔 인간들 간의 문제이니까.

아무리 내가 반은 동족이라고 할지라도 카락스라면 이번엔 구경만 할 거다.

드래곤은 해츨링이 아니면 동족을 지켜주지 않으니까.

“쳇.”

혀를 차며 적들을 응시하는 바이엔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포위를 좁히며 다가오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우리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선 그들은 다짜고짜 달려들 것 같지는 않았다.

“모니카 공주를 넘겨라. 그럼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복면인들 중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공주님에 대한 걸 알면서도 이러는 건 제국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라는 것도 알겠지.”

바이엔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을 노려보자 복면의 우두머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든 것은 제국을 위해서다. 도리를 벗어난 황제의 뜻대로 되게 두지는 않는다!”

제국을 위해서라… 애국자라서 황제에게 맞선다는 건가.

그래서 무지카의 병사들에게 독이 아니라 수면제를 쓴 건가.

그들도 일단은 제국의 병사이니까.

뭐, 황제의 성격이나 지금까지 해온 짓을 생각해 보면 제국 내에 적이 있는 것도 당연하지.

“역사 속 수많은 역적들이 늘어놓던 레퍼토리로군! 역사책을 보면서 좀 새로운 걸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코웃음을 치며 바보 취급을 하는 바이엔의 모습에 복면 우두머리가 분노했다.

“이 타락한 황제의 개가!”

복면으로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얼굴이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을 거다.

“왜 쓸데없이 자극하고 그래요?”

더욱 험악해진 분위기에 바이엔에게 속삭이듯 타박했다.

안 그래도 무지카의 군대가 모두 잠들어 있는 상황이라 우리가 무척이나 불리한 상황인데.

“여길 빠져나갈 거다. 들키지 않게 큰 거 한 방 날릴 준비해.”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호위대원들이 내 주변을 둘러쌌다.

내가 마법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몸으로 가리는 거다.

그걸 위해 바이엔은 일부러 상대를 도발해서 시선을 끈 거겠지.

“공주를 넘겨주면 안전을 보장하겠다. 공주에게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지.”

복면 우두머리는 바이엔과는 교섭의 여지가 없다고 여겼는지 이번에는 공주의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공주님을 넘길까 보냐!”

공주의 수행원들 중 몇 안 되는 기사가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 기세로 소리쳤다.

나름대로 충성스러운 자들로 데려온 모양이다.

어째서 공주를 원하는지도 알 수 없는 데다 정체 모를 자들에게 공주를 순순히 넘길 수는 없겠지.

공주는 이 상황이 무서운지 고개를 숙이고 잘게 떨고 있었다.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공주를 데려가는 수밖에. 공주를 제외한 나머지는 저항하면 죽여도 좋다!”

우두머리의 말에 복면인들은 전투 태세를 취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히며 다가오는 복면인들을 살피던 바이엔이 소리쳤다.

“라엘! 7시 방향이다!”

복면인들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면서도 경계하듯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호위대원들 덕분에 들키지 않고 준비하고 있던 나의 마법이 시전되었다.

다행히도 그쪽 방향에는 잠들어 있는 병사들이 없었다.

“익스플로전!”

바이엔이 말한 7시 방향의 복면인들의 발밑에서 마나가 응축되었다.

“젠장! 피해!”

뭔가를 느낀 듯 그곳의 복면인들이 피하려 했으나 늦었다.

응축된 마나는 화염의 속성을 띠며 그대로 폭발했다.

콰앙-!

그곳에 있던 복면인들이 화염의 폭발에 휘말려 사방으로 날아갔다.

폭발의 중심에 있던 자들은… 음, 말하지 말자.

포위망이 깨지며 길이 열리자 바이엔이 앞장서며 소리쳤다.

“공주님을 모시고 돌파한다!”

그 말에 갑작스러운 폭발에 깜짝 놀라 주저앉은 자들을 두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지는 나를 호위대원 1호가 둘러메고, 7호도 모니카 공주를 안아 들고 달렸다.

“뒤처진 사람들은요?!”

1호의 어깨 위에서 바이엔에게 소리 높여 물었다.

미리 계획을 말해둔 것이 아니기에 공주의 수행원 중에는 갑작스러운 폭발에 놀라 뒤처진 자들이 있었다.

대부분 시종과 시녀 같은, 재빨리 대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어쩔 수 없어! 지금은 공주님을 안전하게 모시고 가는 것이 우선이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치는 말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들을 따라오는 파이썬의 수행원들은 십여 명 정도,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적들이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죽이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나.

익스플로전으로 인해 쓰러진 자들이 꽤 되기는 했으나 다른 복면인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지금도 복면인들이 재빨리 움직여 포위망을 다시 구성하려 했다.

“길을 열어라!”

바이엔의 말에 호위대원들이 앞으로 나서며 복면인들을 베어 넘겼다.

기세라든가 움직임을 봐선 복면인들의 실력도 보통은 아닌 듯했으나 특무대 출신의 호위대원들에겐 미치지 못했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를 호위하고, 여차하면 제압하려고 붙여놓은 자들이니까.

특무대에서도 정예라고 불리는 자들이라고 했다.

“놓치지 마라!”

복면 우두머리의 외침에 복면인들이 앞을 막으려 했으나 우리가 좀 더 빨랐다.

결국 뚫린 포위망이 다시 막히기 전에 돌파할 수 있었다.

“마차 쪽으로!”

포위를 돌파한 우리가 마차 쪽으로 향하자 복면인 전원이 포위를 풀고 쫓아왔다.

복면인들은 뒤처진 수행원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쳐서 우리를 쫓아왔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오직 모니카 공주.

뒤처진 자들을 ‘처리’할 시간도 아까운 모양이다.

그런데 마차가 있는 곳까지 가서 어쩔 셈이지?

묶여 있는 말을 풀고, 마차에 연결하는 동안 바로 뒤에서 쫓아오는 복면인들에게 따라잡힐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앞에서 마차 한 대가 달려오다가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네 마리의 튼실한 말이 끄는 공주의 마차였다.

“어서 타십시오!”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 있던 낯선 얼굴의 사내가 소리쳤다.

“누구?!”

내가 깜짝 놀라 소리치자 곁에서 달리던 호위대원 2호가 대신 알려주었다.

“안심하시길, 제 동료입니다!”

확실히 호위대원들과 같은 검은 제복 차림이긴 하지만 내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바이엔은 처음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네게 알리지 않고 감춰뒀던 놈이겠지.>

카이서스의 말에 나는 지금의 처지를 상기했다.

볼모에게 자신을 감시하고 관리할 자를 모두 드러낼 리가 없지.

마부석에 앉아 있는 자가 바로 호위대원임에도 모습을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던, 11호였던 거다.

어둠 속에 숨어 지켜보다가 야영지의 이변을 깨닫곤 마차를 확보하려 먼저 이동했겠지.

마차를 노린 복면인이 있었는지 마차 곳곳에는 피가 묻고 흠집도 곳곳에 나 있었으나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가장 먼저 공주를 안고 있던 7호가 마차에 올라타고 바이엔도 뒤따라 올라탔다.

1호가 둘러메고 있던 나를 마차에 던져 넣는 것과 동시에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어서 출발해!”

그와 동시에 마차가 출발했다.

“피신할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거친 운전 솜씨 때문에 흔들리는 마차에서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1호가 소리친 말에 수행원들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듯 결연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7호와 11호를 제외한 호위대의 9명과 뒤따라온 공주의 수행기사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바로 뒤까지 쫓아온 복면인들과 맞섰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갔다.

스물도 채 안 되는 사람들로 백에 달하는 복면인들을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라고 해도 수적으로 너무 열세이니까.

아마도 살아서 다시 만나기는 어렵겠지.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절로 성호를 그었다.

목숨까지 걸어가며 시간을 벌어주는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바이엔의 목소리에 창밖으로 빼고 있던 머리를 거두어들였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묻는 말에 공주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요.”

조금 전에는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더니, 그사이 진정한 모양이다.

마차가 격하게 흔들리는 탓에 힘주어 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녀는 눈을 살짝 찡그리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괜찮아 보였다.

마차를 모는 자가 전문 마부도 아닌 데다 빠르게 달려야 하기에 승차감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저 마차가 뒤집히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나마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고개를 내민 데다 길이 그럭저럭 잘 닦여 있던 덕분이었다.

공주의 상태를 확인한 바이엔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더니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마나가 살짝 흔들리며 바이엔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막대기 끝에서 무언가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파앙-!

막대기 안에 갇혀 있던 마법이 높이 날아올라 밤하늘을 밝히며 폭발했다.

야간에 위치를 알릴 때 쓰는 신호탄이었다.

신호탄의 불꽃이 길게 꼬리를 만들며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적들에게 우리 위치를 알릴 셈이에요?!”

바이엔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목소리를 높였다.

“적들은 전문가다, 어차피 바퀴 자국을 따라 우리를 쫓아오겠지. 신호탄은 놈들을 위한 것이 아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추궁하듯 쳐다보는 내 시선에도 바이엔은 아직은 말할 수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저 앞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 나왔다.

너무 심각한 표정인데다 내가 묻는다고 대답해줄 사람이 아니기에 캐묻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따라잡힌다면 혼자만이라도 튀는 게 어떠냐? 인간들의 사정으로 어이없이 죽는 건 사양이란 말이다.>

내가 죽으면 내게 깃들어 있는 자신도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인지 카이서스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그게 가능할지 의문인데. 게다가 내가 달아나려 하면 바이엔이 먼저 날 죽이려 들걸.’

애초에 바이엔이나 호위대가 곁에 있는 이유는 내가 도망치거나 배신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나를 제거하기 위함이니까.

<걱정 마라. 네가 내 둥지에서 가져온 물건 중에는 탈출용 아티팩트도 있으니까.>

‘그런 게 있었어?’

마법 주머니에 담겨 있는 카이서스의 둥지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뒤에 남은 자들은 걱정하지 마시길. 파이썬 쪽의 사람들은 몰라도 제 동료들은 순순히 죽을 자들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니까요.”

내가 침묵하고 있자 뒤에 남은 자들을 걱정하는 것이라 여긴 듯 7호가 말을 걸어왔다.

사실 그걸 걱정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뒤에 남은 사람들을 금방 잊어버린 것 같아 미안해졌다.

그로부터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마차 뒤편에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두

황급히 오른쪽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밖을 보니 말을 탄 복면인들이 횃불을 들고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뒤에 남았던 사람들은 모두 당한 건가?!”

빠른 추격에 내가 당황해서 소리치자 바이엔이 대답했다.

“무리를 둘로 나눴을 거다. 어차피 노리는 것은 공주님의 신변이니 방해가 될 호위대를 상대할 놈들만 두고 나머지 전부가 우릴 쫓아온 거겠지.”

과연, 나머지는 준비해 두었던 말을 타고 쫓아왔다 이건가.

아무리 힘이 좋은 말들이라도 8명은 충분히 탈 수 있는 대형 마차를 끌고 있다.

그에 비해 추격자들의 말은 사람 하나만을 태우고 있다.

추적자들을 태운 말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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