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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83화 (83/150)

083화 - 두 번째 임무

분위기를 잔뜩 긴장시켰던 황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황궁 내의 소소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부분 황궁을 출입하는 자들의 염문설과 같은 것들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연애 이야기를 애써 웃으며 들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황녀가 일어서자 나와 바이엔도 황급히 일어났다.

“가시는 길은 소인이 모시겠사옵니다.”

“아뇨, 괜찮아요. 저를 수행해 줄 사람들은 충분하니까요.”

바이엔의 배웅을 황녀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 그럼 살펴 가시옵소서.

왔을 때처럼 시녀들과 근위기사들을 이끌고 나서는 황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황녀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바이엔이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황녀님과는 크라우드에서 알게 된 사인가?”

나와 황녀가 오늘 처음 만나는 게 아님을 눈치챈 바이엔은 황녀가 크라우드에 사절로 갔던 것을 떠올린 모양이다.

“그렇죠. 사절로 오셨을 때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보다 한참이나 전에 하이넨에서 만났었지만.

굳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로잡아 줄 필요는 없겠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황녀님이 여기 오신 이유를 아나?”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황녀 때문에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고.

내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바이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언짢아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괜한 불똥이 튀는 건 사양이라고.”

뜬금없이 황제가 언짢아하는 것을 걱정하는 말에 의아해졌다.

“황제께서 언짢아하신다니요?”

내가 영문을 몰라 하며 묻자 바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의 사정을 잘 모르는 당신이라면 모르는 것도 당연하겠지. 폐하께선 황녀님이 대외 활동을 하시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신다.”

으음, 어쩐지. 그래서 크라우드의 사절단이 방문했을 때 황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었던 거로군.

“어째서죠?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황녀께서 사람들 앞에 나서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텐데요.”

“존귀하신 분의 깊으신 생각을 내가 어찌 알겠나.”

투덜거리듯 말한 그녀는 찻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바이엔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자 나는 남아 있는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황녀도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뭔지 전혀 모르겠네.

* * *

며칠 후.

티타임도 아닌데 바이엔이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방에 들어왔다.

물론 노크를 하지도 않았다.

으음, 바이엔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건데.

“또 무슨 일이에요?”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내가 불안해하며 쳐다보자 그녀는 다짜고짜 뭔가를 내밀었다.

“이건…….”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화려한 인장이 찍혀 있는 두루마리.

드라이어드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라던 첫 번째 임무 때와 같은 두루마리였다.

그녀에게서 두루마리를 건네받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두루마리를 펼쳐보았다.

…뭐야, 이거.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나는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무지카 성으로 오는 파이썬 왕국의 선물을 황궁까지 안전하게 호송하도록. 시급한 일이니 지체하지 마라.]

이게 뭐야.

지난번 명령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네.

파이썬에서 보내는 것이 뭔지, 언제쯤 오는지도 알려주지 않는 거냐.

“무지카 성은 어딥니까?”

“파이썬 왕국과의 국경에 위치한 성이다.”

“그래서 언제 출발하랍니까?”

사람을 이리저리 굴려대는 황제니 보나 마나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라고 했겠지.

“지금 당장 준비해. 오늘 내로 출발한다.”

“…네?”

황제는 내 생각보다도 짜증 나는 자식이었다.

적어도 마법 주머니 덕분에 따로 짐을 챙길 필요는 없는 게 다행인가.

* * *

대륙력 757년 6월 17일.

쉴 틈도 없이 게이트를 경유한 끝에 무지카 성에 도착했다.

“우윽.”

연속으로 텔레포트를 한 덕에 멀미로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벽에 손을 짚고 있던 나의 등을 바이엔이 두드렸다.

“죽지는 마라. 고작 멀미 때문에 보호 대상이 죽었다는 시말서를 쓰긴 싫으니까.”

젠장! 조금은 걱정해 줘도 되잖아!

심호흡을 몇 번 하자 울렁거리던 속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선물은 오늘 아침 일찍 도착했다고 합니다. 가시죠.”

호위대원의 말에 우리는 건물을 나와 마차를 구해 타고 성주가 머무는 무지카 내성으로 향했다.

도착하여 바이엔이 신분을 밝히자 미리 언질이 되어 있었는지 입구에 서 있던 경비병은 우리를 순순히 들여보내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집사라고 자신을 밝힌 노인이 우리를 어느 방으로 안내했다.

방문 앞까지 따라온 호위대원들은 복도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들어가시죠.”

집사가 문을 열어주자 나와 바이엔이 안으로 들어갔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무지카 성의 성주인 밀리아스 오웬 백작일세. 누가 라엘 드리안 자작이신가?”

방 안에 서 있던 딱 봐도 무관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자신을 밝혔다.

“제가 라엘 드리안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하며 나는 방 안을 살폈다.

안에는 성주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까, 허리까지 오는 연한 갈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차림에다 그에 걸맞은 아름다운 외모다.

그런데 성주가 서 있는데 여자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꽤 지체 높은 신분인 듯하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이번 일을 수행 중인 바이엔 라터스 자작입니다. 앉아계신 레이디께서 파이썬 왕국에서 오신 분입니까?”

바이엔이 여자를 조심히 살펴보며 성주에게 물었다.

내게 들어오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지만 바이엔에게 들은 대로라면 파이썬에서 황제에게 선물을 보낸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단 거다.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일부러 감추고 있다는 것이겠지.

뭔지는 몰라도 선물을 가지고 온 여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지.

“아아, 그러하네. 이분이 파이썬 왕국의 둘째 공주이신 모니카 파이썬 님이시네.”

고, 공주라고?

어째서 공주가 직접 온 거지?

예상조차 못 했던 일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귀하신 분께 인사 올립니다.”

바이엔조차 그것은 알지 못했는지 당황하며 예를 취했고, 나도 황급히 그녀를 따라 했다.

우리의 모습에 공주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저를 하이넨까지 데려다주실 분들이라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하이넨까지 간다고 하는 것을 보니 공주가 선물의 운반자인 모양이다.

대체 그 선물이라는 게 뭐기에 일국의 공주가 직접 운반하는 거지?

궁금한 것은 바이엔도 마찬가지였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파이썬에서 보내온 선물을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바이엔의 말에 성주는 당황한 표정이 되고 공주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바로 그 선물이랍니다.”

담담하게 내뱉는 그녀의 말에 나와 바이엔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선물이란 게 물건이 아니라 공주 본인이었어?!

사람을 물건 취급 하다니, 황제는 정말이지 질이 나쁘다.

공주를 선물로 바친다는 것은… 정략결혼이라는 건가?

바이엔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자 공주가 애써 웃었다.

“괜찮아요. 제 처지는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미 체념하고 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바이엔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죄했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현재의 신분도 신분이지만 황제와의 정략결혼 대상이라는 건 황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이미 황후가 있는 이상 황후는 될 수 없겠지만.

바이엔이 눈치를 살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싱긋 웃어 보이는 공주의 말에 바이엔은 여전히 굳은 채로 대답했다.

“소인에게 베푸신 공주님의 자비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성격이 개차반이나 다름없는 어딘가의 황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마음씨가 고우신 공주님이로군.

이런 공주님이 그런 놈이랑 혼인한다니, 정치라는 건 정말이지 역겹네.

속으로 혀를 차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떠올리고 고민에 잠겼다.

황제의 혼인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본래라면 그 상대를 성대하게 맞이하고, 그 일이 사방에 알려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 이야기도 없이 조용히 입국하여 소수의 인원으로 호위하게 한다는 것은…….

<황제와 혼인하는 것이 아니거나, 황제와 모니카 공주의 혼인을 원치 않는 자들이 있다는 거겠지.>

내가 생각하던 것을 카이서스가 대신 말해주었다.

‘어쩌면 단순한 호송 임무가 아닐 것 같은데.’

물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사람인 데다 심지어 타국의 공주라니.

어쩐지 불안해지는군.

잠시 후, 피곤하다는 공주의 말에 우리는 성주와 함께 물러났다.

무지카에 오느라 피곤했던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기에 하룻밤을 쉬기로 했다.

* * *

다음 날 아침, 떠날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기 위해 내성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서, 성주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갑자기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 기사의 모습에 우리를 배웅하려던 성주가 눈을 찌푸렸다.

“손님들을 앞에 두고서 이게 무슨 소란이냐!”

황제의 반려가 될지도 모르는 공주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일까 봐 화가 난 모양이다.

성주의 반응에 기사는 눈치를 살피면서도 황급히 다가가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뭣이?!”

무슨 소식을 들은 건지는 몰라도 성주의 얼굴이 기사와 같은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심각한 얼굴로 우리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아하니 우리와도 관련 있는 일인 모양이다.

바이엔이 일행을 대신하여 묻자 성주는 침음을 흘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으음, 그것이… 조금 전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는 건물에 폭발이 일어났다 하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바이엔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드넓은 제국에서 빠른 여행을 하려면 텔레포트 게이트가 필수다.

애초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경유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기에 호위의 숫자도 많지 않았던 거다.

만약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지 못한다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일단은 출발을 잠시 미루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전을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무슨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공주를 그곳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까.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성주의 모습에 모니카 공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도록 할게요.”

파이썬에서부터 함께 왔다는 시녀와 함께 공주가 안으로 들어갔다.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그대들도 안에서 쉬고 있으시게.”

갑작스러운 사태에 서둘러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성주가 우리에게도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앞으로 나섰다.

“저도 현장에 가보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손님인 내가 폭발이 일어난 곳에 가보겠다는 말에 성주는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건…….”

성주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황제 직속인 내가 거기 갔다가 무슨 사고라도 당하면 이곳의 책임자인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이 걱정되는 거겠지.

그 모습에 바이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해주었다.

“허락해 주시지요.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망설이는 성주의 모습에 바이엔이 재차 말했다.

“일정이 늦어진다면 황제 폐하께서 언짢아하실지 모릅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는 어쩔 수 없었는지 성주가 주변에 있던 수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손님들을 현장으로 안내해라.”

“예!”

타고 갈 예정이었던 마차를 타고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당신에겐 승마를 가르쳐 두는 게 좋겠어.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계속 마차를 탈 수도 없으니 말이야.”

함께 탄 바이엔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사건 현장으로 이동했다.

도착하니 갑작스러운 폭발 때문에 몰려든 사람들이 게이트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다.

현장을 보존하고 있던 병사들이 마차를 호위하는 성주의 기사들을 확인하곤 길을 열어주었다.

직접 와서 보니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불은 껐지만 건물은 이미 폭발과 화재로 폭삭 무너져 있었다.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게이트가 복구하기 어려울 만큼 파괴되었다고 한다.

게이트가 파괴되었다는 걸 듣자마자 바이엔이 짜증을 내며 혀를 차는 것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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