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 황녀가 또
저건 뭐지? 하고 의아해하는 사이 그녀가 마개를 땄다.
“윽! 냄새! 뭡니까 이건!”
마개를 따자마자 퍼져 나오는 지린내에 급히 코를 감싸 쥐며 소리쳤다.
코를 막은 탓에 감기가 걸린 사람처럼 코맹맹이 소리가 나왔다.
“흠, 역시 이것의 냄새도 맡을 수 있는 모양이군.”
역한 지린내에 내가 얼굴을 잔뜩 찡그린 것에 비해 바이엔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그보다 티타임에 그런 냄새를 풍기다니, 무슨 생각이에요?”
“무슨 냄새 말이지?”
“그 병에서 나는 지린내 말이에요!”
“흐음, 지린내라… 그렇군, 하지만 괜찮다. 난 이것의 냄새를 맡을 수 없거든.”
“전 괜찮지 않……!”
바이엔의 말에 버럭 화를 내려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지린내를 맡지 못한다고?
<호오, 샌드맨의 눈물인가?>
“샌드맨의 눈물?”
병 안에 든 내용물이 뭔지 알아낸 카이서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알아차렸나?”
바이엔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병의 마개를 닫았다.
샌드맨의 눈물은 내가 알기로는 무색 무미 무취로 알려진 수면제다.
투명하고 맛과 냄새가 없는 특성 때문에 주로 나쁜 놈들이 나쁜 짓을 할 때 쓰인다고 들었는데.
내가 긴장하며 쳐다보자 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긴장하지 마. 네게 먹이려는 건 아니니까. 그저 실험을 해본 것뿐이야.”
“실험이라니요?”
실험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샌드맨의 눈물 냄새를 맡을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무취로 유명한 샌드맨의 눈물 냄새를 맡는 실험이라니.
…그런데 나는 어떻게 샌드맨의 눈물에서 역한 지린내를 맡은 거지?
<사실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종류의 냄새일 뿐 샌드맨의 눈물은 냄새가 꽤 독하거든.>
카이서스의 설명에 이어 어느새 품에서 꺼낸 수첩에 뭔가를 적던 바이엔이 비슷한 말을 했다.
“샌드맨의 눈물에서 나는 냄새를 맡지 못하는 건 인간을 포함한 아인종들뿐이야.”
인간은 물론이고 엘프, 드워프, 수인과 같은 아인종도 샌드맨의 눈물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그 말은…….
바이엔이 수첩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인간이라면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하는 게 정상인데… 대체 정체가 뭐야?”
의심이 가득한 시선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나에게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정말로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이 아닌 존재냐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말을 흐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가호하는 드래곤으로 인해 감각이 예민해졌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변함없습니다.”
<거짓말도 잘하는구나.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인간이 아니게 되어가고 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나의 대답에 카이서스가 비웃듯이 말했다.
‘내 몸이 어떻게 변해간다 해도, 내 근본이 인간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그게 편하면 그렇게 생각하든가.>
별 관심 없다는 듯 대답하는 카이서스의 말은 무시하며 바이엔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듯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확인한 방법이 없으니 그건 넘어가기로 하고… 그보다 당신도 꽤 힘들겠어.”
뜬금없이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는 바이엔의 시선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힘들겠단 거죠?”
“후각이 너무 좋으면 맡기 싫은 냄새들도 맡게 되지 않나. 예를 들어 보통 사람들은 맡지도 못하는 것이 악취가 되어 괴롭힌다거나.”
확실히 옅은 냄새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지금의 나라면 조금의 악취에도 엄청 고통스럽게 느껴지겠지.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적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속으로 의아해하는 나에게 카이서스가 설명해 주었다.
<그건 네가 평범한 인간일 때의 감각에 맞추기 때문이지. 한마디로 외부의 자극을 선별하고, 조절해서 받아들인다는 거다.>
으음, 쉽게 말해서 본능적으로 내게 맞춘다는 거네.
즉 나 스스로가 조절하지 못한다는 거다.
말 그대로 이성이 아니라 본능으로 조절하는 거니까.
바이엘의 피 냄새나 샌드맨의 눈물 냄새를 맡은 것도 반쯤은 우연이라는 거다.
마법 수련도 중요하지만 예민해진 감각을 내 의지대로 써먹을 수 있도록 연습해야겠어.
이곳은 적진이나 다름없는 제국의 심장.
일단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는 칭호가 있는 데다 황제가 직접 부리는 자이니 나를 죽이려 드는 자들은 거의 없겠지만… 어디에든 막 나가는 자들은 있으니까.
황제의 측근이라는 루리스까지 암살하려는 자들이 있는데 적국 사람인 데다 위협적인 나를 죽이려 들 사람이 없다곤 말 못 하지.
예민해진 감각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다면 암살에 대한 걱정을 덜어도 될 거다.
게다가 예민해진 감각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남들에겐 그저 스친 정도의 상처에도 견디지 못할 정도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으니 말이야.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느라 한참이 지나도록 말이 없자 바이엔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이봐, 왜 아무런 말이……”
똑똑-
침묵에 대해 바이엔이 화를 내는 도중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나예요.”
들어본 목소리기는 한데… 나라고 하면 누군지 어떻게 알아?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억?!”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시녀들과 호위들을 이끌고 온 카리야 황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라엘.”
“화, 황녀님?! 이곳까지 어쩐 일로 오셨나이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있는 나를 대신해 바이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물었다.
나도 황급히 무릎을 꿇으려는 것을 황녀가 말렸다.
“너무 예를 차릴 필욘 없어요. 그냥 놀러 온 것일 뿐이니까.”
“오실 줄 알았더라면 직접 나가서 모셨을 것을, 죄송할 따름이옵니다.”
눈치를 살피며 일어난 바이엔이 조심스레 말하자 황녀는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후훗, 조금 놀라게 해줄까 싶어서요. 일부러 두 분께는 제가 온다는 것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어쩐지, 호위대들이 조용하더라니.
황녀 정도의 인물이 나타나면 나를 감시하고 보호하는 자들이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이야.
말도 없이 찾아오는 것은 물론 알리지도 못하게 하는 것은 무척이나 무례한 일이지만 그녀는 황족.
제국에서 가장 높은 혈통이다 보니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요즘 두 분이서 매일 티타임을 가지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차나 얻어 마실까 해서 왔답니다.”
그 말에 나는 가볍게 움찔했다.
별궁에서 나가지 않는 우리의 티타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나를 감시하는 자들 중에 황녀의 손이 닿은 자가 있다는 것.
“안 될까요?”
고개를 살짝 모로 꼬며 묻는 그녀의 말에 나와 바이엔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영광이옵니다.”
바이엔의 당혹해 하는 목소리에 황녀는 웃으며 걸어와 빈자리 중 하나에 앉았다.
“두 분도 앉아요.”
시녀가 잔을 가져올 동안 나와 바이엔은 시선을 교환했다.
대충 ‘황녀가 왜 여기 온 거야?’, ‘나도 몰라요!’라는 시선 교환이었다.
“그런데 두 분은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나요?”
“그게…….”
내 감각이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었다는 것은 되도록이면 숨기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적진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써먹을 수 있을 만한 것은 숨기고 있는 편이 나으니까.
하지만.
“라엘 자작의 후각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중이었사옵니다.”
역시, 바이엔이 그렇게 해줄 리가 없지.
어차피 바이엔은 나의 어마어마한 후각에 대해서 보고할 터, 숨기지도 못하겠지.
“후각이요?”
“예. 남들보다도 훨씬 예민한 것은 물론이고 인간이라면 맡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샌드맨의 눈물 냄새까지 맡았사옵니다.”
“호오, 그런가요?”
바이엔의 설명에 황녀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드래곤의 가호 덕분입니다.”
결국 감추기를 포기한 나는 한숨 쉬듯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드래곤의 가호라는 것은 정말 대단하군요. 보통 사람들은 맡지 못하는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다니…….”
황녀가 뭔가를 생각하는 사이 시녀가 찻잔을 가져왔다.
“고마워요.”
시녀가 가져온 찻잔을 건네받은 황녀에게 바이엔이 차를 따라주었다.
“저희들이 마시는 차가 입에 맞으실지…….”
황궁의 것이기에 우리에게 지급되는 찻잎도 꽤나 고급품이다.
그래도 고귀한 황녀가 마시는 것에 비하면 한참이나 수준이 떨어지겠지.
“후후, 가끔은 괜찮아요. 그리고 원래 차라는 건 함께 마시는 이와 분위기에 따라 맛이 달라진답니다.”
맞는 말이다.
나도 지난번 만찬회 때 너무 불편한 나머지 음식의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었으니까.
황제가 먹는 음식들이니 분명 제국 최고의 요리사가 만든 것이었을 텐데 말이야.
그때 고오급 음식의 맛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라엘 자작은 이곳에서 지내며 불편한 것은 없나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는 황녀의 모습에 나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네. 다들 잘 대해주는 덕분에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은 방까지 감시하는 탓에 사생활이 침범당해서 무지 짜증 나지만.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기엔 ‘눈치껏 말해라’라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바이엔이 신경 쓰였다.
분명 사실대로 말했다간 황녀가 돌아간 후 바이엔이 잔뜩 짜증을 내며 ‘본 호위대장은 당신에게 실망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잔소리를 해대겠지.
조직에서 중간 계급이 가장 불편해하는 것이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불편 사항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거니까.
물론 내가 하급자라는 건 아니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이곳에서 나는 손님이 아닌 황제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일종의 볼모니까.
진실도 장소와 때를 가려서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아, 알렉스는 기억하나요?”
뒤를 슬쩍 돌아보는 황녀의 말에 나는 그제야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딱딱한 인상의 사내를 발견했다.
카리야 황녀를 처음 만났던 식당에서 그녀를 호위했던 황실 근위기사단원이었다.
“아… 오랜만입니다.”
내가 멋쩍게 인사를 건넸음에도 그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숙여 보일 뿐이었다.
나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은 없는 것 같아 보이는군.
사실 볼모인 나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해주는 황녀가 이상한 거지.
“그래도 이곳에만 갇혀 지내는 건 답답하지 않나요? 저도 황궁을 나가질 못해서 무척이나 답답한데 말이에요.”
황녀는 아쉬워하는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황녀를 처음 만났던 것은 황궁 밖, 하이넨 외곽의 허름한 식당 안이었지.
정체를 숨기고 은둔하던 시절의 그녀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좋은 식당을 찾아내는 것이 취미라고 했었지.
그런데 나와 대스승님을 만났던 날 어떤 명문가의 망나니 때문에 신분을 밝혔다.
그 이후로 황궁을 쉽게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황녀도 꽤나 괴롭겠군.
“속상하시겠습니다.”
“그래도 황실 여인치고는 지금까지 많이 외출했었으니까요.”
만족하고 있다는 뜻으로 내뱉은 말이겠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렇습니까.”
어차피 내가 간섭할 수 있는 것은 없기에 고개만 끄덕이며 황녀의 잡담에 어울려 주었다.
“듣자 하니 얼마 전에 황제 폐하의 명을 해결하셨다면서요.”
그거라면 드라이어스의 일을 말하는 건가.
그건 분명 황제가 정식으로 공포하지 않은 일이기에 브로발렌 영지의 사람들이나 관련자가 아니라면 모를 터였다.
제국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브로발렌에서 하이넨까지 벌써 소문이 퍼졌을 리는 없고…….
“황녀님도 꽤 귀가 밝으신 모양입니다.”
황녀에게 정보를 물어다 주는 조직이 있다는 거로군.
그런 의미를 담아 내뱉은 말에 바이엔도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황제의 하나뿐인 동생인 그녀가 정보 조직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난감한 일이니까.
게다가 티타임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으로 보아 이 별궁에도 황녀의 입김이 닿은 자가 있다.
황제, 제국이 황녀에게 바라는 것은 얌전히 지내다가 정략결혼으로써 정치의 도구가 되는 것.
그런 황녀가 정보 조직에 손을 대는 것은 안 좋게 보일 수도 있다.
“크라우드에 다녀왔을 때 좋은 것들을 많이 먹었더니 귀가 밝아진 모양이에요.”
크라우드에 사절로서 다녀온 이후에 정보 조직에 손을 댔다는 건가.
황제가 칼라마쉬의 서로 뭔가를 하려 한단 것을 나를 통해 알게 된 이후 황녀도 뭔가를 준비한다는 거다.
그걸 나에게 털어놓는 건 상관없지만… 여기엔 황제의 명을 따르는 바이엔도 있는데.
나와 바이엔이 긴장하는 것을 뻔히 알 텐데도 황녀는 느긋하게 차를 음미했다.
나와 바이엔은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라 눈치를 살폈다.
그런 우리를 보며 황녀는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