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 티타임
브로발렌에서 황궁으로 돌아온 지도 2주째, 툼스톤 기사단을 방해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없다.
아마도 드래곤이 얽힌 일이다 보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 거겠지.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하는 것이라고는 수련밖에 없었다.
명령이 없는 동안은 밖으로 나갈 일도 딱히 없었으니까.
몇 시간동안 수련을 하느라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목이 말랐다.
“없네.”
테이블에 올려놨던 물병을 흔들었지만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물병을 들고는 방을 나섰다.
내가 방을 나서자마자 곳곳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감시에는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꽤나 갑갑했기에 물 떠 오기와 같은 자잘한 일은 내가 직접 하는 편이었다.
주방의 물통에서 물을 뜨고 방으로 돌아오던 중 바이엔과 마주쳤다.
그는 어째선지 평소와는 달리 무척 짜증이 나 있는 모습이었다.
“꽤 태평해 보이는군.”
시비를 거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덕분에요. 그러는 바이엔 씨는 할 일 없어요?”
짜증을 받아줄 이유는 없었기에 일이나 하러 가란 식으로 말하자 그는 이를 갈았다.
“담당하고 있던 사건들에서도 모두 손 떼고, 좌천당한 덕분에 무척이나 한가해졌지.”
나를 원망하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 호위로서의 일은 맘에 안 드나 봐요?”
“번갈아가면서 어떤 방구석 폐인을 온종일 감시하고, 영양가 없는 관찰 일지를 작성하는 게 마음에 들겠나?”
방구석 폐인이라니 말이 심하잖아.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물병을 채우러 방을 나온다고!
그보다 방에 틀어박혀 있는데도 감시한다는 건… 역시 몰래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건가.
어쩐지 방에 있을 때 커튼을 쳤음에도 시선이 느껴지더라니.
“그래도 일에 치여 사는 것보다는 여유로운 것이 낫죠.”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나태한 것이다.”
나름대로 생각해서 한 말인데도 그는 잔뜩 날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갑자기 좌천까지 당하고 자신이 생각하기엔 일 같지도 않은 일을 하게 된 것이 무척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긴 한데.
지금까지 냉랭한 모습을 보이던 그가 짜증을 잔뜩 내니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이러나저러나 1년에 가까운 시간을 붙어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지금처럼 데면데면한 관계로 지내도 상관은 없지만 어느 정도는 친해지는 것이 편하겠지.
그렇게 판단하곤 주저 없이 말했다.
“바쁘지 않으면 제 방에서 이야기나 좀 할까요.”
“바쁘다.”
“좀 전에 본인 입으로 한가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는 조금 전의 자신을 원망이라도 하듯 가볍게 혀를 차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대상을 파악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싫은 기색이 역력하다.
나와 함께 지내는 동안 약점이라든가 정보가 될 만한 것을 캐내려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기에 그런 거겠지.
호위대의 대장으로 전문가가 아닌 사법관 출신의 그를 붙인 이유도 그것 때문일 거다.
아무래도 각종 사건들을 수사하며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본 경험으로 나에 대해서 파악하기가 쉬울 테니까.
“누가 방으로 차와 간단한 먹을 것을 가져다줘.”
바이엔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한 말에 복도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아오, 깜짝이야! 대낮부터 유령이 나온 줄 알았네!
바이엔의 말에 나타난 여성은 호위대원 중 한 명이었다.
온종일 감시하느라 내 주변에 숨어 있는 모양이다.
“금방 가져가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한 호위대원이 발소리도 내지 않고 멀어져 갔다.
특무대의 사람들은 다 저런 건가?
약간 오싹한 기분을 느끼는 사이 바이엔이 귀찮아하며 말했다.
“그럼 방으로 가지.”
방으로 들어온 바이엔은 앉으란 말도 안 했는데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뭐지?”
앉자마자 물어오는 바이엔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날씨가 참 좋죠?”
일단은 이야기나 해보자고 생각은 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터였다.
뜬금없는 날씨 이야기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바이엔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설마 그런 쓸데없는 소리나 하자고 나를 데려온 건 아니겠지?”
“음, 그게 그러니까… 어디 다치셨나요?”
“갑자기 무슨 헛소리지?”
갑자기 이야기를 나누자고 불러내 놓고는 뜬금없이 다쳤냐고 물어보는 내 행동에 바이엔은 더욱 짜증이 치미는 듯했다.
“그게, 피 냄새가 나서요.”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 바이엔과 만난 후부터 옅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피 냄새는 맞은편에 앉은 바이엔에게서 나고 있었다.
“뭐?”
내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바이엔이 흠칫거렸다.
카이서스의 심장으로 인해 예민해진 후각이 아니었다면 맡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뭔가 내가 아는 피 냄새와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카이서스가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쯧쯧, 생리 중이라서 그런 것 아니냐. 이럴 땐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게 매너다.>
응? 생리라고?
내가 맡은 피 냄새와 비슷하면서도 불쾌한 그 냄새는 생리혈의 냄새였던 모양이다.
아아, 어쩐지 아까부터 평소와는 달리 계속 짜증을… 어? 잠깐만.
생리라는 건 남자는 겪지 않는 여자들만의 고통이라고 알고 있다.
생리를 하고 있다는 건…….
“바이엔 씨 여자였어요?!”
내가 깜짝 놀라 내뱉은 말에 바이엔의 표정이 잔뜩 굳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무, 무슨 소리지?”
너무 당황해서인지, 아니면 애초에 연기에 재능이 없는 건지는 몰라도 얼굴에 다 드러났다.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묻는 그, 아니, 그녀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다.
“그게…….”
음,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남들보다 후각이 훨씬 좋아서 생리혈 냄새를 맡았다’라고 하면 뭔가 변태 자식 같잖아.
내가 말을 흐리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하던 중이었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조금 전에 바이엔이 차를 부탁했던 호위대원이 차와 다과가 담긴 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입을 앙다문 채 나를 노려보는 바이엔과 눈치를 살피는 나를 호위대원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호위대원은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호위대원이 방을 나가자마자 바이엔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방으로 자리를 옮기지.”
감시당하고 있는 방 안에서 자세한 것을 이야기하는 건 싫은 모양이다.
나는 쟁반을 들며 일어났다.
“가시죠.”
문을 열고 나간 바이엔은 바로 옆의 방문을 열었다.
내 옆방은 바이엔이 쓰는 방이었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맞은편의 의자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탁자에 차와 다과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설마하니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나를 속이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가호를 받은 후부터 감각이 남들보다 예민해져서요.”
“그런가, 보고할 것이 늘었군.”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헝클어뜨리던 바이엔이 찻주전자의 내용물을 두 개의 잔에 따랐다.
‘너는 언제부터 바이엔의 성별을 알고 있었던 거야?’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생리라고 말한 것을 보아 카이서스는 이전부터 바이엔이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거야 처음 봤을 때부터지. 아무리 잘 숨겨봐야 이 몸을 속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 건 좀 일찍 알려달라고!’
<그런 걸 알아봐야 쓸모도 없지 않느냐.>
뭐,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저기… 어째서 성별을 속인 건가요?”
내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묻자 그녀는 눈을 찡그렸다.
“속이지는 않았다.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게 그거 아닌가?
남자처럼 차려입고 행동해 놓고 속인 것이 아니라니.
물론 남자 행세를 하는 게 죄는 아니지만 말이야.
내가 말없이 대답을 기다리며 쳐다보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법관은 온갖 범죄자들을 상대하는 자리다 보니 얕보이지 않기 위해 남자 행세를 했을 뿐이야. 그리고 남자로 있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기도 하고.”
확실히 여자를 얕보는 사람들이 많고 사법관이라는 직업이 위험한 자들을 상대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사법관을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지금은 강등되었지만 젊은 나이에 3급 사법관이 되었을 정도면 다른 일을 했어도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고 출세할 수 있었을 텐데.
타고난 성별을 감추면서까지 이 일을 하는 건 무슨 이유가 있을 거다.
내 물음에 그녀는 따라놓았던 차로 입을 적시고는 차갑게 말했다.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다.”
뭐, 그렇겠지.
친하지도 않은 데다 잠시 임대되었을 뿐, 원래는 적국의 사람인 내게 자신의 사정을 순순히 털어놓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여자라는 게 알려지면 곤란해지겠네요.”
불쾌감에 바이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성별에 관한 건 이미 상부에서도 알고 있다. 이걸 빌미로 뭔가를 꾸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목소리를 낮게 깔며 위협하듯 내뱉은 그녀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 눈을 찡그렸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 말은 바이엔 씨의 성별을 아는 사람은 소수라는 거겠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본래 업무로 복귀했을 때 여러모로 귀찮을 텐데요.”
내 목소리가 음흉하게 들렸는지 바이엔이 불쾌해했다.
“어차피 제국에서 지내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제한되어 있을 텐데? 그리고 당신을 가호하는 드래곤의 명예를 더럽힐 셈인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라면 남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아쉽게도 드래곤은 인간 기준의 명예는 신경도 쓰지 않아요.”
‘거기다가 엄청나게 제멋대로에 고집 세고, 욕심도 많지.’
속으로 추가 설명을 덧붙이자 카이서스가 투덜거렸다.
<얀마, 다른 녀석들이 네 생각을 읽는다면 잔뜩 화낼 거다.>
‘그렇지만 사실이잖아.’
<너도 멍청하단 소리를 들으면 화내지 않느냐?>
‘아니, 이거랑 그건 다르지! 게다가 난 멍청하지 않다고!’
<아니거든! 멍청하거든!>
내가 속으로 카이서스와 싸우거나 말거나 바이엔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관없다. 난 그런 협박 따위에는 굴하지 않아.”
굽히느니 부러지겠다는 듯한 반응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를 완전히 적으로 보고 있네.
“일단은 말이라도 들어보는 건 어때요? 불법적이거나 부담 가는 일을 부탁하진 않을게요.”
이쪽에서 조금 굽히고 들어가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적대심을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뭐지?”
역시 아무리 강한 척해도 여자라는 게 알려지면 곤란한 거겠지.
“하루에 한 번, 저랑 티타임을 가져줬으면 합니다.”
“티타임이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경계를 완전히 누그러뜨리지는 않고 있었다.
“혼자 타지에서 지내자니 꽤나 쓸쓸해서요.”
물론 혼자서 지내는 게 쓸쓸하다는 건 거짓말.
수개월간 혼자 수련만 하며 지낸 적도 있고, 대화 상대라면 머릿속의 카이서스도 있으니까.
단순한 말동무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건가?”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인 그녀의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좋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오늘은 좀 피곤하니 돌아가 줬으면 좋겠어.”
“그러죠. 괜찮아지면 말해줘요.”
그녀는 여러모로 골치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짚으며 나를 내쫓았다.
살짝 찡그린 그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생리통 때문에 힘든 모양이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 * *
며칠 후, 생리가 끝난 바이엔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차와 다과를 가지고 내 방을 찾아왔다.
그날부터 우리의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내 방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한다.
그것이 나와 그녀가 정한 규칙.
내 방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은 서로 알고 있기에 심각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소소한 잡담이나 나누는 것이 다지만.
‘이제 슬슬 바이엔이 올 시간인가…’라고 생각하며 문 너머로 귀를 기울이자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간다.”
문을 두드린 바이엔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차와 다과가 담긴 쟁반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은 그녀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갑자기 또 왜 저런대?
티타임 때마다 도중에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어색한 침묵이 감돌긴 했지만 오자마자 이러는 건 처음이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너무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내가 멋쩍게 웃어 보이자 그녀는 조용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찰랑이는 액체가 들어 있는 반투명한 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