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 도움!
드라이어스를 향해 기사들이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빌어먹게 커다란 뱀 같으니. 네가 지키려던 새끼들도 저세상으로 뒤따라 보내줄 테니 순순히 뒈져라.”
대검을 겨눈 채 다가오는 데히른을 드라이어스가 노려보았으나 위협은 되지 않았다.
살기로 가득 찬 드라이어스의 눈은 점점 흐려져 가고 있었다.
제길! 7서클이면 뭐 해, 드래곤의 가호를 받으면 뭐 하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건가.
무력감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저것들을 도와주고 싶은 게냐?>
잠자코 있던 카이서스가 갑자기 물어왔다.
‘응.’
<오늘 처음 보는 데다가 동족도 아니잖느냐.>
‘그래도 불쌍하잖아.’
<하여간, 정말이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니까.>
‘그보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도와줄 방법이 있다는 거지?!’
말투에서 방법이 있음을 눈치챈 내가 묻자 카이서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꼴도 보기 싫기는 하지만 그 녀석을 부르는 수밖에 없겠군.>
‘뭐? 이 상황에서 누굴 부른다는 거야?!’
내 물음에 카이서스는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쥬리엘의 조각상을 주겠다’라고 말해.>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개소리야?!’
<시끄러!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강압적인 카이서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쥬, 쥬리엘의 조각상을 주겠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립니까?”
나를 제압하고 있던 호위대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어왔다.
나도 몰라!
“그 약속, 꼭 지키는 거다?”
갑자기 머리맡에서 들려온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들어보았다.
푸른 머리칼의 사내는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카, 카락스 님?!”
내가 얼떨떨해하며 묻자 그는 피식 웃어 보였다.
뭐라고 묻기도 전에 나를 제압하고 있던 호위대원이 움직였다.
나를 번쩍 들어 올린 그가 뒤로 훌쩍 뛰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거죠?”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한 호위대원이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아무리 거리를 벌려봐야 카락스를 상대로는 있으나 마나 한 거리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린 카락스가 드라이어스를 공격하는 기사단을 슬쩍 쳐다보았다.
“일단은 전부 대가리 박아라.”
그의 목소리와 함께 뭔가가 퍼져 나갔다.
“커헉!”
“윽!”
“흐억!”
최후의 발악을 하던 드라이어스도, 그 드라이어스의 숨통을 끊으려던 기사단도 그리고 호위대원들도.
모두가 순식간에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해머로 드라이어스의 머리를 후려치기 위해 점프했던 기사 하나는 허공에서 몸이 굳어버려 그대로 땅에 떨어지기도 했다.
지난번에 카락스와 처음 만났을 때 겪었던 드래곤 피어.
기세만으로 모두를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다니 다시 봐도 놀랍다.
다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알을 굴렸다.
“대체… 뭡니까.”
엎드려 있던 데히른이 힘겹게 입을 열어 소리쳤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압감에 안하무인인 데히른조차 존댓말이 절로 나왔다.
“호오, 이 상황에서 말을 할 수 있다니? 인간 주제에 제법이구나.”
카락스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피어의 강도를 조금 더 높였다.
그러자 다들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만 흘렸다.
공포로 인해 힘이 빠져 버린 것은 나를 제압하고 있던 호위대원도 마찬가지였다.
제압하고 있던 호위대원의 손에서 풀려나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내 몸의 절반은 드래곤이나 다름없기에 피어의 효과는 적으니까.
“오랜만입니다, 위대하신 블루 드래곤 카락스 님.”
“크크, 오랜만이구나, 반푼이.”
일부러 카락스의 정체에 대해 알리기 위해 블루 드래곤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엥?! 나는 함부로 부르면서 왜 저놈에게는 위대하다고 하는 게냐!>
‘그야 카락스는 당장에라도 날 죽일 수 있지만 넌 날 못 죽이잖아.’
<쳇!>
드래곤이라는 말에 모두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제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험악한 기사단이라 해도 드래곤은 두려운 모양이었다.
잔뜩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카락스는 피식 웃으며 드라이어스를 쳐다보았다.
“하등종아, 오랜만이로구나.”
카락스의 말에 드라이어스는 정신이 흐릿해져 가는 와중에도 반가워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샤아아…….
힘없는 소리였으나 안도감이 가득했다.
드라이어스의 기억에 등장했던 푸른 머리의 사내는 카락스였다.
드라이어스는 100년 전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와서 재우고, 결계까지 쳐주었던 드래곤을 알아본 것이다.
‘그런데 카락스는 어떻게 여기 나타난 거야?!’
내가 영문을 몰라 하자 카이서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아, 지난번에 저놈이 왕궁에 찾아와서 너를 축복한다고 선언했을 때 있지? 이놈이라면 그때 감시의 눈을 붙였을 거라 생각했거든.>
아아, 그래서 뭘 준다는 말에 냉큼 튀어나왔… 뭐라고?!
“카락스 님? 설마 지금까지 저를 감시하고 계셨던 겁니까?!”
“어.”
내가 경악하며 외친 말에 카락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카이서스와 감각을 공유하며 이것저것 사생활을 침해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카락스까지 나를 감시했다고?!
“아니, 제 인권은 어쩌고요?! 허락도 없이 감시를 하다니요?!”
내가 어이가 없어 소리친 말에 카락스는 귀를 후비며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아니, 뭐, 이 몸이 그딴 걸 왜 신경 써야 하지? 게다가 나름대로 내 이름까지 걸고 널 축복해 줬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하잖나. 결코 심심해서 구경하려고 한 건 아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맨 마지막 말이 진심인 것 같은뎁쇼.
도대체 드래곤이란 족속들은 양심이라든가 생각이라든가 아무튼 뭐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감시당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는데…….”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지닌 사람들도 내게서 이상한 점을 알아채지 못했는데 말이야.
“핫하, 이 몸이 맘먹고 몰래 보고자 하는데 인간 따위가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니까 몰래 감시하는 것 따위에 맘먹지 말라고.
한숨을 내쉬다 주변을 둘러보니 바닥에 엎어진 기사단과 호위대는 게거품까지 물며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어미 드라이어스는 조금 나아 보였으나 어린 드라이어스들도 조금은 힘들어 보였다.
“일단 피어부터 좀 거둬주시면 안 될까요? 이러다 다들 죽겠어요.”
“흠, 그럴까?”
무심하게 대꾸한 카락스가 피어를 거두어들이자 다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켁! 켁!”
“흐어어… 방금 강 건너에서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였어.”
아무리 어느 정도 조절한 피어라 하더라도 오래 노출되면 보통 사람들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위대한 존재시여. 무엇 때문에 여기 오신 겁니까?”
다들 죽다 살아났다는 공포에 질려 거친 숨만 몰아쉬는 와중에도 바이엔이 힘겹게 물었다.
그 물음에 카락스는 드라이어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거, 내가 기를까 하고 생각하던 녀석들이거든. 근데 잠시 한눈판 사이에 꽤나 귀여워해 준 모양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스윽 둘러보는 카락스의 무심한 시선에 드라이어스를 귀여워해 준(?) 기사단이 움찔했다.
침만 꿀꺽 삼키며 아무 말도 못 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카락스가 씩 웃어 보였다.
“뭐, 저 정도야 금방 고칠 수 있는 데다 니들도 조금은 피해를 본 것 같으니 봐줄까나.”
귀찮으니 한번 봐준다는 투의 말에 바이엔이 주저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위대하신 존재들께서는 함부로 세계에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드래곤이 지키는 세계의 법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 것을 건드리려 한다면 관여할 이유로 충분한 것 같다만?”
길러볼까 생각하는 것이 언제부터 자기 소유라는 말이 된 거지?
“하지만 저희는 황제 폐하의 명령을……”
“어이, 인간. 그 명령이랑 도시 하나 중에 뭐가 더 소중하냐. 골라봐.”
황제의 명령을 언급하던 바이엔이 카락스의 싸늘한 목소리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완전 깡패나 다름없는 행패였으나 여기서 그에게 대꾸할 정도로 깡이 센 자는 없어 보였다.
보통 목숨은 한 개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까딱하면 드래곤을 제국의 적으로 돌리는 것.
카락스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간 역적이 되는 셈이다.
다들 눈치만 보며 아무 말도 못 하자 카락스는 여유롭게 어미 드라이어스에게 다가갔다.
“흠, 꽤나 심하게 다쳤군.”
눈을 찡그리며 드라이어스를 이리저리 살피던 카락스가 말했다.
{나을지어다.}
그 말이 내뱉어짐과 동시에 드라이어스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상처들이 엄청난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뭐, 뭐지?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순식간에 치료됐어!’
그 모습에 놀라워하자 카이서스가 툴툴거렸다.
<뭘 놀라느냐? 네가 추구해야 할 경지인데. 저것이 서클 브레이크 중에서도 용언이라 불리는 것이다.>
서클 브레이크… 용언.
내가 도달해야 할 경지가 저거라는 거지.
스태프도 없이, 말 한마디만으로 보통의 마법보다 뛰어난…….
모든 상처가 나아버린 드라이어스는 놀란 듯 몸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카락스의 발치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감사를 표하는 그 몸짓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카락스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것들은 내가 데려갈 건데 불만 있나? 물론 그랬다간 갈가리 찢어줄 테지만.”
그렇게 말하는데 대꾸할 미친놈은 없었다.
“그럼 난 이만 간다. 그리고 반푼이는 약속한 물건 준비해 둬. 나중에 받으러 가마.”
할 말을 마친 카락스는 공간의 문을 열어 드라이어스들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보다 쥬리엘의 조각상은 대체 뭐기에 카락스가 곧장 튀어나온 거야?’
<예전부터 카락스 놈이 눈독 들이던 물건이다. 그리 아끼던 것은 아녔지만 놈이 기뻐하는 꼴은 보기 싫어서 창고에 처박아뒀었지!>
하여간 드래곤들의 성격이란…….
카락스가 사라지자 그제야 엎드린 채로 있던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잡은 먹잇감을 놓치다니! 네놈이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데히른이 대검의 끝을 내게 겨누며 소리쳤다.
“방해하지 않았으면 애완 몬스터를 죽였다는 이유로 드래곤이 화냈겠죠.”
내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그는 눈을 찡그리더니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젠장! 돌아갈 준비 해!”
데히른의 부하들이 죽은 자들을 수습하고, 다친 자들을 부축했다.
“전부 보고할 거다.”
호위대를 이끌고 다가온 바이엔이 한숨을 작게 내쉬며 한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문제 될 것 있습니까? 제가 받은 두루마리에는 해결하라고 했지 죽이라곤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툼스톤 기사단은 몰라도 내가 받은 두루마리에 적혀 있던 것은 그랬다.
“쯧!”
내 대답에 바이엔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 * *
드라이어스가 사라진 것을 알리기 위해 브로발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협곡을 둘러싼 숲을 지나 마차에 오르자마자 바이엔이 물었다.
“그 드래곤. 당신이 부른 거지?”
나를 제압하고 있던 호위대원의 보고를 들은 모양이다.
내가 이상한 말을 하자마자 카락스가 나타났으니 알아채는 것도 당연하겠지.
내가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차피 당신을 어떻게 할지는 윗분들의 소관이니 내 알 바는 아니지.”
그렇게 말하곤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놈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게 해줘서 고맙군.”
바이엔이 말하는 그놈은 아마 데히른이겠지.
대체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물어보고는 싶었으나 바이엔은 더 말하기 싫다는 듯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나저나 드라이어스의 감정을 알아챈 것은 그렇다 쳐도… 기억은 어떻게 읽은 거지?
문뜩 의아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이서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각성을 시작한 거지.>
‘각성이라니, 무슨 말이야?’
각성이란 말에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카이서스는 금세 이전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지금 알 필요 없다. 그것보다 너는 수련에나 신경 써라. 어느 세월에 서클 브레이커에 도달할 거냐? 나의 심장까지 먹어놓고는 말이야. 다른 놈이었으면 지금쯤……>
‘으으으, 그럴 거면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네 둥지로 끌어들이든가! 왜 나를 선택한 거야?!’
갑자기 잔소리를 해대는 카이서스의 말에 짜증이 나서 대꾸했다.
<몰라! 내가 눈이 삐었었나 보지!>
평소처럼 카이서스와 내면의 말싸움을 하느라 각성이라는 말은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