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 협곡 안으로
우리는 영주성에서 검은 괴물이 있다는 협곡으로 가는 중이다.
내가 말을 탈 줄 모르는 탓에 나와 바이엔은 마부가 모는 마차를 탔다.
나머지 호위대 10명, 그리고 툼스톤 기사단 1번대의 대장과 대원 50명은 말을 타고 이동했다.
마부를 제외한 63명만으로 그 검은 괴물을 처치할 수 있을까.
100명이 넘는 병사들이 검은 괴물의 둥지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했다고 했었는데.
<어떻게 보면 더 좋지. 협곡처럼 한정된 공간에서는 약한 놈 여럿보다는 적은 수라도 강한 놈들이 더 나아.>
나의 고민을 읽은 카이서스가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말했다.
확실히 툼스톤 기사단원들은 일반 병사들보다는 강하겠지.
출발하기 전에 툼스톤 기사들을 처음 봤을 때는 꽤나 놀랐었다.
보통 기사단들이 같은 디자인의 갑옷을 걸치는 것에 비해 그들은 제각기 다른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갑옷의 가슴 부분에 기사단의 표식인 묘비를 그려 넣은 것이 다였다.
겉보기에는 기사단이 아니라 용병단을 보는 것 같았다.
툼스톤 기사단에 대해서 생각하다 말고 맞은편에 앉은 바이엔을 쳐다보았다.
그는 위험한 몬스터의 둥지에 간다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는지 책을 읽고 있었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책을 읽으면 눈이 나빠질 텐데.
“그나저나 바이엔 씨, 괜찮겠어요? 검은 괴물을 상대할 때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는데.”
툼스톤 기사단이 바이엔과 호위대원들을 도와줄 것 같지도 않고.
문뜩 생각난 것을 묻자 바이엔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걱정은 필요 없다. 일선에서 뛰는 사법관은 책상물림만 하는 별 볼 일 없는 문관이 아니니까. 내 한 몸 지킬 능력은 충분해.”
그렇게 말하며 그는 옆에 세워둔 장검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흐음, 평범한 사법관인 줄 알았는데 검도 익혔던 건가?
신기하게 쳐다보는 나에게 바이엔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호위대원들도 원래는 제국 특무대 소속이었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황제 폐하께서 내린 명령이나 잘 수행해라.”
바이엔은 자기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흠, 특무대라.
분명히 제국에서 대놓고 처리하지 못하는 음지의 일을 수행하는 특수부대라고 했었지.
그런 곳 출신이라면 각자 알아서 자기 몸은 지키겠지.
잠시 후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나 싶어 창문을 열자 호위대원 하나가 마차에 다가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말에 짐을 챙기고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다.
제대로 된 길도 없고 나무가 우거진 숲이라 마차를 타고는 더 이상의 이동이 불가능해 보였다.
마부로 하여금 말과 마차를 지키게 하고는 토벌대는 걸어서 이동했다.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이동했을까.
숲의 경계를 지남과 동시에 갈라진 대지의 아래로 내려가는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걸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니. 이 지방 사람들은 전부 장님인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데히른이 지하 협곡의 입구를 보며 감상을 내뱉었다.
그가 다가오자 바이엔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분명히 겉보기에는 평범한 협곡처럼 보이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주변의 마나를 살폈다.
뭔가가 넓은 협곡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결계의 흔적이다. 인식 방해 마법으로 지금껏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은연중에 접근을 방해한 거지.>
카이서스는 단번에 결계를 알아보고 말했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며 결계를 유지하던 마나가 다한 모양이다.>
결계가 약해진 덕에 길 잃은 소년이 발견할 수 있었던 건가.
‘그런데 마법이라면 근처를 지나던 마법사들이 발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지금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까.’
<너무 수준이 높아서 어중이떠중이들은 눈치도 못 챘던 거지. 결계를 눈치챌 만한 정도의 마법사가 이런 촌구석까지는 올 일도 없을 테고.>
흠, 하긴 그런가.
카이서스와 결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데히른이 하늘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숙영하고 내일 아침에 내려갈 겁니다. 그쪽도 알아서 잠자리를 챙기시죠.”
제 할 말을 마친 데히른이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어디 감히 명령이야?”
데히른의 말이 거슬린다는 듯 바이엔이 화를 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얼마 후면 해가 질 텐데 무리해서 협곡에 진입하는 것은 위험하니까.
우리도 툼스톤 기사단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야영을 준비했다.
그래 봐야 각자 침낭을 펴고, 모닥불을 피우는 것이 다였지만 말이다.
호위대원들은 저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바이엔을 제외한 나머지 호위대원들과는 이야기도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네.
남자 일곱에 여자 셋.
지금까지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특무대 출신이란 걸 들으니 뭔가 있어 보인다.
호위대원들을 관찰하던 중 툼스톤 기사단이 자리 잡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야! 들고 온 거 다 꺼내!”
무슨 일인가 해서 보니 그들은 어떻게 들고 온 건지 모를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임무 중에도 술이라니, 정말이지 기사로는 안 보이는 사람들이네.
용병들조차도 임무 중에는 술을 마시는 자가 적은데 말이야.
“정말이지 난잡한 자들이다.”
팀원들이 준비한 식사를 건네며 바이엔이 치를 떨었다.
“대체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내가 스튜가 담긴 그릇을 받아 들며 묻자 그는 얼굴을 굳히며 돌아섰다.
“쓸데없는 건 궁금해하지 마라. 당신은 황제 폐하가 시킨 것만 하면 된다. 내일 일을 제대로 처리하려면 잠이나 자두도록.”
냉랭하기 그지없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이고는 스튜를 떠먹었다.
* * *
“똘마니들더러 정찰을 시켜봤는데 가장 안쪽에 뭔가 있답니다. 쪽팔리게 겁먹고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는데 보나 마나 그 검은 괴물이겠지요.”
서 다음 날 아침, 야영지를 정리한 우리에게 데히른이 다가와 말했다.
와, 부하를 똘마니라고 부르는 기사는 처음 봤어.
분명 높임말을 쓰긴 하는데 기사보다는 건달이나 쓸 법한 말투였다.
“우리가 앞장서서 진입할 테니 그쪽들은 따라오면서 방해나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쯧, 마음대로 해라.”
데히른의 말에 바이엔은 혀를 차며 대꾸했다.
툼스톤 기사단이 앞장서고, 나와 호위대가 그 뒤를 따랐다.
갈라진 대지의 아래로 내려가는 협곡은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여서 지나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비록 길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험한 탓에 내려가느라 고생은 했으나 바위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저 앞이 협곡의 끝인 모양이네요.”
앞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세에 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바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의 심장으로 감각이 예민해진 내가 아니더라도 안쪽의 뭔가가 뿜어내는 기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협곡의 절벽 사이로 간신히 내려온 햇빛 덕분에 주변을 살피는 데 문제는 없었지만 바깥보다는 어두웠다.
“전부 싸울 준비 해라! 놈도 우리가 오는 걸 눈치챘을 거다!”
선두에서 데히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툼스톤 기사단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고 전투를 준비했다.
“들어가!”
데히른이 선두에 서서 검은 괴물이 있다는 협곡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협곡의 가장 안쪽에는 커다란 공터가 있었다.
무척이나 넓은 공터 위로는 뻥 뚫려 있어서 햇빛이 그대로 들어왔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검은 괴물이 웅크리고 있었다.
샤아아…….
검은 괴물은 자신의 보금자리에 침입한 인간들을 향해 붉은 안광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검은 괴물이 몸을 일으키며 앞으로 기어오자 햇빛에 모습이 드러났다.
길고 뾰족한 뿔이 이마에 솟아 있다.
피막으로 덮인 날개는 드래곤의 것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긴 팔과 전신을 뒤덮은 검은 비늘.
그것들을 제외한다면 7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뱀과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껏 이런 모습의 몬스터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대체 저것은 정체가 뭐지?
<어? 드라이어스잖아!>
저 검은 괴물의 이름이 드라이어스인가?
아니, 그보다!
‘저 몬스터를 아는 거야?’
정체를 아는 듯한 말에 내가 깜짝 놀라 묻자 카이서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뭐, 엄청 희귀한 몬스터다. 예전에 멸종한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남은 놈이 있을 줄은 몰랐군.>
카이서스와 대화하는 사이 툼스톤 기사단은 흩어져서 진형을 갖추고 드라이어스를 둘러쌌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 처음 보는 몬스터다! 무슨 공격을 해올지 몰라!”
“오우!”
자신을 둘러싼 인간들이 소리를 질러대자 드라이어스가 기다란 혀를 날름거리며 새빨간 눈으로 노려보았다.
적들을 훑어보던 드라이어스의 시선이 후방에 있던 나를 발견했다.
파충류의 것처럼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붉은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뭔가… 나만 빤히 쳐다보는 듯한 기분인데.
<호오, 저놈 눈치챈 모양인데?>
‘뭘 눈치챘다는 거야?’
<네게서 드래곤의 냄새를 맡은 거지. 드라이어스는 일단은 드래곤과 같은 용종에 속하거든. 물론 드래곤에 비하면 엄청나게 수준 차이가 나는 하등 생물이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 몸의 절반은 드래곤의 것이나 다름없다고 블루 드래곤인 카락스가 말했었지.
내게서 드래곤의 냄새를 맡았다는 건가?
소름 끼치는 드라이어스의 붉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뭐랄까, 뭔가를 나에게 간절하게 바라는 듯한…….
“해치워!”
그 순간 데히른의 명령이 떨어지며 툼스톤 기사단이 드라이어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로 인해 나와 드라이어스의 시선 교환이 끊어졌다.
샤아아!
공격이 시작되자 드라이어스는 유연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며 두 팔과 꼬리를 휘둘러 반격했다.
기사들이 드라이어스의 날카로운 손톱에 베이고, 두꺼운 꼬리에 맞아 날아갔다.
그러나 툼스톤 기사단원들도 노름으로 기사가 된 것은 아닌 듯했다.
기사들이 휘두른 칼날이 드라이어스의 몸에 닿았다.
하지만.
카앙-!
“이런 미친, 칼이 들어가질 않아!”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에 가로막힌 칼날이 튕겨져 나오자 당황한 기사를 드라이어스는 그대로 팔을 휘둘러 날려 버렸다.
“당신도 도와야 하는 것 아닌가? 저것들이 맘에 안 들긴 해도 전부 당해 버리면 다음은 우리 차례라고!”
너무나도 강력한 드라이어스의 전투력에 당황한 바이엔이 당황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잠깐, 잠깐만 지켜보죠.”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내 대답에 바이엔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쳐다보던 드라이어스의 시선이 뭔가 이상했다.
어째서 도와달라는 듯한 눈을 하고 있던 거지?
‘그 전에 난 어떻게 드라이어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거야?!’
<너의 절반은 이미 드래곤이 되었기 때문이지.>
카이서스의 말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내가 반인반룡이 되었기에 용종과 교류할 수 있게 된 거고.
그걸 눈치챈 드라이어스가 나에게 도움을 청한 거라면?
그런데 나에게 대체 무엇을 바라는 거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드라이어스와 툼스톤 기사단의 전투는 이어지고 있었다.
캬아아!
툼스톤 기사단이 드라이어스의 움직임에 적응이 된 듯 곳곳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아무리 단단한 비늘이더라도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에 실린 마나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기사들의 검에 몸 곳곳이 상처 입어 가던 드라이어스가 분노한 듯 큰 소리를 냈다.
캬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드라이어스의 턱 아래가 부풀어 올랐다.
“뭘 하려는 거지?!”
갑작스러운 그 모습에 기사들 사이에서 긴장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들 드라이어스가 뭘 하려는지 몰라 의아해하는 중에도 나는 본능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들 뒤로 물러나요!”
드라이어스에게 달려들던 기사들에게 소리치며 곧장 마법을 시전했다.
드라이어스가 크게 입을 벌리자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으, 으악!”
“브, 브레스다!”
화염 브레스에 놀라 고함을 지르는 기사들이 휘말리기 직전에 나의 마법이 발동됐다.
“워터 실드! 워터 실드!”
두 겹으로 펼쳐진 물의 방패가 드라이어스와 기사들 사이에 펼쳐졌다.
거세게 뿜어진 화염이 워터 실드에 부딪치자 치이익- 하고 물이 증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겹으로 펼쳐진 워터 실드 중 하나가 화염을 버텨내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다.
남은 하나의 워터 실드마저 사라진다면 기사들의 피해가 심각할 거다.
“젠장!”
나는 이를 악물며 남아 있는 워터 실드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치이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