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 호위대
[선생… 미안하다. 아바마마도 어쩔 수가 없으셨어.]
통신구 너머로 풀이 죽은 얼굴로 한숨 쉬듯 말하는 로라스 왕자의 모습에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1년 동안 똥 좀 밟았다고 생각하죠, 뭐.”
[음… 1년이나 똥을 온몸에 처바르고 살 바에야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농담이야. 이만 끊도록 하지. 자주 연락해.]
“왕자님도 건강하십시오.”
왕자와 인사를 나누고는 통신을 종료했다.
“하아아아.”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드러눕듯 등을 기댔다.
역시나는 역시나라고, 크라우드 왕국은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온갖 루트로 압력을 넣어댔으니 국왕께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
아무리 내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고 해도 국가의 경제가 달린 일이니까.
착잡한 기분에 마른세수를 하고는 방문을 열었다.
문 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를 제외한 사절단 소속의 사람들과 수행원들이 크라우드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주목적이었던 국경이 개방된 데다 황제가 대놓고 그만 돌아가라는 말까지 했으니까.
그는 ‘이제 제국의 재산을 그만 축내고 돌아가라’라고 지껄여 댔다.
망할 황제 같으니, 사절단이 가져온 선물만 해도 얼만데.
짐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사절단원들과 수행원들은 제국에 남겨질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이곳에 지내는 동안 황제의 똘아이스러움을 뼈저리게 느낀 그들이다.
1년이나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황제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내가 불쌍하겠지.
그들의 시선에 멋쩍게 웃어주고는 지나가던 수행원 하나를 붙잡았다.
“죄송한데 마실 것 좀 가져다주실래요?”
“물론입니다.”
수행원에게 음료를 부탁하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조용한 방 안을 둘러보다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정원의 나무 뒤에 한 사내가 몸을 기대고선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그는 내 시선을 느끼고도 그리 당황한 기색 없이 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어 보였다.
제국에 남기로 한 뒤부터 저런 감시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들은 감시한다는 사실을 그다지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언제든 지켜보고 있다. 그러니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라는 거겠지.
감시자들은 여기저기에 숨어 있었다.
창밖의 정원사도, 복도의 시종이나 기사들도.
내가 어딜 가든 대놓고 감시의 눈을 번뜩였다.
그래서 내게 감시가 붙어 있는 것을 눈치챈 이후로는 방을 거의 나서지 않았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창문의 커튼을 치며 돌아섰다.
조금 전의 수행원이 마실 것을 가지고 온 모양이다.
하지만 차와 간단한 과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온 것은 수행원이 아니었다.
“어? 스승님?”
“너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라기에 내가 대신 가져다주겠다고 했단다.”
의아해하는 내 모습에 스승님은 쟁반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내일이 지나면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 전에 제자와 오붓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말이다.”
스승님이 가져온 찻잔은 두 개였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나와 스승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찻주전자의 차를 두 개의 잔에 나눠 따르고는 스승님과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미안하구나.”
뜬금없이 말하고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는 스승님의 모습에 얼떨떨해졌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물음에 스승님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할 말을 생각하듯 손가락으로 찻잔을 매만졌다.
은은하게 퍼지는 따스한 차향.
안 그래도 입안이 텁텁하던 참이었기에 찻잔을 들어 입안을 살짝 적셨다.
음, 씁쓸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다.
차향을 음미하고 있자니 스승님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스승으로서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니. 게다가 이 일에 루리스가 개입한 것일 수도 있고 말이야.”
루리스가 손을 썼다면 그 이유는 내가 스승님의 제자이기 때문이겠지.
그 자식은 스승님에게 완전히 미쳐 있으니까.
지치고, 무력감으로 어두워진 스승님의 얼굴에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잘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잘됐다는 내 말에 스승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니?”
“음, 놈들의 계획이 뭔지는 몰라도 멀리 있는 것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것이 좀 더 방해하기 쉽지 않을까요?”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어야 한다’라는 말은 저쪽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그동안 방에 틀어박혀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놈들이 곁에 두고 감시한다면 나는 오히려 곁에서 방해해 주마!
“…위험할 거란다.”
“어차피 루리스와 황제를 내버려 두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잖아요.”
내 말에 스승님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이 되어서 하나밖에 없는 제자에게 해줄 수 없는 게 없다니, 한심하구나.”
힘없이 내뱉는 스승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스승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도 없을 거예요.”
스승님은 그 말이 기쁜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내일이면 크라우드 왕국으로 돌아갈 텐데, 부탁할 거라도 있니?”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아리안 누나에게 약속을 못 지켜서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내 부탁에 스승님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거라면 통신구를 통해서 말하면 되잖니?”
황궁 내에서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승인을 받은 아티팩트에 한해서는 사용이 가능했다.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겐 이미 통신구로 한동안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해두었다.
하지만 아직 아리안 누나에게는 연락을 하지 못했다.
스승님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모로 틀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게… 아리안 누나를 볼 낯이 없어서요.”
어쩐지 아리안 누나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기껏 제국 내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루리스와 황제의 음모를 파헤치고, 방해하기로 맘먹었는데 말이야.
어쩐지 뒤로 갈수록 작아지는 듯한 목소리에 스승님은 고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왜 웃으세요?!”
애정이 가득 담긴 그 시선에 어깨를 움찔거리며 되물었다.
“아리안은 좋은 아이인 것 같더구나.”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스승님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예…….”
“후후, 아리안에게는 내가 잘 말해둘 테니 걱정하지 마렴. 그래, 그보다… 언제부터니?”
“네, 네?!”
약간은 짓궂은 표정으로 물어오는 스승님의 모습에 나는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이것도 다 내 마음을 풀어주시려는 거겠지.
나는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아리안 누나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스승님과 나는 차와 과자를 먹으며 밤이 늦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 * *
다음 날 아침.
숙소로 쓰던 별궁 앞에 모인 크라우드 사절단이 준비를 마치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자네 혼자만 타국에 남겨두고 가서 미안하네.”
마일렌 공작은 사절단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뭐, 어쩔 수 없죠.”
내 대답에 마일렌 공작은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생기거든 연락하게.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네.”
맞잡은 손을 통해 마일렌 공작의 마음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사절단장인 마일렌 공작과 악수하고 다른 사절단원들과도 악수하며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연락 주게나. 구해주겠네.”
다른 사절단원들도 필요할 때 도움을 주겠노라 말했다.
제국에 파견된 사절단은 크라우드 왕국에서도 나름 힘 좀 쓰는 사람들이니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사절단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스승님과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
스승님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무사히 돌아오렴.”
나는 스승님의 손을 맞잡았다.
“예.”
긴말은 필요 없었다.
제국에 남게 된 나와 작별 인사를 마친 사절단이 별궁을 떠났다.
사절단은 곧장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곧장 하이넨을 떠나 크라우드로 돌아가는 길에 오르겠지.
사절단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별궁 안으로 들어왔다.
수행원을 포함한 사절단 60여 명이 떠난 별궁 내부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별궁을 지키고 관리하는 기사와 시종 몇몇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빠져나간 흔적은 눈에 확 들어온다.
나는 여기서 지내게 되는 걸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될까.
혼자 지내기에는 이 별궁은 너무 넓으니 아마도 다른 곳으로 옮기겠지?
로비에 서서 생각하던 중에 문이 열리며 10여 명의 사람이 들어섰다.
그들을 이끌고 들어온 것은 나를 취조했었던 바이엔이었다.
“댁이 여긴 웬일입니까?”
내가 떨떠름해하며 묻자 그는 똥 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5급 사법관 바이엔 라터스 자작, 라엘 드리안 자작의 호위대의 대장으로서 배치되었다.”
“감시자라면 이미 충분하잖습니까?”
내가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느끼며 묻자 그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감시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앞으로 당신은 제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한 호위대다.”
흠, 한마디로 곁에 붙어서 밀착관리 한다는 거군.
응? 그런데 분명히…….
“어… 그런데 저번에 만났을 때 3급 사법관이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지난번에 처음 만났을 때 분명히 그는 나에게 자신을 3급 사법관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5급이라고?
내 물음에 그는 분노로 가득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2계급 강등당했다.”
괜한 걸 물어본 모양이다.
무척이나 억울하겠지.
그는 황제의 재미를 위한 연극 때문에 위에서 까라는 대로 나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였을 뿐인데.
일선에서 일한 바이엔이 희생양으로서 처벌을 받은 모양이다.
거기다가 그 원인이 된 나의 호위대장으로 임명되기까지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하지.
“음… 힘내세요.”
“동정하지 마라.”
내가 불쌍하게 쳐다보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는 화를 냈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럼 저는 계속해서 여기서 지내는 겁니까?”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지 않을 때는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지낼 것이다.”
나는 바이엔의 뒤에 서 있는 호위대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남자 일곱에 여자 셋.
명목이야 호위지만 실상은 감시자.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요.”
나는 가볍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앉았다.
황궁 내에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결계가 펼쳐져 있지만 마나 수련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이번에 제국에 와서 느낀 것은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힘이 없기에 황제의 놀이에 휩쓸려 고생하게 된 셈이 아닌가.
어차피 살기 위해서라도 서클 브레이커에 올라야 하는 몸이지만…….
만약 서클 브레이커에 올라 드래곤과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겪지 않아도 되겠지.
황제와 루리스의 음모를 박살 내기도 쉬워질 테고.
최소한 1년간 황제가 내게 내릴 명령들에서 살아남을 정도로는 강해져야 했다.
생각을 마치고 수련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잡념이 사라져 갔다.
* * *
다음 날 아침.
“이런.”
아침 식사를 하던 도중 실수로 스튜를 엎어서 셔츠를 더럽히고 말았다.
어젯밤 늦게까지 수련을 한 탓에 잠이 덜 깼던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투덜거리며 셔츠를 벗었다.
스튜로 더러워진 셔츠를 벗고 깨끗한 셔츠를 찾던 중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겠다.”
내가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바이엔이 들어왔다.
“대답하기도 전에 들어오면 어쩝니까?!”
허락도 없이 들어온 무례한 행동에 내가 화를 내며 말하자 바이엔이 움찔하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허락 없이도 방에 들어올 수 있다. 호위대장의 특권이지.”
뭐 그딴 게 다 있어?
젠장, 제국에 왔으니 제국 법을 따라야한다지만 너무하네.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자니 바이엔이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일단은 옷부터 입어라.”
그러고 보니 갈아입을 셔츠를 찾던 중이라 나는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음, 지금 보니 나도 꽤 몸이 괜찮군.
나름대로 잔근육도 있고 말이야.
스스로에게 흡족해하며 근처에 있던 셔츠를 입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바이엔이 품에서 황제의 인장이 찍힌 두루마리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황제 폐하가 당신에게 첫 번째 명을 내리셨다.”
벌써부터 명령이라니, 아무래도 1년 동안 쉬지 않고 부려먹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