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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75화 (75/150)

075화 - 임대 계약

나는 술렁이는 방청석의 분위기를 느끼며 증언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증인, 당시 크리스토 백작이 쓰러져 있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잠시 방치되어 눈치만 살피고 있던 기사가 내 물음에 화들짝 놀라더니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 그러니까… 분명 크리스토 백작님은 문을 향해 쓰러진 채로 등에 단검이 꽂혀 있었습니다.”

그의 증언은 내가 봤던 모습과 일치한다.

“그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 물음에 기사는 또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뭐가 말입니까?”

“저는 그 집무실에 분명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공격을 받은 크리스토 백작은 문을 향해 쓰러져 있었죠.”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말은 범인이 미리 집무실이 비어 있을 때 들어가서 숨어 있다가 백작이 들어와서 업무를 보던 중에 뒤에서 찔렀거나, 아니면 대놓고 문으로 들어가서 백작의 뒤로 돌아가 찔렀다는 이야기인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고 표정이 굳은 바이엔을 쳐다보며 말했다.

“집무실에 숨어 있다가 찔렀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건물에 들어간 시간과 사건이 발생한 시간을 생각해 보면 무리니까요. 그리고……”

말끝을 흐리며 나는 고개를 돌려 황제의 곁에 서 있는 루리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후자는 더 말이 안 되죠. 문으로 들어가 크리스토 백작의 뒤로 돌아가서 찔렀다면 그가 범인의 얼굴을 못 봤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설마 크리스토 백작이 허위 진술을 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자신을 응시하는 내 말에 루리스는 피식 웃어 보였다.

“으음…….”

다시 고개를 돌려 판사 쪽과 사법관 쪽을 바라보니 양측 모두 곤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는 그날 저녁 스승이신 카밀라 님과 외출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크리스토 백작이 초대했다고 주장하는 시종을 따라갔고, 집무실 앞에서 갑자기 시종이 문을 열고는 저를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증인이 말한 대로지요. 제 생각에는 그 시종이 진범과 가장 가까운 공범으로 여겨집니다만.”

내 말이 끝나자 방청석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진범이 따로 있는 건가?”

“뭐야,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상하긴 이상하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고 알려진 사람이 직접 암살을 시도하다니…….”

“확실히 나라도 저런 허술한 방법보다는 다른 방법을 썼겠지.”

하나씩 튀어나오는 의문에 웅성거림은 점차 커져갔다.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던 권위라는 댐에 생겨난 작은 균열은 점차 커져간다.

“정숙! 여긴 법정이란 말이오! 정숙들 하시오!”

판사들이 당황해서는 황급히 정숙하라며 소리쳤다.

“그런데 아까 드래곤이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만약 자신이 가호하는 자가 누명을 쓰고 처벌을 받으면……”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가 내뱉은 불안한 목소리가 사람들을 부채질한다.

잠시 불안한 침묵이 법정 내부에 내려앉더니 이내 소란스러워졌다.

“제대로 수사한 것 맞아?!”

“똑바로 하시오!”

계속해서 소란스러워져 가는 법정의 상황에 당황한 중년 판사가 고함치듯 소리쳤다.

“모두 정숙하시오! 계속해서 재판을 방해한다면 법정 모독죄로……!”

중년 판사가 화가 나서 소리쳐 대고 법정을 지키는 기사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소란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난 지난번 크라우드와의 전쟁에 참전했을 때 직접 메테오를 봤단 말이다! 드래곤의 분노에 휩쓸리는 건 사양이야!”

후, 이거 완전 개판이군.

자, 이제 어떻게 나오시려나?

고성이 오가는 법정 내부를 가만히 쳐다보던 중이었다.

“푸하하하하!”

갑작스레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소란스러운 법정 안에 울려 퍼졌다.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뒤덮어 버리는 기묘한 울림이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웃음이 터져 나온 곳을 쳐다보았다.

귀빈석에 앉아 있는 황제가 무척이나 즐겁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내가 만들어낸 소란을 순식간에 잠재워 버린다.

한참을 웃어대던 황제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아, 정말이지 재미있다니까.”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까지 맺힌 눈가를 닦아내는 황제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순수한 즐거움.

고요해진 법정 내부에 황제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소란이 잦아든 법정 내부를 둘러보던 황제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흥, 이젠 재미없군. 연극은 이쯤 하도록 하지.”

흥미를 잃어버린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싸늘했다.

그보다, 방금 뭐라고 했지?

연극이라고?

<흥, 그렇군. 그런 거였나.>

카이서스가 뭔가 짐작했는지 중얼거렸다.

‘뭐? 대체 무슨 소린데?’

내 물음에 카이서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판사 자리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예, 폐하. 그리하지요.”

황제의 말에 대답하며 일어선 것은 세 명의 판사 중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중년 여인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치만 살폈다.

“본 사건의 피고인인 라엘 드리안 자작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바입니다.”

단호하게 선언하는 그녀의 말에 황제와 루리스를 제외한 법정 내의 모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자, 잠깐! 어째서 상의도 없이 갑자기 판결을 내리는 거요!”

“그렇소! 판결은 판사 모두가 상의하여……!”

나머지 두 판사가 황급히 판결에 항의했으나 여성 판사는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큭!”

황명이 언급되자 그들은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 앞에서 황명에 항의하고 나선다는 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달라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슬쩍 돌아보니 황제는 길게 하품하며 법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사전에 미리 계획되어 있던 일이라는 건가?!

<흥, 이제야 알아차린 거냐. 멍청하긴.>

쳇, 어쩐지 말도 안 되는 것도 많은 데다 우격다짐으로 진행되는 재판이다 싶더라니.

사람들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아.”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뒤돌아서서 황제가 앉은 귀빈석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처음부터 이러실 작정이셨습니까? 크리스토 백작을 노린 자들이 의도한 대로 제가 범인인 양 체포하여 재판까지 여신 것은… 보나 마나 진범의 배후가 긴장을 풀게 하려는 것이셨겠지요.”

내가 짐작한 바를 말하자 그제야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무표정한 황제의 입꼬리가 다시금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하하! 그건 그대의 생각인가 아니면 드래곤의 생각인가?”

“둘 다입니다.”

황제는 피식 웃어 보이고는 귀찮다는 듯 말없이 루리스에게 손짓했다.

그 손짓에 루리스가 황제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그대의 말대로다. 지금 한창 배후 세력을 체포 중이지. 속여서 미안하게 됐군.”

당연하게도 루리스와 황제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범행 배후를 잡아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던 거다.

뭐, 배후는 황제가 루리스를 곁에 두는 것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겠지.

덤으로 크라우드를 싫어하거나, 나를 싫어하는 것도 있었으니 나를 범인으로 몰아가려 했던 걸 테고.

아무튼 이제 말도 안 되는 누명은 벗었으니 다행이지.

나는 몸을 돌려 근처의 기사에게 투덜거렸다.

“그럼 이제 혐의도 풀렸으니 이 쇠사슬 좀 풀어주시죠. 이거 꽤 무겁단 말입니다.”

이놈의 쇠사슬이 자꾸 손목과 발목에 쓸려서 살갗이 따가울 정도라고.

내 말에 그제야 방청석 쪽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환호한 것은 스승님을 비롯한 크라우드 사절단 쪽이었다.

“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무죄다, 무죄!”

스승님은 이제야 마음이 놓인 듯 가만히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절단의 환호에 다른 방청객들은 얼떨떨해하면서도 박수를 쳐주었다.

가까이에 있던 기사들이 다가와 열쇠로 팔다리를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쇠사슬에서 해방되자 몸이 가벼워졌다.

후, 일단은 푹신한 침대에서 한숨 자고 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 * *

말도 안 되는 재판으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나와 스승님을 제외한 나머지 사절단원들은 외교 활동을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똑똑-

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중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날세.”

마일렌 공작의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혼자서 나를 찾아온 그는 무척이나 어두운 표정이었다.

“공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할 이야기가 있네만… 들어가도 되겠는가?”

아무래도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들어오시죠.”

방으로 들어온 마일렌 공작은 의자에 앉아 한숨부터 내쉬었다.

분명 마일렌 공작은 낮에 사절단의 대표로서 황제에게 불려 갔었다고 했는데.

마일렌 공작이 골치 아파 하는 것은 보나 마나 황제 때문일 거고, 나를 찾아왔다는 건… 나와 관계된 일인가.

고개를 숙인 채 한숨만 내쉬는 공작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대충 짐작한 내가 자리에 앉으며 말을 꺼내자 한숨만 내쉬던 공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국왕께서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는… 양국의 무역을 재개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네.”

사절단을 파견하며 국왕께서는 제국으로 인한 문제도 해결하고자 하신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황제, 제국 고위층들과 함께한 만찬 자리에서 무역의 단절로 인한 피해 이야기가 나왔었지.

전쟁은 멈췄으나 아직까지는 휴전 상태, 국경은 봉쇄된 채였다.

제국의 무역 제재로 인한 피해는 우리 왕국이 더 크다고 했던가.

나는 말없이 공작의 말을 기다렸다.

“황제가 국경의 통행금지를 풀고 무역을 재개하겠다고 했네.”

그건 좋은 소식이니 공작의 표정이 어두울 이유가 없다.

그렇다는 건 즉…….

“뭔가 조건을 요구한 모양이군요.”

“…그러하네.”

“그 조건은 저와 관련된 거겠죠?”

이미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에 별로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작은 내 시선을 피했다.

“그게… 관련된 정도가 아니라 자네를 요구했네.”

“그렇군요. 저를… 네? 저를요?!”

내가 예상했던 수준을 아예 넘어선 공작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를 요구하다니. 설마 황제의 취향은 설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나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황제에게는 황후가 있지만 아직 아이는 없다고 들었어.

황제의 성적 취향은 그렇고 그런 거였나?!

“흠, 흠! 제국의 사람이 들었다간 큰일 날 소리는 하지 말아주게.”

“그럼 저를 요구했다는 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무역을 재개하는 대신 자네가 1년 동안 제국에 머물며 황제의 명령을 따르는 거네.”

“말도 안 됩니다!”

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자 공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네. 말도 안 되는 요구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만 황제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네.”

“그 제안을 받아들이신 겁니까?”

“내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즉답하지는 않았네. 본국에 계신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공작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하의 성격상 자네가 거부한다면 무척이나 고민하시겠지. 그렇기에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네. 도와주게.”

나를 응시하는 공작의 눈에 간절함이 비치고 있었다.

“피해가 그렇게나 심각합니까?”

“국경이 폐쇄되기 전까지는 제국과의 무역이 우리나라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했으니 말이야. 물론 자네를 이곳에 남겨두지 않아도 시장구조를 바로잡을 수는 있을 걸세. 하지만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질 걸세.”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상황이 심각하긴 심각한 모양이다.

“제국에 남아 황제의 명령을 따르는 건 꽤나 위험하겠죠?”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군.”

신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공작의 말에 나는 고민에 잠겼다.

황제가 나를 1년이나 제국에 잡아두려 하는 이유는 뻔하다.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장 귀찮을 것 같은 놈을 곁에 두고 감시하겠다는 거겠지.

옛말에도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으니까.

게다가 명령을 수행하는 도중에 죽기라도 한다면 제국으로서는 완전 좋은 일이고 말이야.

“황제가 명령하는 거라면 뭐든지 따라야 합니까?”

“그건 아니네. 타국에 해가 되거나 도의에 어긋나는 명령은 내리지 않겠다고 하더군.”

나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공작은 내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고민을 끝마친 내가 대답했다.

“1년 뒤에는 돌아갈 겁니다.”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리고 작위도 낮은 나에게 고개를 숙인 공작을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1년 동안 제국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리안 누나와의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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