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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74화 (74/150)

074화 - 이의 있소

넓은 홀 안쪽의 높은 자리에 판사복을 걸친 사람 셋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아랫자리에는 바이엔이 세 명의 동료 사법관들과 함께 제복 차림으로 앉아 있다.

그 앞, 가장 낮은 곳에 피고인인 나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서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방청석에 앉은 백여 명의 사람들.

대부분 어느 정도급의 귀족들이나 이름 좀 날리는 사람들이겠지.

아마도 하이넨에 주재하는 타국의 외교관들도 참석했을 거다.

원래는 황궁 내의 연회장으로 쓰였을 곳을 임시로 개조한 듯 곳곳에 연회장의 장식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워낙 이목을 많이 받는 사건이다 보니 기존 법정에서 재판을 치르기에는 이것저것 문제가 많았겠지.

가장 뒤쪽, 판사석보다도 높은 곳에 위치한, 아마도 황제의 것이리라 짐작되는 귀빈석은 아직까지 비어 있었다.

계속해서 찬찬히 내부를 둘러보던 나는 방청석의 가장 앞에 앉아 있는 스승님을 발견했다.

크라우드의 사절단원들과 함께 앉은 스승님은 무척이나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조사를 받았던 것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걱정했던 것 때문인지 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눈 밑이 까만 것을 보니 그동안 제대로 잠도 못 주무신 모양이었다.

‘다친 곳은 없니?’ 스승의 눈에 담긴 마음에 나는 애써 웃으며 소리 없이 입을 움직였다.

걱정 마세요.

걱정 말라고 해봐야 이 상황에서 걱정이 안 될 리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내 입술의 움직임을 읽은 듯 스승님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 순간 2층의 귀빈석 쪽이 소란스러워지며 외침이 들려왔다.

“타이런 제국을 굽어살피시는 빛, 타이커스 프리드리히 타이런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앉아 있던 모두가 기립하며 고개를 숙였다.

재판장의 정숙하란 명령에도 작게나마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황제의 등장에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재판장의 권위와 황제의 권위는 하늘과 땅 차이니까.

침묵이 내려앉은 법정 내부에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판을 시작하라.”

황제의 말에 세 명의 판사 중 중앙에 앉은 노인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외쳤다.

“흠, 흠. 모두 착석하여 주십시오!”

황제까지 참관하는 재판이라서인지 판사 노인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조금 떨리고 있었다.

법정 내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판사 노인이 재차 말했다.

“루리스 크리스토 백작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법관, 시작하시오.”

네 명의 사법관 중에서 바이엔이 서류를 펼쳐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 사건은 루리스 크리스토 백작을 크라우드 왕국 사절단으로 본 제국을 방문한 피고인 라엘 드리안 자작이 암살을 시도한 사건입니다.”

“이의 있습니다.”

바이엔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손을 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아직 피고인의 발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 명의 판사 중 왼쪽에 앉은 비쩍 마른 중년 사내가 눈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아오, 저 인간 새끼 건방지네. 내가 육체만 있었어도 아주 그냥!>

쳇, 애초에 판사들도 제국의 사람.

나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할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내 발언을 막은 중년 판사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바이엔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4월 18일, 피고인은 크레센이라는 시종을 협박하여 황궁의 행정구역에 위치한 피해자의 집무실에 침입한 후 업무를 보고 있던 피해자를 뒤에서 단검으로 찔렀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피고인의 발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했다!”

나의 이의 제기를 또다시 중년 판사가 차단했다.

아예 내 입을 막아버리고 구색만 갖춘 재판을 하겠다는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바이엔은 담담하게 자신이 할 말을 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기사, 웰포드 경을 증인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허락하겠소.”

아주 호흡이 찰떡처럼 잘 맞네.

연극처럼 대화를 술술 이어나가는 바이엔과 판사들의 모습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스승님이 앉은 자리를 힐끗 쳐다보니 스승님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사이 증인으로 불려 나온 기사가 증언대에 섰다.

“증인은 진실만을 밝힐 것을 신께 맹세하도록.”

<응? 저 새끼 그 새낀 거 같은데?>

‘그런 거 같은데?’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검 손잡이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던 그 기사인 것 같았다.

덩치 좋은 그 기사는 성서에 오른손을 얹고 맹세를 하고, 신분을 밝혔다.

그 부분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았다.

“증인, 사건 당일 목격한 것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예. 저는 사건 당일 평소처럼 동료들과 함께 근무지를 순찰하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크라우드의 사절이 크리스토 백작을 살해했다는 외침이 들려서 가보니… 크리스토 백작은 등에 단검이 박힌 채 쓰러져 있었고 피고인은 시종인 크레센과 격투 중이었습니다.”

기사의 증언이 끝나자 바이엔이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외에도 사건 당일 관련자들의 증언과 사건 현장을 기록한 자료입니다. 증거자료로 제출합니다.”

바이엔의 동료 중 하나가 서류들을 판사석으로 들고 가서 전달했다.

“흐음.”

세 명의 판사는 서류들을 살피며 자기네끼리 수군거렸다.

<저것들, 제대로 읽지도 않고 있네. 시선의 움직임만 봐도 알겠어.>

역시 짜고 치는 거라 자료도 제대로 안 본다 이거지?

읽는 척을 마친 판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알겠소. 일단 증인은 이만 자리로 돌아가시오.”

“예.”

나에게 뭐라 말할 기회도 없이 증인으로 나온 기사를 들여보내려 하자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잠시만요! 증인에게 물어볼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내 말에 중년 판사의 인상이 재차 찡그려졌다.

“이미 증인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판사의 결정을 번복하게 만들 셈인가!”

계속해서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이건 진짜 치사하고 쪽팔려서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제가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말에 판사들은 물론이고 법정 내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물을 것이 있다면서 본인이 묻는 것이 아니라니! 이 무슨 궤변인가! 감히 법정을 모독하는 건가!”

“설마 법정을 모독하겠습니까? 말을 전달하는 건 제가 하겠지만… 질문은 저를 가호하는 드래곤이 하는 겁니다.”

순간 법정 내부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잔뜩 미간을 찡그리고 소리치던 판사도, 저게 미쳤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바이엔도,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재판을 흥미롭게 구경하던 방청객들도.

모두가 경직된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드래곤의 존재에 대해 떠올린 것이다.

“드, 드래곤?”

아까부터 계속 내가 이의를 제기할 때마다 소리를 질러대던 중년 판사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나 말이냐?!>

잠시 멍하니 있던 카이서스가 뒤늦게 자신을 말하는 것임을 알고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예. 제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그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재판도 그가 주시하고 있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여러 개 있어서 확인을 좀 해달랍니다.”

<크캬캬캬! 이 사기꾼 녀석! 넌 이제 보니 멍청하지만 사기를 칠 때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사기라니! 아까 여기 들어오기 전에 네가 말하길 내가 너고 네가 나라며! 그럼 내가 궁금한 건 너도 궁금하겠지!’

<흠,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뭐, 그런 셈 치자! 크하하!>

카이서스와 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판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드래곤이 묻고자 한다는 말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특히나 계속해서 내 말을 막았던 중년 판사는 안색이 똥색이었다.

모든 것을 드래곤이 듣고 있었다는 말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판사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다가 결정이 나질 않았는지 눈치를 살폈다.

물론 그들이 눈치를 살피는 사람은 이곳에 있는 자들 중 가장 높은 인물, 타이커스 황제였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황제는 재미있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쟤는 참 소리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네.>

‘혹시 모르지, 칼라마쉬의 서에 귀신처럼 불쑥불쑥 나타나는 그런 게 있을지도.’

어느새 황제의 곁에는 루리스가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법관들과 방청객들도 어느새 판사들과 황제가 앉은 곳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마침내 루리스가 허리를 숙여 황제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대체 뭐라고 속삭였는지는 몰라도 황제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판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즈, 증인 웰포드는 증언대에 다시 서시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증인이 다시 증언대에 섰다.

“피고인은 증인에게 질문하시오.”

재판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불편한 표정을 짓는 판사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웃던 내가 바이엔을 쳐다보고 물었다.

“아,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피해자인 크리스토 백작께서는 범인을 보셨답니까?”

그 말에 바이엔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피해자는 등 뒤에서 공격을 받은 탓에 범인의 얼굴을 못 보셨다고 했습니다.”

다행히도 루리스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닌 모양이다.

만약 그가 자신을 찌른 자가 나라는 거짓말을 했다면 어떻게 손쓸 방도도 없었겠지.

“증인에게 질문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증인에게 질문하시오!”

중년 판사가 잔뜩 불편해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증언대에 선 증인을 응시했다.

“증인! 저를 크리스토 백작이 있는 곳으로 데려간 시종의 외침을 듣고 오셨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도착하니 당신은 크레센과 격투 중이었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이엔이 앉은 자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저기 앉은 사법관께서는 분명히 제가 크레센이라는 그 시종을 협박하여 크리스토 백작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그 시종이 사람들을 부르고 저와 격투를 하고 있었다고요? 그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건……”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바이엔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그 크레센이라는 시종은 크리스토 백작을 암살하려는 것인 줄은 몰랐다더군요. 피고인이 피해자를 공격하자 놀라서 소리치고 제압하려 했다고 증언한 내용이 조금 전 제출한 증거자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이엔의 말에 그제야 판사들이 황급히 증거자료를 다시 살펴보았다.

조금 전에 카이서스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는다고 했던 것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음, 사법관이 제출한 자료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군.”

흥, 그러시겠지.

“그렇습니까. 그럼 그 시종은 어디 있습니까? 그 말대로라면 그는 피해자조차 못 본 범인을 직접 목격했다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증인 아닙니까. 그를 증언대에 세워주실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나의 요구에 바이엔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찡그려졌다.

저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취조실에서 루리스가 했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로군.

“그러고 보니…….”

“그 시종을 가장 먼저 증언대에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방청석 사이에서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하나둘 새어 나왔다.

웅성대는 소리가 커져가자 세 명의 판사도 당혹해 했다.

“저, 정숙하시오!”

중앙의 판사 노인이 황급히 외치자 방청객들의 말소리는 잦아들었으나 의아해하는 시선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끄응, 사법관! 그 목격자라는 시종을 데려오시오.”

결국 판사가 침음을 흘리며 바이엔에게 말했다.

여기서 그 시종을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는다면 분위기가 더욱 요상해질 테니까.

“…그건 불가합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동료들과 시선을 교환하던 바이엔의 잠시 동안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어째서입니까?”

그 이유를 알면서도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바이엔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크레센이라는 시종은 며칠 전에 실종되었습니다.”

“크리스토 백작 암살 시도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증인이 사라졌다고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지금 제국의 사법부는 법정에 세우지도 못하는 사람의 증언으로 저를 범인으로 몰았다는 겁니까?”

탕!

“지금 제국을 모욕하는 건가!”

바이엔이 책상을 거세게 내려치며 소리치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사법부의 잘못을 추궁하는 겁니다만. 아니면 지금 사법부의 뜻이 제국의 뜻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담담하게 맞받아치며 되묻자 바이엔이 움찔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헛소리다.”

내 물음을 짧게 일축한 그는 다시 판사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비록 시종은 실종되었으나 그가 증언한 내용은 증거자료에 남아 있습니다. 그 외에도 현장에 남아 있던 흔적 등을 통해 드리안 자작을 범인이라 추정한 겁니다.”

“흠, 흠. 인정하겠소.”

중앙의 판사 노인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바이엔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미 방청객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는지 술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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