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 안대를 벗어주세요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로군.”
취조실로 들어선 루리스가 가장 먼저 입에서 내뱉은 말이었다.
젠장, 누구 덕분에 내가 이 모양 이 꼴인데!
“분명 혼수상태라고 들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는군.”
내가 바이엔을 흘겨보며 말하자 루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혼수상태? 아, 외부에는 그렇게 공표해 두었지. 그게 여러모로 편하니까 말이야.”
태연하게 나와 이야기하는 루리스의 모습에 눈을 찡그리고 있던 바이엔이 화를 내며 말했다.
“이곳은 취조실입니다! 피해자가 함부로 들어올 곳이……!”
그의 말에 루리스가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문 밖에서 내가 한 말을 못 들었나? 언제부터 사법부의 권위가 황제 폐하의 뜻보다 중요했지?”
“크윽.”
소속집단까지 걸고넘어지는 루리스의 말에 바이엔은 신음만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자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주겠나, 사법관?”
알아서 찌그러지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루리스의 말에 바이엔은 말없이 일어섰다.
취조실을 나가는 그의 손이 모욕감으로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취조실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도 눈치를 보다가 나가자 나와 루리스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루리스는 히죽 웃으며 바이엔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는 바이엔이 작동시켰던 기록 아티팩트를 종료시키며 물었다.
“어때, 제국의 감방은 괜찮나?”
“음식은 더럽게 맛없고, 화장실은 엉망인 데다 잠자리도 개판이야. 그보다 황궁 지하에 감옥이 왜 있어?”
내가 짜증을 내며 투덜거린 말에 루리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크크, 반역을 저지른 황족들을 비밀리에 가두기 위한 감옥이라더군. 한동안 쓰이지 않던 곳이라 시설이 열악한 것은 어쩔 수 없어.”
비밀 감옥이라, 그래서 처음 들어본 거로군.
황궁 지하에 감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보다…….
“분명히 그날 저녁에 내가 발견했을 때 댁은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어떻게 멀쩡한 거지?”
등에 단검이 박힌 채 쓰러져 있던 그는 살아남더라도 꽤나 오랫동안 침대 신세를 져야 할 부상이었다.
분명 피도 잔뜩 흘렸었던 데다 깊숙이 박힌 단검에 내장도 상했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약간 창백해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멀쩡해 보였다.
내 의문에 그는 좋은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칼라마쉬의 서에는 좋은 것들이 많더군. 그중에서 몇 가지는 내 몸에도 써먹어놨었지. 이번에 그 덕을 톡톡히 봤고 말이야.”
회복을 빠르게 한다거나 뭐 그런 건가.
일단 칼라마쉬의 서에 적힌 거라면 그다지 좋지는 않은 것임은 확실하군.
더 궁금한 건 없냐는 듯 빤히 쳐다보는 그에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범인은 봤나?”
내 물음에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 내가 찔린 곳은 등짝이었다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뒤통수에 눈이 달린 건 아니야.”
끄응, 하긴 그렇겠지.
“네가 나를 데려오게 했다고 주장하던 그 시종. 그 시종은 어떻게 됐지?”
“아, 크레센 말인가.”
분명 건물 입구를 지키던 기사가 시종을 그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맞아. 그 이름을 안다는 건… 정말로 네가 보냈던 거냐?”
“그럴 리가. 난 그 시종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역시…….”
확실히 그 시종이 이 누명을 벗길 가장 중요할 열쇠였어.
“그리고 그 크레센이라는 시종은 아까 전부터 행방이 묘연하다더군. 아마 영원히 찾지 못하겠지.”
“젠장.”
곧바로 이어진 루리스의 말에 나는 욕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될 거라 예상은 했지만 가장 중요한 열쇠가 사라져 버리다니.
나는 잠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루리스의 생각을 알 수 없는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넌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후후, 지금껏 내가 감시해 온 바에 따르면 너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지.”
“그럼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밝히고 진범을 찾는 걸 도와줘.”
내 말에 루리스는 비웃음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로서는 네가 사라져 준다면 참 좋은 일인데.”
“그럼 설마, 네놈이 날 함정에 빠뜨린 범인이냐?”
“그럴 리가. 내가 스스로에게 칼을 꽂아 넣는 무식한 짓을 할 것 같나? 나라면 좀 더 깔끔하고 은밀하게 처리했을 거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넘치는군.
어쩐지 재수 없어.
눈을 찡그리며 쳐다보고 있자니 루리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국 내에 나를 경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번 일도 그들의 소행이겠지. 아마도 이번에 나와 제국에 위협이 되는 너를 동시에 제거하려 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너만 제거되겠군.”
끄응, 아무래도 이 자식은 나를 도울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당연한 것 아니냐? 적인 너를 왜 도와줘?>
‘그냥 혹시나 했지!’
“그럼 뭐 하러 온 거야?!”
“당연히 비웃으러 온 것 아니겠나. 그것도 모르다니, 눈치가 없는 건가.”
“그럼 다 비웃었으면 꺼지시지?”
“안 그래도 그럴 셈이다, 후후.”
용건을 마친 루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조실을 나서려 문고리를 잡는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 일을 이용해서 스승님을 건드리진 마라.”
내 말에 잠시 멈칫한 루리스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걱정 마라, 그녀를 건드리는 놈은 내가 먼저 죽인다.”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스승님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해도 되겠군.
세상에 맙소사, 저 빌어먹을 놈에게 의지하게 될 줄이야.
루리스가 취조실을 나가고 한참 후에야 바이엔이 불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더 이상의 취조는 의미 없다고 판단한 듯 나를 감방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안대를 쓰고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다시 감방으로 돌아왔다.
쇠사슬을 절그럭거리며 구석에 앉은 나는 머릿속으로 새로 얻은 정보들을 되새겨 보았다.
일단 제국 측에서는 나를 범인으로 몰아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열쇠인 시종은 실종되었다.
아마도 입막음을 위해 죽였겠지.
루리스는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 사실을 밝힐 의지가 전혀 없다.
하, 빌어먹을.
전부 안 좋은 정보뿐이잖아.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만… 이러다간 멀쩡한 정신으로 잡아먹히는 감각을 느끼게 생겼어.
* * *
간수들이 식사를 가져다준 걸로 대충 시간을 유추해 보면 루리스가 다녀간 지 사흘 정도가 지났다.
아무것도 없는 감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밖에 없다.
누워서 어두운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일은 엄청나게 지루하다.
너무 지루해서 시간의 흐름조차 느리게 느껴지고, 정신마저 피폐해질 정도다.
다행히도 내 머릿속에는 아득하게 긴 세월을 살아온 드래곤이 있었다.
‘야, 카이서스. 옛날이야기나 몇 개 더 해주라.’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이 몸이 무슨 심심풀이 땅콩인 줄 아느냐?!>
태연하게 이야기를 요구하는 내 말이 거슬렸던지 카이서스가 화를 냈다.
‘가만히 있으면 너도 심심하잖아.’
<흥, 드래곤인 나의 정신력이 너 따위와 같을까 보냐? 수백 년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홀로 지내도 멀쩡한 것이 우리 드래곤이다!>
‘흠, 드래곤들이 하나같이 괴팍한 이유가 아마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뭐야?!>
‘그러지 말고 그냥 이야기나 해줘. 이러다 심심해서 죽어버리면 너도 곤란하잖아.’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인간들을 봐왔지만 심심해서 죽었다는 인간은 못 봤다만?!>
‘축하해. 처음으로 보겠네.’
<끄응, 어쩌다 이런 놈을 만나선… 그러니까 대략 700년쯤 전에…….>
귀찮다는 듯 투덜거리면서도 자연스럽게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이서스의 이야기 대부분은 자기 자랑이거나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그래도 조용한 감방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보다는 그런 이야기라도 듣는 것이 나았다.
<그 순간 이 몸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상인 아가씨를 노리던 도적들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지!>
이야기해 주기 귀찮아하며 투덜거릴 때는 언제고 어느새 잔뜩 흥분해서 떠들고 있었다.
이런저런 불만은 많아도 한번 발동이 걸리면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녀석이니까 말이야.
카이서스가 인간 행세를 하며 돌아다니던 시절의 모험담을 듣던 중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온다.’
발소리가 감방 앞에서 멈추더니 철문 아래쪽의 배식구가 열리며 식판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식사 시간인가.
‘뒷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식사부터 하자고.’
<그런데 그 상인 아가씨가… 응? 벌써 식사 시간이냐?>
자신의 옛날이야기에 빠져 있느라 식사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식판이 놓인 곳으로 다가갔다.
“응?”
<호오?>
식판에 담긴 음식을 본 나와 카이서스가 의아해했다.
평소에 나오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걸쭉한 죽이 아니었다.
구운 소고기와 갓 구운 빵, 샐러드와 스튜, 거기다 사과 반쪽까지.
제대로 된 한 끼 식사였다.
“흐음, 이건 역시…….”
평소와는 달리 갑자기 질이 높아진 식사에 뭔가가 생각난 내가 중얼거리자 카이서스가 말했다.
<조만간 재판이 열릴 모양이로군.>
용의자나 죄수에게 재판, 혹은 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평소보다 좋은 대접을 해준다는 것은 어느 나라나 다 똑같았다.
“그럼 나를 엿 먹이려고 안달 난 놈들 사이에서 빠져나올 준비를 단단히 해둬야겠네.”
사방이 나를 죄인으로 만들려는 상황에서 나의 무죄를 호소하려면 머리를 잘 굴려야 하고, 그러려면 일단 배불리 먹어둬야겠지.
배가 고프면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법이니까.
바닥에 앉아서 식사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감방 문이 열리며 바이엔이 들어섰다.
“1시간 후에 재판이 열린다. 그 전에 준비를 해야 하니 따라오도록.”
준비라니, 뭘 말하는 거지?
내가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자 바이엔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이번 재판은 수많은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에 법정에는 많은 방청객이 올 거라는 이야기지.”
그래서 무슨 준비를 한다는 건데?
<멍청하긴, 보는 눈이 많은데 용의자인 네가 그런 꼴로 나타나면 뭐라고 하겠냐? 몸단장을 시킨다는 소리 아니냐.>
아하, 그렇군.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지저분한 감방 내에서 계속 지낸 탓에 나는 무척이나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꿉꿉한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죄가 확정된 것도 아닌데 내가 이런 모습으로 법정에 모습을 드러내면 제국으로서도 곤란하겠지.
일단 나는 타국의 귀족인 데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니까.
죄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도 열악한 대우를 했다는 게 보인다면 이런저런 말이 나오겠지.
“뭐 그런 준비라면 저도 환영이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이엔의 뒤에서 대기하던 기사 둘이 내 곁으로 다가와 안대를 씌웠다.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이동한 곳은 감옥 내로 추정되는 목욕탕이었다.
기사들의 감시 속에서 씻는 것은 조금 불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간만의 목욕을 마치고, 그들이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투박한 회색 옷은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이 입는 옷이라고 했다.
죄를 뜻하는 흑색과 무죄를 뜻하는 백색 사이의 회색.
뭐, 정작 죄수들이 입는 죄수복은 대부분 푸른색이지만 말이야.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나오자 다시 안대가 씌워진 채로 어디론가 끌려갔다.
한참을 걷고, 계단도 오르고. 또 걸었더니… 선선한 바람이 느껴졌다.
간만에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바람을 피부로 느낄 새도 없이 마차에 올라선 또 이동했다.
잠시 후 마차에서 내려 또 이동하더니 어딘가로 들어가는 듯했다.
문 여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나를 끌고 온 기사들이 의자에 나를 앉혔다.
조용한 가운데 멀리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긴장하지 마라.>
‘글쎄, 생각보다 긴장은 안 되네.’
이상하게도 목숨이 달린 재판인데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하, 이 몸이 인간들의 법정 따위에 서게 될 줄이야. 다른 놈들이 알면 비웃겠군.>
‘걱정 마. 법정에 서는 건 네가 아니라 나잖아.’
<쳇, 네가 나고 내가 네놈인데 무슨 차이냐. 다른 놈들은 그렇게 생각할 거다.>
‘흠, 그런가?’
카이서스와 잡담을 나누며 얼마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피고인을 입장시키라고 하십니다.”
기사들이 앉아 있던 나를 일으켜 세우곤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작게 들리던 웅성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확실히 방청객이 꽤나 많이 온 모양이다.
“모두 정숙하시오!”
아마도 재판장이라 짐작되는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주변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피고인의 안대를 벗기시게.”
안대가 벗겨지며 법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