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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69화 (69/150)

069화 - 초대

대륙력 757년 4월 17일.

어젯밤의 일로 한참이나 뒤척이다 늦게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눈이 떠졌다.

황궁에서 쓰는 물건답게 침대는 푹신하고, 이불은 부드러웠다.

게다가 봄이 되어 날씨도 포근해진 덕분에 숙면을 취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잠을 푹 잘 수 없었던 건 역시 어젯밤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피로가 풀리지 않아 조금은 퀭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루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서 푹 쉬고 싶다.

비록 이곳에 비하면 허름한 집에 낡은 침대와 이불이지만 맘 편하게 푹 쉴 수 있는 편안한 곳인데 말이야.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에서 가볍게 세수를 하고 잠기운을 억지로 쫓아냈다.

멍하던 정신이 조금이나마 맑아졌다.

아직까지 딱히 정해진 일정은 없으니… 아침 식사 후에 스승님께 어젯밤의 일에 대해서 여쭤봐야겠어.

준비를 마치고 식당으로 가서 시종이 내어온 차를 한잔 마시고 있자니 사절단의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나왔다.

“좋은 아침이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침 인사를 나누며 제각기 자리에 앉는 사절단원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만찬회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으니까.

“피곤해 보이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잔 건가?”

단원 중 하나가 내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레 물어왔다.

“…밤중에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잠을 좀 설쳤네요.”

사람의 언어를 쓰긴 했지만 개소리나 다름없는 소리였지.

“응? 개 짖는 소리라니? 나는 못 들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황궁에서 누가 개를 키우는 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에게 멋쩍게 웃어주었다.

시종들이 아침 식사를 하나둘 내어왔다.

마지막으로 식당에 들어선 이는 스승님이었다.

스승님도 어젯밤의 일로 인해 제대로 잠을 못 잔 것인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종이 스승님의 앞에 아침 식사를 내려놓았다.

스승님은 고민이 가득한 표정으로 식사가 담긴 접시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식사를 시작했다.

포크와 나이프가 가끔씩 접시와 부딪치는 달그락 소리만이 식당에 울렸다.

“아, 그러고 보니 라엘 자작, 어젯밤에 어딘가 급히 나가던데… 무슨 일 있었나?”

어젯밤 스승님을 쫓아 별궁을 나서기 전 나를 불러 세웠던 사절단원이 문뜩 생각났다는 듯 물어왔다.

그는 나름대로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거겠지.

“라엘 자작, 여긴 제국의 황궁이네. 자네 멋대로 돌아다니다간 난처해질 수도 있어.”

사절단장 마일렌 공작이 그 말을 듣고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간밤에 가슴이 답답해서 이 앞 정원에 바람 좀 쐬러 나갔었습니다.”

“흠, 이 근처 정원 정도라면… 괜찮겠지.”

별궁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간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내 말에 마일렌 공작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제국의 태도에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단 한 사람, 표정이 굳은 사람이 있었다.

스승님이었다.

내가 어젯밤 정원으로 나갔다는 말에서 뭔가를 눈치채신 거겠지.

지난밤 나의 외출에 대해 말한 단원 덕에 말문이 트인 사람들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제국 측의 태도에 대해 투덜거리며 아침 식사를 이어나갔다.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더해진 가운데, 나와 스승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했다.

“음, 그럼 나는 점심 약속 준비나 하러 먼저 방으로 가보겠소.”

식사를 마치고 차까지 마신 마일렌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지난밤 라프마 공작이 초대했던 점심 식사를 말하는 것이다.

평범한 식사 약속이 아니라 왕국의 공작과 제국의 공작이 만나는 자리다.

아무래도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이 많겠지.

“그럼 저도 도움이 될 만한 제국 귀족들에게 접촉해 보겠습니다.”

“저 역시.”

그 뒤를 따라 다른 사절단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느니 뭔가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나둘 다른 사절단원들이 식당을 뜨자 어느새 나와 스승님만이 식탁에 앉아 있게 되었다.

빈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스승님이 나를 슬쩍 쳐다보며 먼저 말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예.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내 대답에 스승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방으로 따라오렴. 거기서 이야기하자꾸나.”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스승님의 뒤를 따라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설 때까지 스승님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뒤따라 방으로 들어온 내가 문을 닫자마자 스승님이 내 눈을 바라보며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본 거니?”

이미 짐작했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려는데 밖으로 나가시는 스승님을 봤습니다. 이상해서 따라 나갔다가… 루리스와 대화하시는 것을 봤고요.”

“후, 그랬구나.”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 스승님은 이마를 짚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한참동안 말이 없으시기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째서 루리스가 여기에…….”

내 물음에도 잠시 침묵하던 스승님은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조용히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단정한 필기체로 메시지가 적혀 있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잇조각이었다.

[정원의 가장 큰 정원수 아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방으로 돌아와서 씻고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질 않더구나. 책이나 읽을까 하던 차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에 나가봤더니 문 앞에 이 쪽지가 놓여 있었단다.”

분명 별궁 안에는 크라우드에서 함께 온 수행원들이 있는데도 그들의 눈을 피해 몰래 들어와 쪽지를 두고 갔단 거군.

스승님은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누구인지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보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단다. 그 아이가 보낸 것이라는 걸…….”

20년 가까이 키우다시피 해온 사람의 필체니 단번에 알아보신 거겠지.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나간 건데… 그걸 네가 볼 줄은 몰랐구나.”

“그자가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인 겁니까?”

“지금까지의 일들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지금이라도 크라우드를 버리고 자신의 곁으로 오라고 하더구나. 물론 거절했지만.”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스승님에게 직접 들으니 소름이 돋는군.

대체 그 인간의 스승님에 대한 집착은 얼마나 되는 거야?

그리고 지금까지의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니, 또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스승님이 문뜩 뭔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혹시 그것도… 본 거니?”

부정해 주기를 바라는 표정을 보아하니 스승님이 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루리스가 강제로 입을 맞췄던 것을 말하는 거겠지.

“…네.”

숨어서 지켜봤다고 했는데 그것만 못 봤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내 대답에 스승님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건 잊어다오.”

“네.”

그 후로 잠시 침묵하던 스승님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젠 확신할 수 있겠구나.”

“무엇을 말입니까.”

“루리스는 이미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란 것을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스승님의 눈에는 더 이상의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그를 적으로서 상대할 결심이 서신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어제 일 때문에 피곤하실 텐데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나는 스승님의 방을 나와 바로 옆방인 내 방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스승님이 결심하셨다면 나는 곁에서 최선을 다해 돕는다.

그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

나는 방문 앞에 방해하지 말라는 팻말을 걸어두고는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앉아 정신을 집중하여 수련을 시작했다.

* * *

점심까지 거르고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수련을 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허기가 느껴져 방에서 나왔다.

식당으로 가니 이미 다들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모여 있었다.

“오, 라엘 자작. 오늘 점심때 안 보이던데. 무슨 일 있었나?”

먼저 와서 식사를 하고 있던 사절단원 중 하나가 물어왔다.

“요즘 수련이 좀 부족한 것 같아 집중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어 있더군요.”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며 대답하자 다른 사절단원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겨우 스물두 살에 6서클이란 경지에 오른 자네가 수련이 부족하다니? 그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화낼 걸세.”

그 말에 누군가가 옆에서 끼어들며 대신 대답했다.

“허허, 맞는 말이잖습니까. 얻어맞을 말이라 문제지만.”

그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응? 그건 그렇구려!”

“하하하!”

조금은 놀림당한 기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많이 풀린 듯하니 다행이네.

어두운 표정이던 스승님도 그 농담이 재미있었는지 작게 웃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던 도중 누군가 문뜩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마일렌 공작님이 늦으시는군요.”

“흠, 아무래도 저녁 식사까지 하고 오시는 모양입니다. 이야기가 꽤 길어지시는 모양이군요.”

“흠, 이야기가 잘 풀려야 할 텐데… 그렇지, 아침에 제국 귀족들과 접촉해 본다 하셨던 것은 어떻게들 되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내일 제국 상계에서 꽤나 큰 발언권을 지닌 지니어스 백작과 만날 약속을 잡았습니다.”

“저도 황실 기사단의 전대 단장인 크롬웰 후작의 저택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둘씩 제국 고위 인물들과 만나기로 한 것을 말했다.

황제의 눈치가 보여 사절단원들이 만나고자 해도 만나주지 않던 자들이었다.

어제 저녁 황제를 알현하고 만찬을 함께한 덕분일까.

이제야 만나주는 모양이다.

다들 제각기 약속을 잡았는 데 비해 아무런 일정도 없는 것은 아무래도 나와 스승님뿐인 모양이었다.

뭐, 애초에 우리 둘은 외교 목적으로 온 다른 사람들과 목적이 다르니까.

루리스를 직접 만나보기 위함이었는데 그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루리스의 목적 중 하나가 스승님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나와 스승님으로서는 조용히 있다가 무사히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라엘 자작님, 카밀라 님.”

수행원 하나가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나와 스승님에게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내가 무슨 일인가 해서 쳐다보자 수행원이 편지 하나를 건넸다.

“타이런 제국의 유리아 발더스 후작님이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초대장?

나와 스승님은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유리아 발더스, 타이런 제국에 속한 3개의 마법병단 중 제3마법병단장.

우리는 그녀를 만나본 적 있다.

지난번 쉘던 왕국에 언데드 로드가 나타났을 때, 타이런 제국에서 파견한 유일한 대마법사이니까.

그때 함께 행동하고, 전투를 치르기는 했으나 우리와는 거리를 두고 대화는 거의 나누지는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갑자기 초대를……?

“열어보렴.”

스승님이 내 손에 든 초대장을 눈짓하며 말했다.

나는 조심스레 봉투를 봉인한 밀랍을 뜯어 내용물을 꺼내 스승님과 함께 읽었다.

[4월 18일 오후 1시, 제3마법병단 본부의 병단장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유리아 발더스]

초대장에 적힌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내가 의견을 묻자 스승님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초대장을 가져온 수행원에게 물었다.

“초대장을 가져온 사람은?”

“그게… 초대장을 주곤 그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수행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초대장을 전달하는 자들은 그 대답을 들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흐음.”

수행원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스승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기다리겠다 하는 것이나 배달부가 곧장 돌아간 것을 보아하니… 거절은 거절하겠다는 뜻인 모양이로구나. 아무래도 가보는 것이 좋겠다.”

확실히, 제국에 3개밖에 없는 마법병단 중 하나의 병단장이다.

기다린다고까지 했는데 가지 않으면 괜한 악감정이 생기겠지.

대체 그녀가 우릴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나와 스승님은 별 내용이 적히지 않은 초대장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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