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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68화 (68/150)

068화 - 구름 낀 밤

만찬회는 길게 이어졌다.

음식을 다 먹은 이후에는 당연하다는 듯 술자리가 이어졌다.

술이 한두 잔씩 들어가며 분위기도 조금씩 화기애애해졌다.

제국 사람들은 황제와 마찬가지로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는 나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았는지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다.

물론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나저나 황제께서 저희가 도착한 이후 닷새 동안 부르지 않고 내버려 두신 연유에 대해서 아시는지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마일렌 공작이 물은 말에 다들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의 물음에 라프마 공작은 흐음, 하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흠, 흠… 솔직히 귀공도 그 이유는 대충 짐작하고 계시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직접 입 밖에 내뱉기는 조금 곤란한 터라… 허허…….”

멋쩍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라프마 공작의 모습에 마일렌 공작은 흐음 하고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그도 황제가 닷새나 사절단을 방치하다시피 내버려 둔 이유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말로는 크라우드 왕국을 환영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환영하지 않으니 알아서 기다가 얌전히 돌아가라는 의미인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제국의 2인자인 라프마 공작의 입으로 재차 그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번 외교 활동으로 뭔가 소득을 얻는 것은 힘들 수도 있겠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마일렌 공작을 웃으며 쳐다보던 라프마 공작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어느새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오늘만 날이 아니니 말입니다, 하하.”

“그러지요.”

어차피 오늘의 만찬은 실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것이 적당했다.

“크라우드 사절단분들을 숙소까지 모셔다 드리게.”

“예.”

라프마 공작의 말에 주변에 숨어 있던 기사가 나와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기사를 따라 우리가 만찬장을 나서려 하기 전 라프마 공작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그렇지. 마일렌 공작님, 내일 저희 집에서 점심이나 같이하시겠습니까?”

“초대해 주시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요.”

사절단으로서 제국의 고위 관료나 귀족과 친분을 쌓고 협력을 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식사 초대에 승낙하는 말에 라프마 공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점심 전에 머물고 계신 곳으로 사람을 보내지요.”

우리는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타고 다시 황궁 외곽의 별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모두 푹 쉬고 내일 봅시다.”

“예.”

다들 그다지 즐거운 기분이 아니었던 터라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정신적으로 피곤했기에 한시라도 빨리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눕고 싶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나는 옆방을 힐끗 쳐다보았다.

스승님이 묵고 계시는 옆방의 문틈 사이로는 아무런 불빛도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미 주무시고 계신 건가?

나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스승님의 방을 쳐다보다가 내 방으로 들어갔다.

불편한 예복을 벗어 던지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자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으으,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피곤한 하루였어.

빨리 자야겠군.

만찬에서 나도 제국 사람들이 권하는 술을 몇 잔 마신 터라 조금씩 올라오는 술기운에 하품을 하며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눕기 전, 바로 옆으로 나 있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던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분명히 옆방에서 자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스승님이 정원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네 스승 말이다. 혹시 몽유병 같은 것도 있었던가?>

카이서스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무시하고 나는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응? 라엘 자작, 이 밤중에 어딜 가는가?”

아직 방에 들어가지 않고 복도를 서성이던 사절단원 중 한 명이 나를 보곤 물었지만 무시하곤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스승님은 대체 어디로 가신 거지?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스승님이 가셨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제국의 황궁 내부를 이렇게 멋대로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그런 물음이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지만 스승님에 대한 걱정이 더 우선이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헤매던 도중 별궁의 정원 한쪽 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높게 자란 정원수로 가려져 달빛이 닿지 않아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원수 아래에 두 개의 사람 그림자가 있었다.

나는 들키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조금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은 채 숨어서 두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다.

어둡기는 했지만 카이서스의 심장으로 눈이 밝아진 덕분에 대충 알아보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한 사람은 내가 짐작한 대로 스승님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는 눈을 의심했다.

<야, 저 인간이 네 스승이랑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카이서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어왔다.

그건 오히려 내가 더 묻고 싶은 말이었다.

루리스 저 인간이 왜 여기서 스승님이랑 단둘이 있지?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지켜보았다.

“…그래서 할 말은 그것이 다이냐?”

이미 두 사람의 대화는 끝나가는 분위기인 듯했다.

“아니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스승님의 말에 루리스는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말을 높이는 걸 보니 안 좋게 갈라선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옛 스승에 대한 예우는 해주는군.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좀 전에 네가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마.”

냉정하게 잘라 말하고 돌아서려 하는 스승님의 팔을 루리스가 손을 뻗어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무슨?”

당황스러워하는 스승님의 입에 루리스가 억지로 입술을 겹쳤다.

“읍?!”

경악으로 크게 떠지는 스승님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호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냐?>

나도 몰라!

충격으로 몸이 굳었는지 잠시 가만히 있던 스승님이 황급히 루리스를 힘껏 밀쳐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나직하지만 분노가 가득 실린 목소리로 말하며 스승님은 손으로 입술을 거칠게 닦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스승님의 모습에 루리스는 차갑게 대답했다.

“…나를 거부한다 해도 상관없어. 강제로라도 내 곁에 둘 테니. 두고 봐, 언젠가 당신은 내 곁에 있게 될 거야.”

이제는 옛 스승에 대한 예우조차 없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루리스의 모습에 스승님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돌아섰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스승님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그대로 돌아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소로 걸어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직도 나는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아직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모양인데?>

‘그래, 아무래도 내일 스승님과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카이서스의 말에 동의하며 루리스가 있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 순간.

“히익!”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꼴사나운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왜 그러지? 못 볼 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로군, 후배.”

달빛 아래에 드러난 루리스의 얼굴이 코앞에서 웃고 있었다.

<허, 이놈은 암살자 훈련도 받았나.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구만?>

깜짝 놀라서 굳어 있는 나를 싸늘하게 웃으며 쳐다보던 루리스가 일어나라는 듯 손짓했다.

“따라와. 일단 자리를 옮기지.”

아무래도 그는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솔직히 그를 순순히 따라가기는 싫었지만 황궁 내에서 소란을 피워봐야 곤란해지는 것은 나였으니까.

그는 나를 이끌고 별궁 담장 너머에 세워둔 마차로 향했다.

“일단 타지. 조금 전처럼 누가 대화를 몰래 엿듣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흠, 이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로군.

나는 순순히 루리스를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지붕 덮인 마차인 데다 창문도 커튼으로 가려진 탓에 바깥과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조명이라고는 마차 천장에 매달린 램프 하나가 다였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내 물음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리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사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친목을 도모할 사이는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너, 내 동료가 되어라.”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무슨 밀짚모자 쓰고 다니는 범죄자 놈도 아니고 말이야.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제국 편에 서라고요? 싫습니다.”

내가 생각할 것도 없이 즉시 대답하자 루리스는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훗, 힘없는 자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어디든 마찬가지다. 그리고 난 제국의 편에 서라고 한 것이 아니다. 나의 옆에 서라고 한 거지.”

응? 그게 그거 아닌가?

<멍청하긴, 저 말은 자신과 제국을 별개로 생각하라는 말이지 않느냐.>

그렇다는 건… 루리스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제국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건가?

그럼 루리스의 목적은 대체 뭐야?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니, 굳이 생각할 것도 없지.

제국이건 루리스건 뜻을 함께할 생각 따위는 없다.

“그것도 거절하겠어요. 내게 있어서 당신이나 제국이나 그게 그거니까.”

“훗, 그런가?”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루리스가 손깍지를 끼며 등받이에 등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아니, 그럼 대체 왜 물어본 건데?

<그냥 놀리는 거 같은데?>

절로 찡그려진 내 얼굴에 그는 작게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로군.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말이야……”

말끝을 흐리며 그는 갑자기 내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와 그의 얼굴의 간격은 고작 한 뼘 정도의 거리.

숨결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설마 이 새끼, 아까 같은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응? 아까 같은 짓이라니? 설마… 그랬다간 그대로 주먹을 면상에 꽂아줄 거야!

다행히도 그의 얼굴이 더 이상 가까워지는 일은 없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질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해할 수 없겠지, 후후후.”

그 대신 싸늘하게 내리깐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뒤로 등을 기댔다.

마치 ‘용건은 이게 끝이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대화를 해보려고 마음을 먹기는 했으나 당최 말이 통하지 않다 보니 절로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나왔다.

나의 짜증에 그는 귀찮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갑작스러운 변덕으로 인한 일종의 경고라고 해두지.”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변덕이라… 역시 당신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네요.”

내 말에 그는 씩 웃어 보였다.

상쾌하다거나 보기 좋은 그런 종류의 미소가 아닌,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미쳐야만 보이는 길도 있는 법이지.”

광기가 은연중에 묻어 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아무 대꾸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거, 제대로 미친 놈만이 보일 수 있는 눈빛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재미있다는 듯 응시하던 루리스는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이걸로 할 말은 끝. 이만 마차에서 내려줬으면 좋겠군. 나도 이만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거든.”

“더 할 말이 없다니 다행이군요.”

그와 단둘이라는 것 자체가 불편한 일이었기에 나는 그대로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의 문을 닫기 직전, 루리스가 말했다.

“네가 아무리 방해한다 해도 나는 카밀라를 데리고 갈 거다, 후배.”

더 이상 상대를 해줄 생각 같은 건 없었지만 그 말에 뭔가 짜증이 나서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누가 스승님을 넘겨준답니까? 그리고 난 댁을 선배라고 인정 안 하거든요?”

“훗, 그렇겠지.”

피식 웃으며 무시하듯 대답하는 그의 모습이 꼴 보기가 싫어 마차 문을 거칠게 닫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숙소인 별궁으로 걸어갔다.

등 뒤로 마차가 출발하는 소리를 들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리스 저 인간의 꿍꿍이는 대체 뭘까.

칼라마쉬의 서를 손에 넣고, 제국을 뒤에서 조종하면서 이루려고 하는 것은 대체…….

일단 놈이 노리는 것 중 하나가 스승님인 건 알겠는데, 나머지 목적을 모르겠단 말이지…….

<뭘 고민하고 있는 거냐? 미친놈의 생각을 짐작하려 드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데.>

내가 고민에 잠겨 있자 카이서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흠, 확실히 내가 지금 아무리 고민해 봐야 그의 목적을 알아내기는 어렵겠지.

<그보다는 네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 거다. 잊은 건 아니겠지? 한시라도 빨리 서클 브레이커에 오르지 않으면 너도 나도 끝장이니까.>

‘끄응, 알고 있어. 잊지 않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럼 됐다.>

확실히 카이서스의 말대로 내 몸의 문제도 무시할 게 못 되니… 골치가 아프군.

일단은 계속해서 수련을 해서 서클을 높여가야겠어.

그러면서 루리스의 계획에 대응해 나가야겠지.

내 능력이 높아질수록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응하기도 쉬워질 테고, 그러다 보면 차차 루리스의 목적도 알 수 있겠지.

생각을 마친 것과 동시에 별궁의 입구에 도착했다.

별궁에 들어서기 전,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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