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 드래곤-67화 (67/150)

067화 - 만찬장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제국의 고위 관료와 귀족들로 보이는 자들이었다.

황제의 집무실과 마찬가지로 눈에 잘 띄지 않는 기둥 뒤와 같은 곳에 기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아직까지는 황제의 자리는 비어 있다.

“크라우드 왕국의 사절단분들이 입장하십니다.”

우리를 안내한 내무부원이 목소리를 높여 만찬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말에 그들 중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하하, 어서들 오십시오. 나는 타이런의 재상인 라프마 리프인 공작입니다.”

재상… 이라면 이 자리에 온 제국 측의 사람들 중 가장 높은 사람인 모양이군.

“반갑습니다. 크라우드 왕국 사절단의 대표인 마일렌 사이닉 공작입니다.”

“아, 마일렌 공작!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다니, 반갑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나라의 공작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악수를 나누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은 웃는 낯이었으나 아마 속으로는 구렁이를 수백 마리는 품고 있을 터였다.

<흥, 인간들이란. 정말이지 겉과 속이 다르다니까.>

“아, 이렇게 서 있을 게 아니라 일단 모두들 자리에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라프마 공작이 자리를 권하는 말에 사절단은 황실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식탁의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시종들이 차를 내어왔다.

부유하기 짝이 없는 제국답게 찻잔도, 그 안에 담긴 차도 무척이나 값비싼 것이었다.

물론 나야 이쪽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지만.

차를 마실 때의 매너에 대해서는 나도 배우기는 했지만 어릴 때부터 강도 높게 배우고 몸에 익혀온 사람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했다.

실수하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느라 쩔쩔맸다.

평소와는 달리 이런 자리에서는 찻잔을 드는 손가락의 위치나 모양까지도 신경 써야 했으니까.

정말이지 높으신 분들의 문화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인간들은 무슨 쓸데없는 허례허식들이 이렇게 많은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그게 바로 인간들만의 특징이지.

실수하지 않도록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주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본 제국과 크라우드 왕국의 관계가 틀어져서 유감입니다.”

라프마 공작의 말에 마일렌 공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서로의 주장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 견해차를 잘 조율해서 줄여 나가는 것이 저희의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다들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그 이면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최근의 전쟁 이후 양국 간의 외교는 물론이고 무역까지도 중지되었지요.”

라프마 공작이 웃음기 띤 얼굴로 말하자 마일렌 공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네. 그렇지요. 그 탓에 많은 사람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라프마 공작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되물었다.

“흠, 그랬던가요?”

마치 너희 같은 소국은 그랬을지 몰라도 우리는 전혀 피해를 본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으음…….”

산전수전 다 겪은 마일렌 공작으로서도 할 말을 잃고 침음을 길게 흘렸다.

“아, 그나저나, 다른 사절단원분들도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함인지 라프마 공작이 다른 사절단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말에 사절단원이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스승님의 차례가 되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스승님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적색 마탑의 주인인 카밀라 루드비히입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스승님의 이름이 나오자 제국 관료들과 귀족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이 칼라마쉬의 서를 가져갔다고 지목한 것이 바로 청색 마탑과 적색 마탑이었으니까.

그 두 마탑 중 하나의 주인이 버젓이 제국의 중심부에 나타났으니 제국의 지도부들로서는 불편할 만도 하겠지.

불편해진 분위기에도 스승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다음 차례는 나였다.

…음, 잔뜩 얼어붙은 이 분위기에서 내 소개를 하라고?

거참 분위기가 더 좋아지겠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터라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절단에서 가장 젊은 내가 일어서자 사람들의 눈에 호기심이 살짝 떠올랐다.

“적색 마탑주님의 제자인 라엘 드리안 자작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내 이름을 들어도 별 반응이 없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내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찡그리더니 자기네끼리 수군거렸다.

“적색 마탑주의 제자라면 분명…….”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

“메테오…….”

분위기가 싸해지다 못해 이미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그럴 만도 한 게 지난번, 다 이겼던 전쟁을 나로 인해 오히려 엄청난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만 했었으니까.

잔뜩 경계하며 쳐다보는 제국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았음에도 계속해서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다.

뭔가 대화라도 오고 가면 좀 나을 텐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뭔가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때마침 황제가 입장한다는 시종의 외침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저벅 저벅 저벅.

조용해진 만찬장 안으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다른 발소리는 황제를 보필하는 시종인가?

누군가가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모두 고개를 들라.”

황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들어 황제가 앉은 자리를 쳐다보았다.

아까 전에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른한 태도로 앉은 황제는 크고 넓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런 황제의 곁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어두운 갈색 머리는 뒤로 묶고, 훤칠한 듯하면서도 어둡고 음울한 인상, 왼쪽 눈가에 깊은 흉터 자국…….

<야, 저놈이 그놈 아니냐?>

카이서스의 물음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리스, 바로 그였다.

설마하니 이렇게 빨리 이런 자리에 나타날 줄이야.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문 채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내 옆자리, 스승님이 앉은 자리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때와 장소에서 그가 등장하자 스승님은 충격을 받은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떨리는 눈동자로 루리스를 쳐다보던 스승님은 차마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루리스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시선으로 스승님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다.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양국의 관계 개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도중이었습니다, 폐하.”

황제의 물음에 라프마 공작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황제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젓더니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건 그대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여봐라, 음식을 내오거라.”

만찬장의 한쪽 문이 열리며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든 시종, 시녀 수십 명이 줄줄이 들어왔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찻잔들이 치워지고 순식간에 수많은 음식들이 가득 채워졌다.

대부분이 흔하게 접하기 어려운 고급스러운 요리들이었다.

“오늘은 골치 아픈 이야기들은 접어두고 만찬을 즐기도록 하지.”

“예! 폐하!”

황제가 식사를 시작하며 말하자 모두 대답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다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와중에도 황제의 뒤에 선 루리스는 스승님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다.

스승님은 억지로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여 식사를 하고는 있었지만 표정이 어두웠다.

나 역시도 음식을 계속 입안에 가지고 가고는 있었지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스승님 덕분에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게 된 나였으나 지금은 맛을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 깜빡할 뻔했군. 한 사람을 소개하도록 하지.”

식사를 하다 말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하는 황제의 모습에 모두가 하던 것을 멈추었다.

“앞으로 나오게.”

황제가 부르자 뒤에 서 있던 루리스가 조용히 앞으로 나서며 예를 취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얼마 전에 황제 폐하께 작위를 받은 루리스 크리스토 백작이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음울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는 루리스가 입을 다물자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크라우드 사절단은 물론이고 본국의 사람들도 처음 보는 자들이 많을 것이야. 이 자리에서 소개하지. 새로 창설할 군대의 사령관이라네.”

그의 말에 우리는 물론이고 제국 관료와 귀족들도 웅성거렸다.

“새로운 군대라니요?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거기다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자를 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니요. 검증이 필요하다고 사료되옵니다, 폐하.”

신하들의 반발에도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대꾸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사안이니 그에 대해서는 더 왈가왈부하지 말라. 그보다…….”

황제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스승님을 쳐다보았다.

“듣자 하니 크리스토 백작과 그대는 아는 사이라던데?”

“…….”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황제의 물음에 스승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 인간… 설마 알면서도 물어보는 건가.

내가 다 화날 정도다.

<크으,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개자식이로군.>

“아닌가?”

재차 물어보는 황제의 물음에 스승님은 힘겹게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옛… 제자였었지요.”

스승님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킨 복잡한 시선으로 루리스를 응시했다.

스승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두 사람의 관계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제국 쪽에서는 제국의 군대를 맡게 될 사람이 크라우드 왕국의 사람이었다는 것에.

우리 사절단에서는 그 반대의 이유로.

모두가 당황해서 할 말을 잃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던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재미있지 않나. 친애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두 사람이 완전히 갈라서서 대립하는 관계로 다시 만나는 것 말이야. 난 이런 게 좋더라고.”

스승님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으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타이커스 황제에 대해서 들은 것은 많지만 직접 겪은 것은 얼마 없기에 판단은 유보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들어온 몇 가지는 확실히 사실인 것 같군.

가학적인 성향에 잔혹하고 자기중심적이라고 말이야.

그런 게 좋다니, 대체 얼마나 인성이 쓰레기여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황제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다시 식사를 하자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살피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불편해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아마도 스승님은 나보다도 더하시겠지.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 자리가 끝났으면 했다.

그러나 이런 만찬 자리는 나오는 음식도 많고, 오고 가는 대화도 많다 보니 자리가 길어지기 마련이었다.

불편한 식사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하아, 내 인생 최악의 식사 시간이로군.

초반을 제외하면 황제는 특유의 뒤틀린 미소를 띤 채로 묵묵히 식사를 하며 사람들을 구경할 뿐이었다.

그리고 루리스는 그런 그의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 순간 루리스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찡그려지며 나를 노려보았다.

증오로 가득찬 시선.

그렇겠지, 몇 번이고 그의 계획을 방해했던 것이 바로 나니까.

잠시 나를 노려보던 루리스는 이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고개를 돌렸다.

뭐지, 저 웃음은?

어쩐지 불안함에 몸이 오싹해져 옴을 느꼈다.

루리스는 황제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그의 속삭임을 들은 황제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가 하던 것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오늘은 좀 피곤하구나. 짐은 이만 쉬러 가보겠노라.”

“편안한 밤 되시옵소서.”

만찬장 안의 모든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황제는 루리스를 이끌고서 만찬장을 여유롭게 떠나갔다.

황제가 만찬장을 나가자 너 나 할 것 없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괴팍한 성격의 황제가 불편한 것은 우리나 제국의 사람들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흠흠, 카밀라 님에게는 내 대신 사과드리리다. 우리 폐하께서 꽤 직설적이신 분이다 보니.”

라프마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스승님에게 말했다.

보통은 그걸 직설적인 거라기보다는 개새끼라고 부르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기에 순화한 거겠지.

아무리 대립하는 입장이라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황제의 행동이 심하다 느껴졌던 모양이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말한 스승님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속이 조금 좋지 않아서 먼저 일어나 보려 합니다만,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스승님의 말에 라프마 공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보게, 이분을 숙소까지 모셔다 드리게.”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기사를 불러 모셔다 주라고 했다.

“예.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기사를 따라 스승님이 만찬장을 나서려 하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스승님,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자 스승님이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내 어깨를 살짝 눌러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니다. 너는 다른 분들과 같이 있으렴.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그렇게까지 말씀하시기에 어쩔 수 없이 나는 자리에 남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었고, 나는 억지로라도 스승님을 따라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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