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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66화 (66/150)

066화 - 황제 타이커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사절단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제국의 수도 하이넨에 도착한 지도 닷새째.

우리는 넓은 황궁의 외곽에 위치한 별궁 중 하나를 배정받았다.

숙소를 배정받은 후에 제국은 우리를 전혀 부르지 않았다.

마치 무시라도 하는 것처럼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제국의 주인인 황제는 물론이고 제국의 고위급 관료들이나 귀족들도 사절단을 초대하지 않았다.

초대도 받지 않았는데 먼저 찾아갈 수는 없었기에 우리 사절단은 숙소로 배정받은 별궁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다였다.

물론 손님으로 온 것인 만큼 식사라든가 이부자리 같은 대접에는 소홀함이 없었으나 지루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개인 시간을 제외하면 이렇게 별궁의 홀에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 제국 입장에서도 우리가 그리 반갑지만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우리를 언제 만날지는 황제의 마음 아니겠는가.”

‘아예 만나주지 않을 수도 있겠지.’

사절단장인 마일렌 공작이 웃으며 한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그럼 이렇게 멍때리다가 그냥 돌아가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 어쩌면 더 나쁠 수도 있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곳이 제국의 심장부인지라 긴장을 완전히 풀 수조차 없었다.

다들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인지 말없이 차만 마시며 앉아 있는데 별궁 안으로 제복을 걸친 사내가 들어왔다.

“크라우드 왕국 사절단장이신 마일렌 사이닉 공작님 계십니까?”

“내가 마일렌이네.”

마일렌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제복을 걸친 사내에게 대답했다.

제복의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말했다.

“황실 내무부에서 왔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한 시간 후에 여러분을 만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채비를 마치시고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엥? 겨우 한 시간 뒤라고?!

황제와의 만찬을 준비하기에는 조금 빠듯한 시간이로군.

그런 걸 이렇게 늦게 통보한단 말이야?

“흐음, 한 시간 뒤라니, 너무 시간이 촉박한 것 같군.”

마일렌 공작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살짝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제국 내무부원은 그 말에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정하셨기에… 저희도 곧장 알려 드리는 겁니다.”

흠, 그러니까 일부러 늦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갑자기 만나기로 했다는 거구만.

황제도 제멋대로네.

그 말에 마일렌 공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황제 폐하께서 그리 정하신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준비하고 있겠네.”

마일렌 공작의 대답을 들은 내무부원은 용건을 끝마쳤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제국의 내무부원이 나가자 마일렌 공작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자, 다들 들었겠지요. 준비들 합시다. 제국의 황제를 만나는 자리이니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예.”

공작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방으로 갔다.

나도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가 옷 가방을 열었다.

사절단원들에게 지급된 예복을 꺼내어 갈아입기 시작했다.

카리야 황녀는 만나본 적이 있지만 황제를 만나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일까.

대륙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두 개의 제국 중 하나의 황제.

그리고 지금껏 일어난 일들의 주모자 중 하나.

타이커스 프리드리히 타이런.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에 침이 꿀꺽 삼켜진다.

<흥, 그래 봐야 한낱 인간이지.>

드래곤인 카이서스에게는 황제건 아니건 그게 그거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어쩌면… 황제와 만나는 자리에 루리스가 나타날지도 몰라.

더욱 긴장을 늦추어선 안 돼.

나는 예복의 넥타이를 매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방을 나섰다.

회랑으로 나오니 이미 다른 사람들은 다들 준비를 마치고 나와서 황제와의 만찬 자리에서 거론할 외교적 안건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었다.

예복을 입는 것은 아직 익숙지 않은 편이었기에 내가 마지막으로 나온 듯 했다.

“꾸미고 나오니 꽤 볼만하구나.”

먼저 준비하고 나와 있던 스승님이 나를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나나 스승님이나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손댈 것이 없기에 다른 사절단원들이 회의하는 동안 둘이서 대화를 나누었다.

“스승님도 예복을 입으시니 다른 사람 같으세요.”

“후후, 이상하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내 대답에 스승님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입가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눈가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아마도 루리스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했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신 거예요?”

내 물음에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은 스승님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티가 나니?”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는 스승님의 제자잖아요. 당연히 눈치채죠.”

“그러니…….”

스승님은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아직도 그 아이를 만나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스승님은 그에게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 없어요. 그냥 의연하게 대하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스승님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스승님…….”

내가 뭐라고 더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별궁으로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크라우드 왕국 사절단 여러분,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아까 전에 왔던 내무부원이 다시 와서 물었다.

“우린 준비됐네.”

마일렌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이자 내무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모시겠습니다. 모두 마차에 오르시지요.”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내무부원의 뒤를 따라 별궁을 나서서 마차에 올라탔다.

황궁은 워낙 넓었기에 황제가 있는 중앙의 궁전까지는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외곽의 별궁에서 황궁의 중앙까지는 거리가 꽤 됐으니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마차가 멈추자, 우리는 문을 열고 내렸다.

“와.”

황제를 만난다는 긴장감으로 다물고 있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황제가 머무는 제1궁전은 무척이나 크고 화려했다.

햇빛이 반사되는 새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진 궁전 곳곳에 새겨진 조각과 장식에는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건축이라든가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나이지만 대단하다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사절단의 몇몇 사람들도 황제의 거처의 화려함에 놀라 입을 벌리고 있었다.

<흠, 인간 주제에 꽤 잘 꾸며놨군. 물론 내 기준에는 턱없이 못 미치지만 말이야.>

카이서스가 비웃으며 하는 말에 나의 놀라움이 퇴색되어 버렸다.

‘그렇게 기준이 높으신 드래곤의 둥지는 왜 그런 꼴이셨을까?’

내가 카이서스와 처음 만나던 날 들어갔던 둥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묻자 카이서스가 침음을 흘렸다.

보물 창고는 분명 화려하고 멋졌지만 정작 카이서스 본인이 기거하던 장소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던 것 같은데?

<으음… 그게 좀 여러모로 사정이 있어서 말이다…….>

‘그러시겠지.’

멍하니 서 있는 우리들을 향해 내무부원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그제야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궁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궁전 안은 바깥보다도 더욱 화려했다.

환하게 밝혀진 복도에는 언뜻 보기에도 진귀해 보이는 것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근위기사로 보이는 자들이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서 있었다.

들어서는 자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다들 어깨를 펴시오. 우리는 크라우드 왕국의 사절로서 온 것이니. 너무 긴장해서 실례를 저지르는 일은 없도록 하십시다.”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마일렌 공작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만 긴장한 것이 아니었는지 다른 사람들도 애써 어깨를 펴는 것이 느껴졌다.

기다란 복도를 앞장서서 걷던 내무부원이 커다란 문 앞에서 멈춰 서며 말했다.

“문을 열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계시니 모두 예를 갖추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옷매무새를 정돈하자 내무부원이 문을 열며 외쳤다.

“크라우드 왕국의 사절단입니다, 황제 폐하!”

우리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황제와 시선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우리는 황제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타이런 제국의 위대하신 타이커스 황제 폐하께 크라우드 왕국의 마일렌 사이닉과 사절단 일동이 인사 올립니다.”

사절단을 대표하여 마일렌 공작이 황제에게 인사했다.

“모두 고개를 들라.”

생각보다는 젊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황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옥좌에 기대어 앉은 삼십 대 초반의 사내가 무성의한 태도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에 흥미가 없다는 듯 눈은 나른해 보였고 입가엔 비틀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자가 바로 그 황제 타이커스…….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저 얼굴로 수많은 사람들을 말려들게 한 일들을 지시했다 이거지.

<저놈 참 맘에 안 들게 생겼네.>

카이서스는 황제를 보고는 기분 나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 목소리를 나만이 들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로군.

주변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를 향한 시선들은 느껴졌다.

분명 숨어서 황제를 지키고 있는 근위기사들이겠지.

아마 우리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간 사방에서 칼날이 날아올 거다.

무심하게 우리를 응시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크라우드 왕국에서 사절단이 올 줄은 몰랐군. 내 누이가 다녀오겠다고 고집을 부리기에 보내주기는 했지만 말이야.”

“제국에서 귀하신 분께서 직접 왕림해 주셨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일렌 공작이 웃으며 대답하는 말에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흥,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데. 오히려 귀찮을 뿐인데 말이지.”

미친,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하라고.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해도 그걸 대놓고 말하다니, 제국의 황제는 미친놈인가.

황제의 너무나 솔직한 말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마일렌 공작도 당황했는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피식 웃으며 사절단원의 면면을 훑어보다가 나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관심 없다는 듯 나른하던 그의 눈에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호오, 네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는 자인가?”

내가 사절단 중에서 가장 젊기에 단숨에 알아본 모양이다.

“예.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대답했다.

“흐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생겼군.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데 드래곤의 가호라? 재미있군.”

그러는 댁도 겉보기에는 타이런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황제처럼 생겨먹지는 않았거든?

그보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처럼 생긴 건 대체 어떤 건데?

“송구합니다.”

“뭐, 송구할 것까지야. 그동안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는 게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눈빛을 보아하니 그리 좋은 의도로 보고 싶어 한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그래, 그대를 가호하는 드래곤은 어디 있나? 만나볼 수 있나?”

“송구합니다. 그는 저 이외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탓에…….”

“그런가? 그러면……”

그 후에도 몇 가지를 계속해서 꼬치꼬치 캐묻던 황제는 원하던 대답을 듣지 못하자 이내 흥미가 떨어졌는지 시선을 돌려 마일렌 공작을 쳐다보았다.

“흠, 재미없군. 그럼 이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 크라우드 국왕의 친서는 들고 왔겠지?”

“네. 여기 있습니다.”

마일렌 공작이 들고 온 국왕의 친서를 근처에 서 있던 내무부원에게 건넸다.

화려하게 치장된 두루마리를 내무부원에게서 받아 든 황제는 두루마리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봉인한 밀랍도 뜯지 않고 다시 내무부원에게 건넸다.

“이건 나중에 천천히 읽어보도록 하고… 잠시 후에 저녁 만찬을 열 예정인데 그대들도 참석하겠나? 이미 준비는 하라고 시켜뒀다.”

말이야 물어보는 거지만 참석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측으로서는 거절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저희로서는 초대받는 것 자체가 영광이니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마일렌 공작의 예를 한껏 차린 대답에 황제는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면 나중에 다시 보지. 짐은 볼일이 있어 나중에 갈 터이니. 여봐라, 이들을 만찬장으로 안내하도록.”

우리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조금 전 우리를 안내했던 내무부원을 따라 황제의 집무실을 나왔다.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지만 타국의 사절단에게 너무한 것 아니야?

정말 국력이 약하면 여러모로 서럽다더니…….

사절단의 다른 사람들도 말은 안했지만 나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만찬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무부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들어가시죠.”

복도를 걸어가던 내무부원이 커다란 문을 열며 말했다.

문이 열리자 은은한 음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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