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 합류
“또 그놈인가?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황제의 불쾌하다는 목소리에 루리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걱정 마시길. 그 라엘이라는 놈이 언데드 로드에 대해 알아차릴 거라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입니다. 생각보다 조금 빠르긴 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루리스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하자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쉘던 왕국에서 사신이 도착했다. 언데드 로드를 토벌하는 데 대마법사와 오러 마스터의 지원을 부탁하더군.”
그 말에 루리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뜻대로 해주시지요. 어차피 언데드 로드를 소환하는 실험은 성공했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거절했다간 다른 나라들의 경계심만 더욱 커질 겁니다.”
“흥, 본 제국이 다른 나라의 눈치 따위나 봐야 한다는 건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황제의 말에 루리스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칼라마쉬의 서를 사용할 준비가 완벽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때 폐하의 뜻대로 저들을 벌하소서.”
“크크, 모든 것은 대륙 정벌을 위해서라는 건가… 하긴, 서둘러서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낫겠지.”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웃기지 않나?”
자신들이 만든 것을 토벌하는 데에 자신들의 힘을 보태주어야 한다는 사실에 황제는 피식 웃었다.
“…….”
루리스가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자 황제는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튼, 그래서 얼마나 지원을 보내면 좋겠나.”
“참여는 하되 구색만 맞추는 정도로 하시지요.”
“하긴, 우리가 최선을 다해줄 필요는 없지. 경의 말대로 하지.”
황제는 쉘던 왕국으로 보낼, 생색 내기용의 인원들을 생각하다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라엘이라는 놈, 계속해서 방해가 되는데…….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황제의 말에 루리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황제에게 대답하는 루리스의 눈이 조용히 번뜩였다.
* * *
쉘던 왕국에서 돌아온 나는 외가에 들렀다.
마침 주말이라 출근도 하지 않았기에 느긋하게 가서 점심을 먹었다.
“언데드 로드라고?”
쉘던 왕국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자 외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네. 언데드 로드가 나타난 것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무래도 마물 연구의 선두 주자인 외할아버지다 보니 언데드 로드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도 고서를 통해서 이름만 알고 있는 존재인데… 그것도 드래곤의 지식이냐?”
“음, 그렇죠.”
“놀랍군… 아무튼 그 언데드 로드를 토벌하기 위해 쉘던 왕국이 각국에서 지원을 요청했다고?”
“네. 우리 왕국은 이미 지원을 보내기로 정했다고 하네요.”
“흐음, 언데드 로드라…….”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던 외할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궁에 좀 다녀오마.”
“왕궁은 왜요?”
듣고 있던 어머니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외할아버지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쉘던 왕국으로 가는 인원에 나도 지원하려는 게다!”
“아버지도 참! 나이를 생각하세요! 지난번에 라제스에 나타난 마물은 국왕 전하가 직접 아버지를 보내신 거지만… 자원하는 건 안 돼요!”
“흥, 네가 아무리 뭐라 해도 국왕 전하께 나를 보내달라고 할 거다. 언데드 로드와 같은 엄청난 마물을 직접 구경할 기회가 흔한 줄 아느냐? 직접 보지 못한다면 마물학자로서의 이름이 운다!”
평소에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외할아버지도 마물이라는 말에는 피가 뜨거워지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물학자가 된 거겠지.
“그래도 안 돼요! 아버지 나이를 생각하시라고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어머니의 눈물기 섞인 목소리에 외할아버지는 당황했다.
“으음, 그건…….”
외할아버지는 마물만큼이나 자신의 딸에게 약하시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고민하던 외할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건 모르겠고 난 가련다!”
“아버지!”
막무가내로 나오는 외할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눈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걱정은 말아라. 나는 후방에서 관찰만 할 거고 위험하다 싶으면 몸을 뺄 테니.”
“그래도…….”
뭔가 계속해서 말하려는 어머니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외할아버지가 말했다.
“나보다는 이 녀석이나 걱정하거라.”
“네? 라엘은 왜요?”
뜬금없이 나를 걸고넘어지는 외할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몰라서 묻는 게냐? 국왕 전하께서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고, 언데드 로드에 대한 정보를 지닌 이 녀석을 보내지 않으실 리가 없지 않느냐.”
흠, 하긴 언데드 로드를 상대할 때 카이서스의 지식은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언데드 로드에 대해 최초로 말한 내가 토벌군에 빠진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그런…….”
무척이나 근심하며 말을 채 잇지 못하는 어머니의 말에 외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놈이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인 이상 왕실에서도 호위는 충분히 붙여줄 테니까. 게다가 여차하면 드래곤이 도와줄 텐데 무슨 걱정이냐?”
<흥, 늙은이가 무슨 헛소리를…….>
카이서스가 그 말에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어차피 자기도 죽기 싫으면 지난번처럼 나를 도와주겠지.
카이서스 말로는 자기방어 정도는 세계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내 도움을 기대하고 위험한 짓을 할 생각일랑 마라, 그거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란 말이다.>
‘알아. 어차피 네가 나설 정도가 되려면 내가 죽기 직전까지 가야 한다는 소린데… 나도 고통을 즐기는 그런 취향은 없거든?’
<알면 됐다.>
그럼에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외할아버지가 계속해서 말하며 설득했다.
왕실의 명으로 내려올 것이니 거부하기 힘들 거다… 부터 시작해서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처리하면 앞날이 탄탄대로로 펼쳐진다든가 하는 이야기까지.
흠, 외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그만큼 언데드 로드를 멀리서나마 관찰하고 싶다는 거겠지.
“하아,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변하는 건 없겠죠. 조심하셔야 해요.”
“물론이다!”
어머니의 승낙을 받은 외할아버지는 환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곧장 외출 준비를 하고는 왕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국왕 전하는 승낙하지 않았다.
소중한 마물 연구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거니와 전투력이 약한 외할아버지가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왕궁에서 돌아온 외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실망한 기색이었으나 어머니는 안도했다.
* * *
다음 날 왕궁으로 출근하니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스승님이 내가 방으로 들어서자 웃으며 돌아보았다.
“라엘! 오랜만이구나.”
“스승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쉘던 왕국 일 때문에 올라오신 건가요?”
내 물음에 스승님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만간 트럼벨로 오겠다고 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오게 되었구나.”
내 예상대로 스승님은 왕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은 듯했다.
“흥, 카밀라만 보이고 나는 보이지 않는 게냐?”
“대스승님도 오랜만입니다.”
스승님의 곁에서 투덜거리는 대스승님께도 반가움을 표했다.
“쉘던 왕국에 나타난 언데드 군대와 그 언데드 로드라는 것. 예삿일이 아닌 것 같더구나.”
“네. 카이서스, 그러니까 제 속에 있는 드래곤의 말이 맞다면 한시라도 빨리 처치해야만 해요.”
스승님의 말에 내가 대답하자 대스승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말한 대로의 능력을 지닌 마물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하하, 두 분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오.”
상대가 대마법사들이다 보니 왕자도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마땅히 나서야 하는 일입니다. 대륙의 위협이 될 만한 존재라면 당연히 없애야지요.”
스승님의 말에 대스승님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내가 말한 대로 칼라마쉬의 서를 폐기했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느냐. 나서는 게 당연하지.”
대스승님의 말에 스승님은 힘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대스승님도 참. 지나간 이야기를 해서 뭐 해요?”
내가 툴툴거리며 스승님의 편을 들자 왕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그쯤 해두시고, 선생은 오늘은 수업을 듣지 않을 테니 퇴근하고 쉬도록 하게. 세 사람은 간만에 만나는 것이지 않나.”
간만에 사제 간에 오붓한 시간을 즐기라는 왕자의 배려에 나는 물론이고 스승님도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 * *
나는 스승님과 대스승님을 모시고 왕궁을 나왔다.
왕궁 근처의 식당에 들러 식사를 대접하고 그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되자 내 집을 구경하고 싶다는 스승님의 말에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한창 차를 마시며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누구지?”
나는 의아해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여니 아리안 누나가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리안 누나? 웬일이에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쉘던 왕국에서 일어난 일을 들었거든. 곧 다시 떠난다면서.”
아마도 외가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거겠지.
“네.”
“잘 다녀오란 말을 해주려고 들렀어.”
“고마워요. 아참, 잠시 안으로 들어올래요?”
“으, 응?!”
갑자기 집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그녀는 당황한 듯 되물었다.
“스승님과 대스승님이 오셨거든요.”
“아! 그, 그래?”
아리안 누나는 약간 놀라면서도 아쉬움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어서 들어와요. 스승님도 반가워하실 거예요.”
아리안 누나의 손을 붙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적색 마탑주님과 키린토 님을 뵙습니다.”
“어머, 아리안 아니니?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
나를 따라 들어오는 아리안 누나의 모습에 스승님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마물 연구가이신 네팔렌 백작님의 보조로 파견되어 트럼벨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랬니? 그런데 네팔렌 백작님이라면 라엘의 외할아버지잖니.”
“네.”
“묘한 인연이구나.”
스승님은 미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아이는 누구냐?”
그러고 보니 대스승님과 아리안 누나는 직접 대면하는 것이 처음이던가?
“아… 처음 뵙겠습니다, 키린토 님. 청색 마탑주 세르바인 저스트 님의 제자인 아리안입니다.”
“아, 청색 마탑주의 제자라고? 흠, 반갑구나. 나는 알다시피 키린토 마그나이저라고 한다.”
대스승님과 인사를 나누는 아리안 누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지 말고 누나도 일단 앉아요.”
“응.”
아리안 누나가 자리에 앉자 나는 찻잔을 하나 더 가져왔다.
“집에까지 찾아올 정도라니, 어느새 그렇게 친해진 거니?”
스승님이 웃으며 묻는 말에 나는 뺨을 긁적였다.
“어… 이런저런 일로 자주 만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예전에는 아리안 누나와 친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야.
아리안 누나의 처음 인상이 워낙 안 좋았었으니 말이야.
“라엘이 언데드 로드 토벌에 참여하는 것이 걱정되어 온 거니?”
스승님이 미소를 지으며 묻자 아리안 누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또 저번처럼 다치지나 않을까 해서요.”
“걱정 마요. 이번에는 대마법사분들과 오러 마스터분들 뒤에서 보조만 할 거니까.”
솔직히 이번 언데드 로드 토벌에서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건 전투력이 아니라 드래곤의 지식일 테니까.
전면으로 나설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 때마다 크게 다쳤었잖아. 이번에도 그러는 거 아냐?”
으음, 하긴 그런가.
두 번의 전쟁에 참전해서 두 번 다 크게 다쳤었지.
“이번에는 괜찮을 거예요.”
“그래야지.”
나와 스승님, 대스승님과 아리안 누나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주된 이야깃거리는 당연하게도 쉘던 왕국에 나타난 언데드 로드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스승님, 대스승님과 함께 언데드 로드 토벌 지원군에 끼어 다시 쉘던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