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 백색 마탑주
으음, 하필이면 카리야 황녀가 사절단을 이끌고 올 줄이야.
분명 그동안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비밀의 황녀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 같은데.
황제도 어지간하면 황녀를 바깥에 내보내지 않는다는 걸로 들었는데.
슬쩍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니 비밀의 황녀로 유명한 카리야 황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놀란 듯 웅성이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들어서던 카리야 황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눈을 살짝 찡그린 그녀가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서 내게로 다가왔다.
카리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제국 측의 사절단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의아해하며 쳐다보았다.
“오랜만이네요, 라엘.”
“하, 하하… 그러네요, 카리야 황녀님.”
내 신분을 아직 모르고 있다면 좋았겠지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의아해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당신이 적색 마탑주의 제자일 줄은 몰랐어요.”
역시나.
대스승님과 스승님의 관계가 알려진 이상 그녀가 내 정체를 짐작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굳이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내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사람도 겉으로는 보통 사람과 똑같네요.”
“뿔이나 날개라도 달려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비슷해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이내 팔짱을 끼며 나를 흘겨보았다.
“칼라마쉬의 서를 훔친 게 저희 제국이라고 하셨다면서요?”
“사실이니까요.”
“그건 사실이 아녜요!”
카리야 황녀가 소리치자 주변 사람들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끄응, 조용히 음식이나 먹으려 했는데, 이게 뭔…….
“오라버니는 그런 짓을 계획할 분이 아니세요. 오라버니는 명예를 아는 분이라고요. 그런 사악한 물건에 손을 댈 분이 아니에요.”
“제가 직접 확인한 사실입니다.”
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흥, 언젠가 다들 진실을 알게 될 거예요.”
콧방귀를 뀌며 말한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서 자신의 일행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후, 지난번에 쌓았던 호감은 완전히 사라진 것 같군.
그녀는 자신의 오라비인 황제에 대해서 엄청난 신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카리야 황녀와 작게 말다툼을 했기 때문인지 주변 사람들 모두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들었나? 저 청년이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는군.”
“이번에 그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가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렇게 젊을 줄은 몰랐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다.
끄응, 이런 관심은 딱 질색인데.
뭐, 적어도 어린애로 보지는 않아서 다행이려나.
나는 작년보다 키도 조금 크고, 수염도 나기 시작해서 이제는 어린아이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식사를 하려던 것을 그만두고 그냥 음료 한 잔을 집어 들었다.
쉘던 왕국의 음식이 궁금하긴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식사를 하는 것은 싫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음료를 홀짝였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로서 관심을 받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군.
벌써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어.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새하얀 로브에 탐스러운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백발의 노인.
“귀공이 적색 마탑주의 제자이시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도 예의를 차리며 말을 걸어오는 노인.
왕실의 연회에 예복 대신 자신의 마탑을 상징하는 새하얀 로브를 걸치고 올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네, 제가 적색 마탑주님의 제자인 라엘 드리안 자작입니다. 백색 마탑주님이시죠?”
내 말에 그는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허허, 그렇소. 내가 백색 마탑주 다프간 님 델만이오.”
역시나 내가 생각한 사람이 맞았군.
“백색 마탑주님께서 제게는 무슨 용건이신지요?”
“짐작하다시피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와봤다오.”
하여간 마법사들의 호기심이란…….
남들은 드래곤이라는 말만으로도 겁먹어서 쉽사리 다가오지도 못하는데.
“어떤 것이 궁금하신지요?”
“말하긴 좀 부끄럽소만… 내가 요즘 막히는 것이 있어서 말이오.”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리커버리를 사용할 때 마나의 역류가 조금씩 일어나서 말이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면 드래곤의 지식을 이용해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려는 거요.”
마법사가 마법에 대해 자신과 관계가 없는, 그것도 손아래의 마법사에게 마법에 대해 묻는 다는 건 무척이나 드문 일이다.
마법사들은 호기심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마법에 대해 묻는다는 건… 그만큼 초조하다는 것이겠지.
거기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 자리에서 물어보는 건… 아마도 내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는 것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함이겠지.
8서클의 마법사가 겪는 문제를 내가 해결한다면 내 뒤에 드래곤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지금도 내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끄응, 이러면 앞으로 곤란해질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는 설정에 의심을 받게 되는 것도 곤란하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지금 사용하고 계신 리커버리의 수식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내 말에 그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수식과 운용법을 알려주었다.
아무리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다는 것의 진실 여부를 사람들 앞에서 알아내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자신의 마법수식은 함부로 떠들 것이 아니니까.
‘카이서스, 저거 뭐가 문제야?’
8서클의 치유 마법인 리커버리.
아직까지 나는 수식을 들어도 어느 부분이 문제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카이서스는 다르다.
마법에 있어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이 8서클 마법의 오류에 대해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흥, 간단한 문제로군. 저 늙은이가 말한 수식 중 네 번째 과정에서 마나를 운용할 때 인간들이 말하는, 스틱스 운용법을 응용해 보라고 해라.>
나는 카이서스가 말한 그대로 전해주었다.
“스틱스 운용법? 그건… 아, 꽤나 오래된 운용법이구려. 다행히도 익히고 있는 것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그 자리에서 리커버리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리커버리!”
꽤나 긴 주문 끝에 리커버리 마법이 성공적으로 시전되었다.
자신이 말했던 마나의 역류가 일어나지 않았는지 백색 마탑주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아졌다.
“오오! 정말이로군! 대단하오. 정말로…….”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것이 확실하다는 뒷말을 삼킨 채로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 늙은이의 오래된 고민이 해결되었구려. 고맙소이다!”
백색 마탑주의 고민을 해결했다는 말에 주변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정말로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는 건가?”
“설마 했는데… 진짠가 보오.”
흐음, 일단 이건 잘한 거겠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는 호칭은 꽤나 영향력을 지닐 수 있으니까.
그걸 포기할 수는 없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리는데 몇몇 사람들은 조용히 눈을 빛내며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마법사들이겠지.
백색 마탑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자신들이 겪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면, 그 해결책이 나타난 순간 무척이나 흥분할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귀공의 현재 서클은 얼마나 되시오?”
“얼마 전에 6서클에 올라섰습니다.”
“6서클?! 그 나이에 말이오?!”
백색의 마탑주가 경악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놀란 표정이 되었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찌 되시오?”
“스물한 살입니다.”
“허어,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는 뭔가 다르긴 다른가 보오.”
“저를 지켜주는 드래곤은 느려 터졌다고 늘 타박하더군요.”
“허허.”
내 말에 다프간 님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봤지? 보통은 이 나이에 6서클이 된 것만 해도 대단한 거라니까.’
<흥, 인간들의 기준일 뿐이다.>
‘하여간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네.’
“후후, 고맙소. 초면에 실례해서 죄송했소이다. 내 다음에 이 신세는 꼭 갚으리다.”
다프간 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곁에서 멀어졌다.
후우, 그는 만족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백색 마탑주인 다프간 님이 멀어지자 다른 자들이 눈치를 보며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눈을 반짝이던 마법사들이었다.
젠장,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엄청나게 귀찮아지겠어.
크라우드 왕국에서는 왕자와 스승님 등이 손을 써두었기에 귀찮은 일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외국.
스승님이나 왕자의 입김이 거의 통하지 않는 곳이다.
네다섯 명의 마법사로 짐작되는 자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다가왔다.
으음, 이러다간 연회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다른 마법사들의 문제만 해결해 주게 될 것 같은데.
그 순간 팡파르가 울리며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입구 쪽으로 집중되었다.
“빈야드 쉬라즈 쉘던 국왕 전하와 미나 쉬라즈 쉘던 왕비님이 입장하십니다!”
쉘던 국왕 내외의 입장 소식에 나에게 다가오던 마법사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멈춰 섰다.
아무리 궁금함이 가득하다 한들 연회의 주인이 행차하는데 딴짓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모두가 입구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국왕 내외를 맞이했다.
연회장의 상석에 앉은 쉘던 국왕이 말했다.
“모두 고개를 드시게.”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상석 쪽을 쳐다보았다.
쉘던 국왕은 꽤나 나이가 많아 보였다.
백색 마탑주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백발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뭐, 물론 마나의 힘으로 천천히 늙는 백색 마탑주의 나이가 더 많겠지만.
그에 비해 왕비는 서른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나저나, 쉘던의 국왕은 늙은 양반이 기운도 좋아.
저 나이에 아이를 갖기도 힘들 텐데 말이야.
“올해의 첫날부터 내 셋째 아들의 출생을 축하해 주러 온 모두에게 새해 행운이 가득하기를!”
웃음기가 가득한 환한 얼굴로 쉘던 국왕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하자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그 말에 대답했다.
“쉘던 국왕께도 행운이 가득 하시기를!”
각국에서 온 사절단이 선물을 전달하고, 쉘던 국왕이 감사를 표하는 등의 순서가 이어졌다.
나에겐 그다지 관심 없는 행사들이었기에 애써 지루함을 감추며 행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모두들 고맙소이다! 손님들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으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다 가시오!”
마침내 지루한 행사가 끝나고 쉘던 국왕의 선언과 함께 제대로 된 연회가 시작되었다.
궁중 악사들이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고, 음유시인들은 그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누군가는 음식을 즐기고, 누군가는 파트너와 함께 춤을 즐기며 제각기의 방식으로 연회를 즐겼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으음, 그냥 먼저 빠져나갈까… 하지만 왕자가 필요할 때 부른다고 했으니 마음대로 방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조금 전에 눈을 반짝이며 내게 다가오려던 마법사들이 행사가 끝나자마자 다시 다가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사이 경쟁자가 늘었는지 뭔가 더 필사적인 표정들이라 그 대상인 나로서는 더욱 부담이 되었다.
으으, 이럴 때 왕자가 나를 불러준다면 오히려 편할 텐데.
아무리 지식에 목마른 마법사들이라고 해도 왕족은 부담스러울 테니 말이야.
차라리 내가 먼저 왕자에게 갈까? 해서 보니 왕자는 다른 왕국의 사절들과 대화하는 중이었다.
끄응, 내가 가면 방해가 되겠지.
이도 저도 못 하고 내게 다가오는, 마법사로 추정되는 여러 사람들을 긴장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전하! 큰일이옵니다!”
갑자기 연회장의 입구로 꽤나 높은 직위로 보이는 차림의 사내가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쉘던 국왕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이 좋은 날에 소란이라니!”
약간의 노기마저 띤 국왕의 목소리에도 사내는 다급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였다.
“뭐라?!”
사내가 뭐라 속삭였는지는 몰라도 쉘던 국왕이 경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모습에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긴장하며 쉘던 국왕을 쳐다보았다.
잠시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쉘던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각국에서 와주신 손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본인은 이만 자리를 떠야겠소. 모두들 계속해서 연회를 즐기시고… 대신들은 나를 따라 집무실로 오시오.”
그렇게 말한 쉘던 국왕이 왕비와 함께 자리를 뜨고, 쉘던 왕국의 대신들까지 황급히 그의 말에 따라 자리를 떴다.
쉘던 왕국의 중요 인물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자 손님들은 당황했다.
연회를 계속해서 즐기라고 하긴 했으나… 주인이 없는데 어찌 연회를 즐길 수 있겠는가.
“흠,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선생, 우리도 일단은 방으로 돌아가지.”
어수선해진 분위기 속에서 로라스 왕자가 다른 사절단원들과 함께 내게로 와서 말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일단 다행인 일이었다.
먹잇감을 놓쳐 아쉬워하는 마법사들의 시선을 등으로 받으며 나와 크라우드 왕국의 사절단은 조용히 연회장을 나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쉘던 국왕과 대신들이 황급히 자리를 떠야 했을 정도의 일이면…….”
내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묻는 말에 왕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하던 왕자는 다른 사절단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본국에 연락하고 정보를 알아보게.”
그러고는 왕자는 방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한층 더 빨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