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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45화 (45/150)

045화 - 겨울이 온다

추수절도 지나고, 12월이 찾아오자 겨울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었고, 새벽에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왕궁으로 출근하는 아침, 숨을 내쉬자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적색 마탑의 로브는 화염에서 몸을 보호하는 마법이 걸려 있기에 여름에는 그리 덥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냉기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마법은 없었기에 나도 로브 안에는 두툼한 솜옷을 껴입고 있었다.

카이서스의 둥지에서 들고 나온 로브에는 열기와 냉기에서 보호하는 마법이 걸려 있지만…….

적색 마탑을 상징하는 붉은 로브 대신 그걸 입을 수도 없고 말이야.

“으엣취!”

올겨울은 예년보다도 더 추운 것 같다.

이제 겨우 12월 초인데도 이렇게 춥다니.

1월이 되면 얼마나 추울지 짐작도 안 간다.

“으으, 빨리 가서 몸 좀 녹여야겠어.”

왕궁은 따뜻하게 난방이 되어 있을 테니까.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걸음을 빨리하여 왕궁에 도착했다.

“오늘도 꽤나 춥군요, 라엘 님.”

근위기사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으으, 그러네요. 작년보다 더 추워진 것 같아요. 기사님은 안 추우세요?”

근위병과 근위기사들이 입은 제복은 그다지 따뜻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기능보다는 미적인 부분을 중시한 옷이니까.

내 물음에 근위기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별수 있습니까. 이것도 임무인데. 저야 그나마 마나를 운용해서 좀 낫지, 병사들은 더 추울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근위기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 서 있는 근위병들은 추위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 언뜻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으음, 로브 안에 뭐라도 껴입을 수 있는 내가 투덜거릴 처지가 아니었군.

들고 온 가방과 몸의 수색을 마친 근위기사가 출입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날씨가 추우니 빨리 들어가시죠.”

“감사합니다.”

근위기사에게 고개를 숙이며 궁문 옆에 나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섰다.

궁문은 워낙 크기에 왕족이 출입하거나 대규모의 인원이 출입하는 경우가 아니면 열릴 일이 없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커다란 궁문 대신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출입했다.

총총걸음으로 서둘러 왕자의 궁으로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후우, 역시 겨울엔 실내가 최고야.”

이불 밖은 정말이지 너무 괴로워.

왕자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방에 들어와 몸을 부르르 떨어 남아 있는 냉기를 떨치고 있자니 시녀 하나가 무언가를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다.

“추우시죠?”

그녀가 가져온 것은 따스한 홍차였다.

“아, 감사합니다.”

평소처럼 가져다준 차였으나 오늘따라 더욱 반가웠다.

차를 마시며 마법서를 읽기 시작했다.

현재 왕자의 마법 서클은 2서클, 아직까지는 가르치는 데에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 나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중이었다.

남을 가르치면 자신도 성장한다더니, 조금씩 막히던 부분이 요즘 들어 이해가 되고 있었다.

‘이러다가 7서클도 금방 되겠는걸!’

얼마 전에 막혀 있던 6서클의 벽도 뛰어넘으며 뒤틀려 있던 마나의 고리도 고쳤으니까.

흥이 나서 속으로 생각하자 카이서스가 태클을 걸었다.

<느려 터진 놈.>

‘이 나이에 6서클이 된 것도 대단한 거거든?!’

<흥, 내 심장을 먹은 것치고는 더럽게 느린 거다, 멍청이. 얼마나 지능이 떨어지고 재능이 없으면…….>

끄으으…….

평소처럼 시끄럽다거나 닥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로라스 저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때마침 시녀가 와서 왕자가 오고 있음을 알렸다.

나는 책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왕자 저하 입장하십니다.”

시녀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자 싱글싱글 웃고 있는 왕자가 들어섰다.

“오늘 춥지? 오느라 고생했어!”

“고생이라니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하, 힘들어하면 마차라도 하나 내어줄까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군?”

제길, 그냥 추워서 고생 좀 했다고 할걸.

괜히 쓸데없이 괜찮은 척해서…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꾸기도 그렇고 말이야.

“하, 하하…….

내가 멋쩍은 웃음만 흘리자 왕자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안 그래도 마차를 하나 내어주려는 참이었으니까.”

“네? 저에게 그런 특혜를 내리시면 다른 사람들이…….”

조심스레 거부하려 하자 왕자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대는 내 선생이기도 하지만 우리 왕국에 있어서 귀중한 인재이기도 하다. 그 정도는 괜찮으니 걱정 말게.”

…몇 달 전에 분명히 특혜는 안 된다면서 왕궁에서 내쫓겼습니다만?

뭐, 공짜 마차를 내어준다는데 괜히 투덜거릴 이유는 없지.

“감사합니다! 아, 일단은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출퇴근이 편해졌음에 즐거워하며 수업을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 터라 수업도 술술 진행되었다.

왕자도 평소처럼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하는 터라 오늘도 별문제는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 수업의 종료를 알리자 왕자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으으, 오늘도 수고 많았어.”

계속 앉아서 이론과 마나 수련을 하다 보니 몸이 뻐근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자니 왕자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난 언제 2서클에서 벗어나는 거야? 선생은 마법을 익힌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6서클이잖아.”

“하하…….”

왕자의 투정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흘린 웃음에 왕자는 툴툴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안다고. 드래곤이 가호하는 선생이랑 비교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제 스승님께서도 조급함은 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왕자의 재능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다.

보통의 마법사들과 비슷한 성취다.

나야 드래곤의 심장으로 몸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기에 단시간에 높은 성취를 얻는 것이 가능했던 거지.

“선생의 스승님이라면 적색 마탑주 말인가? 흠, 그렇다면 조금 더 여유를 가져야겠군.”

그 말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왕자님은 마법만 익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왕자는 마법 외에도 검술, 예법, 정치, 외교 등등을 배운다.

한 나라의 국왕님이 되기 위한 모든 것들.

“그래도 마법이라는 학문이 특히 마음에 든다네. 적어도 쓸모가 있을 정도로는 배워두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는 왕자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 일과를 끝마쳤군.

이제 돌아가서 수련도 하고 휴식도 취해야겠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방을 나서려던 왕자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돌아서며 말했다.

“아참, 쉘던 왕국의 셋째 왕자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서 내가 가게 될 것 같은데, 선생도 같이 가서 나와 말동무나 해주겠나?”

왕자의 말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사절단으로서 다른 나라에 간다는 건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다.

사소한 실수조차도 외교적으로 큰일로 번질 수가 있으니까.

얼마나 쉘던 왕국에 머물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귀찮은데.

라고 솔직히 말하기에는 나를 쳐다보는 왕자의 눈이 너무나도 신뢰에 가득 차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저를 선택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어차피 까라면 까야 하는 아랫사람 신분인 나다.

어차피 가게 될 거, 왕자의 기분이라도 좋게 해줘야지.

“하하, 선생이라면 흔쾌히 승낙해 줄 줄 알았어! 일정이 정해지면 알려줄 테니 미리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네.”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왕자가 방을 나서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에휴, 귀찮아.”

왜 하필 나를 사절단으로 데려가려는 걸까.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놈을 자랑이라도 하려나 보지.>

‘보통은 그런 귀중한 인재는 나라 안에 꼭꼭 숨겨놔야 하는 것 아냐?’

<제 입으로 귀중한 인재라 하다니, 클클.>

‘뭐 어때. 틀린 말도 아니잖아.’

어째서 사절단에 나를 끼우려는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왕자가 기거하는 봄의 궁전을 나와 궁문으로 향했다.

으으,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춥다.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몸수색을 마치고 왕궁을 나오자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라엘 님. 집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마차를 내어준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걸 타라고요?”

왕자가 마차를 내어준다고 했을 때 예상했어야 했는데…….

금색 염료로 왕실의 문양이 커다랗게 그려진 왕실 전용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저런 것을 타고 어떻게 출퇴근을 하라는 거야?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겠네.

…하아, 어쩔 수 없지.

“그냥 걸어서 갈게요.”

왕자님께는 미안하지만 이번 호의는 거절해야겠어.

왕실 마차가 집 앞을 다니게 되면 불편하게 느낄 동네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하지만 왕자님께서 명하신 것인데…….”

마부가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왕자님께는 제가 내일 잘 말씀드릴게요. 그럼 전 이만!”

나는 마부가 뭐라고 더 말하며 붙잡기 전에 걸음을 옮겨 왕궁을 떠났다.

결국 나는 출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추위에 떨면서 집으로 향했다.

* * *

“사절단의 일원으로 쉘던 왕국으로 간다고?”

“네.”

일주일에 한 번 들른다는 얼마 전의 약속대로 외가에 들렀다.

어머니, 누나와 차를 마시면서 쉘던 왕국의 사절단 중 하나로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쉘던 왕국의 셋째 왕자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면 각국의 높으신 분들이 많이 올 텐데…….”

“에이, 걱정 마세요. 사절단의 대부분 업무는 왕자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처리할 테니까요.”

아마도 내 역할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가 우리나라에 있음을 자랑하려는 것일 거다.

타이런 제국에 맞서는 왕국들의 연합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일종의 과시지.

그러니 내가 할 거라고는 높으신 분들이 뭐라고 하면 예의 바르게 웃으면서 대답이나 해주면 되는 일이다.

뭐, 가끔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로서 허세도 조금씩 부려주고 말이야.

“그래도 이 엄마는 걱정되는 구나.”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예법에 관한 건 카이서스에게 물어보면…….’

<멍청한 놈. 내가 인간의 예법 따위를 알 것 같으냐? 안다고 해도 내가 알던 것은 모두 과거의 것들이다.>

끄응, 그랬지.

카이서스가 활동하던 것은 머나먼 과거였으니까.

“음, 아무래도 어머니 말대로 예법을 조금 배워두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혹시 예법에 관한 책이 있나요?”

아무래도 쉘던 왕국에 가기 전까지 벼락치기라도 해야겠어.

내 말에 어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너도 이젠 귀족이니 기본적인 예법은 알아둬야지. 아무래도 책으로 배우면 실수할 때가 많을 테니… 내가 직접 가르쳐 주는 게 좋겠구나.”

“네? 아녜요, 그냥 독학해도 되는데…….”

“얘, 무슨 소리니? 엄마가 가르쳐 주는 건 싫니?”

“아, 아녜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대답하자 어머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부터 일을 마치는 대로 곧장 여기로 오렴. 이 엄마가 속성으로 가르쳐 줄게!”

아항, 원하시는 게 바로 이거였군?

어머니로서 사랑하는 자식을 매일 보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한동안 수련은 좀 쉬어야겠지만… 어쩔 수 없지.

예법도 배워야 하거니와 그동안의 서운함을 풀어드리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도와줄게.”

가만히 듣고 있던 누나의 말에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아직 한참 모자라잖니?”

외가로 들어오며 귀족가의 아가씨가 된 누나도 예법을 계속해서 배우는 중인 듯하다.

그래 봐야 원래 귀족가의 아가씨였던 엄마가 보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듯하지만.

그런고로, 나는 내일부터 누나와 함께 어머니에게 예법을 교육받게 되었다.

예법은 꽤나 골치 아팠으나 드래곤의 심장으로 인해 지능이 올라갔기에 금방금방 외울 수 있었다.

외우는 것과 실전은 다른 이야기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리고 예법을 배우기 시작한 지 열흘 후.

사절단이 쉘던으로 출발하는 날이 정해졌다.

대륙력 755년 12월 21일.

새해를 열흘 앞둔 추운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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