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 추수절
대륙력 755년 11월 18일.
날씨가 꽤나 쌀쌀해졌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반팔에서 긴팔로 갈아입고 다니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흐음, 그런데 오늘따라 사람들이 잔뜩 들뜬 기색인데.
왕궁에서도 뭔가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리 활기찼고 말이야.
무슨 일이지?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아리안 누나가 내 집의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오니?”
나를 맞이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응.”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걱정하며 묻는 내 말에 아리안 누나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 네 어머님과 누님의 부탁 때문에 들렀어.”
“어머니랑 누나는 왜요?”
“응. 네가 하도 얼굴도 안 비친다고 섭섭해하시더라고. 내일은 꼭 외가에 들르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어.”
“내일요?”
“너 설마 했는데……. 내일이 무슨 날인지 몰라?”
“엥?”
그녀가 의아해하며 묻는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이 무슨 날이지?
어머니나 누나의 생일은 분명 아닌데……. 외할아버지의 생신인가?
아리안 누나는 한심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 무표정한 얼굴로.
“내일, 그러니까 이번 주 일요일이 추수절이잖아.”
……아?!
그, 그러고 보니 내일이 11월의 세 번째 일요일이었네.
어쩐지 왕궁과 길거리의 분위기가 활기차다 했더니.
추수절이란 겨울이 되기 전 마지막 수확을 기념하는 날이다.
보통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두 모여 겨울이 되기 전에 서로의 건강을 빌곤 했다.
“으으, 깜빡하고 있었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후후, 혹시나 해서 말하길 잘했네.”
후우, 아리안 누나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으음, 만약 까먹고 일요일에 외가에 가지 않았다면……. 어머니와 누나가 크게 실망했겠지.
“고마워요, 누나. 저를 위해 일부러 찾아와서 말해주시고.”
“멀리 사는 것도 아닌데, 뭘.”
“아, 그런데 누나는요?”
문뜩 떠오른 것을 묻자 아리안 누나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 나는 왜?”
“추수절때 푸른 마탑에 돌아가실 거예요?”
“아, 이번에는 그냥 혼자 집에서 쉬려고. 집주인 할머니도 이번에 아드님 집에 가신다고 하셔서.”
남들은 모두 친지들끼리 모여 명절을 보내는데 아리안 누나는 혼자라고?
“으음……. 그럼 저랑 같이 가실래요?”
“으, 응?! 내가?”
“네.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요. 어차피 누나도 외가 사람들과 친분이 있으니 함께 추수절을 지낸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외롭다니 어린애도 아니고……. 괜찮아.”
“그래도……. 혼자 지내면 쓸쓸하잖아요. 같이 가요. 네?”
“으음……. 하지만……. 네 어머니와 누나가 같이 저녁을 먹자는 걸 이미 거절했는걸.”
“뭐 어때요,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면 되죠. 아니면 혹시 저랑 같이 가는 게 싫은 건 아니죠?”
“아, 아냐! 갈게.”
혹시나 해서 물어본 내 말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 이유로, 옷 사는 것 좀 도와주실래요? 간만에 얼굴을 내비치는 건데 로브를 입고 가기는 좀 그럴 것 같아서요.”
나도 언제까지 로브만 입고 다닐 수는 없으니 일상복 하나 정도는 구해놔야겠지.
“후우, 알았어, 좋아. 같이 가자.”
이제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작게 내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아리안 누나는 추수절을 앞두고 활기찬 시장을 돌아다니며 내일 입고 갈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일단은 근처에 있는 옷가게로 들어섰다.
“이거 괜찮아 보이는데?”
이것저것 옷을 살펴보던 아리안 누나가 검푸른 색의 재킷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해 보이는 재킷이었다.
아리안 누나가 재킷을 살피고 있자니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다가와 말했다.
“아가씨가 옷 좀 볼 줄 아는구먼. 옆에 있는 애인에게 선물하려는 거야?”
옆에 있는 애인?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그, 그런 사이 아녜요!”
아리안 누나도 그 말에 당황한 듯 황급히 대답했다.
괜히 연인 사이로 오해받으면 아리안 누나도 난감하겠지.
“맞아요. 그냥 친한 누나라고요. 제 옷을 골라주러 온 것뿐이에요.”
내가 말을 덧붙이자 아리안 누나는 슬쩍 나를 쳐다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워낙 잘 어울려서 데이트 중인 줄 알았지 뭐야, 오호호.”
가게 주인은 괜히 다가와서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는 다른 손님에게로 다가갔다.
“데, 데이트…….”
아리안 누나는 주인장의 괜한 말이 마음에 걸리는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누나. 괜한 오해를 받게 해서.”
“응? 아, 아냐! 괜찮아.”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아리안 누나는 내 사과에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리안 누나는 신중하게 살피며 내가 입을 옷을 골라주었다.
처음에 살핀 검푸른색 재킷과 그에 어울리는 검푸른 바지. 그리고 새하얀 셔츠와 셔츠의 주머니에 꽂아 넣을 하늘색 포켓 행커치프까지.
“어때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거울을 바라보았다.
늘 입고 다니던 로브가 아니라 간만에 다른 옷을 입으니 뭔가 색다르게 느껴졌다.
뭐랄까, 내 스스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좀 더 성숙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리안 누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 * *
“오늘은 고마웠어요.”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말에 아리안 누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별것도 아닌걸.”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멈춰 섰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럼 내일 오후 5시쯤에 집 앞에서 봐요.”
“알았어.”
* * *
다음 날 저녁 5시.
외가에 찾아갈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니 곱게 차려입은 아리안 누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 이브닝드레스에 하얀색 숄을 걸친 모습이었다.
평소보다 더 예쁜 듯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말했다.
“어……. 오래 기다렸어요?”
“나도 방금 나왔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까요?”
“응.”
나와 아리안 누나는 근처를 지나는 영업용 마차에 올라 외갓집으로 향했다.
그리 먼 곳이 아니었기에 금방 도착했다.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자주 놀러 오지도 않고, 이 엄마는 섭섭하단다.”
“맞아, 맞아. 어머니가 얼마나 기다리셨는데!”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누나가 현관홀까지 마중을 나와선 불만을 토로했다.
“죄송해요. 그동안 조금 바빠서요.”
사실 그다지 바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외가에는…….
“흠, 왔느냐.”
외할아버지인 네팔렌 백작이 계단으로 내려오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직까진 외할아버지가 조금은 불편하단 말이지.
“네, 그 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흥, 별일 있을 게 뭐가 있느냐.”
“아버지도 참, 간만에 온 외손자한테 조금 따뜻하게 대해주시면 안 돼요?”
“흥, 그보다……. 아리안 양은 오늘 쉰다고 하지 않았었나?”
어머니의 타박에 외할아버지는 내 곁에 서 있는 아리안 누나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집에서 수련하겠다고 하지 않았어?”
어머니도 의아하다는 듯 아리안 누나에게 말했다.
“그, 그게…….”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하는 아리안 누나를 대신하여 내가 대신 대답했다.
“쉬겠다는 걸 제가 억지로 데려온 거예요.”
내 말에 어머니와 누나가 기묘한 표정으로 아리안 누나를 쳐다보았다.
“라엘도 은근히 재주가 좋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호호.”
의미를 알 수 없는 누나의 말에 어머니가 웃으며 맞장구쳤다.
두 모녀의 대화에 평소 무표정한 아리안 누나도 약간의 표정의 변화가 생겼다.
확실히 즐거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호호,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배고프지? 저녁 준비가 다 되어가니 식사를 하러 가자꾸나.”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나와 아리안 누나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이끌었다.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내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가 말했다.
“그보다 얘도 참, 주변에 만나는 여자는 없다더니.”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뜬금없는 어머니의 말에 내가 놀라서 말했으나 어머니는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메이엔 누나가 웃으며 아리안 누나에게 말했다.
“라엘과 꽤나 잘 어울리네.”
“네? 메이엔, 그게 무슨…….”
우리 누나의 말에 아리안 누나가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흠, 이름만 부르는 걸 보니 두 사람 꽤나 친해진 모양이네.
……가 아니라!
“누나, 갑자기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메이엔 누나에게 소리치며 묻자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얘, 가만히 있으렴.”
아니, 이 상황에 가만히 있기는 뭘 가만히 있어?
말려달라고 말하기 위해 쳐다본 외할아버지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끄응, 믿을 사람 하나 없군.
아리안 누나를 쳐다보니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리안 누나도 불편해하잖아요. 그만들 해요.”
내가 툴툴대며 말하자마자 아리안 누나가 입을 열었다.
“라, 라엘은…….”
그녀가 입을 열자 모두 뭔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뭐, 뭔가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로 자신을 응시하자 아리안 누나는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착하고 좋은 동생이라고 생각해요.”
조금은 틀에 박힌 그녀의 말에 어머니와 누나는 약간 김이 샜다는 표정이 되었다.
“흠! 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식사나 하자꾸나.”
외할아버지도 그제야 그렇게 말하고는 포크로 잔을 가볍게 쳤다.
쨍! 하고 잔이 울리자 기다리고 있던 고용인들이 음식을 내어왔다.
외할아버지의 말에 그제야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난 아리안 누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끄응, 어머니와 누나도 참……. 이럴 때 갑자기 장난을 치다니 너무하잖아.
아리안 누나도 꽤나 놀란 듯하고.
그런데……. 아리안 누나의 대답을 들은 후에 왜 이렇게 찜찜한 거지?
<등신.>
‘시끄러.’
늘 그렇듯 속을 긁는 카이서스에게 닥치라고 하곤 식사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 이후로는 어머니와 누나가 아리안 누나에게 이상한 말을 하는 일은 없었다.
타깃이 나로 바뀌었을 뿐.
식사를 다 해갈 때쯤 어머니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라엘, 가끔은 엄마도 보러 오고 그러렴.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니?”
“맞아, 맞아. 6서클이 되었다는 소식도 얼마 전에야 루밀리온 씨에게 들을 수 있었다고.”
어머니의 말에 누나도 말을 보태며 투덜거렸다.
내가 6서클이 되었단 사실은 로라스 왕자 때문에 왕궁에 쫙 퍼진 사실이었는데 어머니와 누나는 얼마 전에서야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자주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것에 대해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죄송해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자주 올 수 있었는데도 자주 찾아오지 못했으니까.
어머니와 누나를 찾기 전까지는 무척이나 보고 싶었는데……. 찾고 난 이후에는 뭔가 소홀하게 된단 말이지.
“그럼 앞으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 번은 얼굴을 비치도록 하렴.”
“으음, 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찾아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외할아버지가 나와 어머니의 대화에 끼어들며 코웃음을 쳤다.
“흥, 누구 마음대로? 난 사양이다.”
그 말에 어머니가 쌍심지를 켜며 외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왜 그렇게 외손자를 싫어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 정말 슬퍼요!”
어머니, 슬픈 게 아니라 화를 내고 계십니다만.
단호하게 말했던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에 끄응, 하고 침음을 흘렸다.
“끙, 맘대로 해라.”
늙으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정말인 모양이다.
“호호, 자주 봐야지 조손간에 정도 생기고 그러는 거예요.”
흠, 어쨌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얼굴을 내비쳐야 할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시간 후, 밖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나와 아리안 누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한 약속 잊지는 않았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들르렴.”
아쉬워하는 어머니와 누나의 배웅을 받으며 네팔렌 백작가를 나섰다.
외할아버지가 내어준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차에서 내려 아리안 누나를 집으로 들여보내기 전, 나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으,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리안 누나에게 나는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와 누나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곤란하게 만들었잖아요.”
내 말에 아리안 누나는 아……. 하고 말을 흘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두 분 다 나쁜 뜻으로 한 말도 아니었는걸. 그리고 나도 오늘은 즐거웠어.”
뭐,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야 다행이지만.
“그리고…….”
“네?”
뭔가 말하려던 아리안 누나는 입을 뻐끔거리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다음에 말할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웠다니 다행이다.
나는 아리안 누나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