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 아리안의 변신
“그런데 트럼벨에서 지내게 된 사정이 대체 뭐예요? 말해줄 수 있어요?”
차와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하던 도중 내가 묻자 아리안 누나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거? 며칠 전에 나타난 아바툴을 연구 중이신 네팔렌 백작님이 우리 마탑에 협조 요청을 하셨거든. 그래서 스승님이 나를 보내신 거야.”
“네? 외할아버지가요?”
깜짝 놀라 되묻는 나의 말에 아리안 누나는 더욱 놀라며 되물었다.
“응? 외할아버지라니? 네팔렌 백작님이 네 외조부셨어?!”
아, 그러고 보니 아리안 누나는 아직 모르려나.
수도 트럼벨의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다 소문났다지만 아리안 누나는 오늘 도착했으니까.
“네. 저도 얼마 전에야 안 사실인데 알고 보니 네팔렌 백작님이 제 외조부셨어요.”
“엄청난 우연이네. 네팔렌 백작님이 너의 외조부시라니…….”
뭔가를 생각하듯 말끝을 흐린 아리안 누나가 재차 말을 이었다.
“열심히 해서 잘 보여야겠네.”
“네? 왜요?”
뜬금없는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게……. 아! 마물 연구에 있어서는 네팔렌 백작님이 선두 주자시잖아. 나도 많은 걸 배우려면 여러모로 잘 보여야 하지 않겠어?”
어째선지 허둥지둥 거리며 대답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는 왜 청색 마탑에 협조 요청을 하신 거예요?”
“마물에 대한 연구를 할 때 마법사가 필요한 일이 많은데 네팔렌 백작님은 학자시지 마법사가 아니시잖아.”
아아, 그러니까 마물의 연구에 필요한 마법사를 빌려달라 한 거로군.
마탑의 방대한 지식 중에는 마물에 대한 것도 상당수, 마물에 대한 실험을 하는 데는 제격이지.
음, 그런데 나도 마탑의 마법사인데 왜 내게는 도와달라고 하지 않은 거지?
내 머릿속에는 드래곤까지 있어서 아리안 누나보다도 훨씬 도움이 될 텐데.
아무리 왕자님의 수업을 맡고 있다고는 해도 오전을 제외하면 한가한데 말이야.
아무래도 내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싫어서겠지.
속으로 결론을 내린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한동안 트럼벨에 머무신다면 앞으로 자주 보겠네요.”
“으, 응! 그렇지!”
내 말에 대답한 아리안 누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조심스레 내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있잖아. 혹시 요즘 만나는 여자라도 있어?”
요즘 자주 듣는 질문이로군.
왜 이렇게 내 주변의 여자들은 남의 연애를 궁금해하는 걸까.
“아뇨. 아직 없어요.”
“그래?”
여전히 무표정하기에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목소리에서는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뭐,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럼 누나는요?”
오히려 역으로 내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다.
“나, 나는……. 비밀이야.”
잠시 망설이던 그녀의 대답에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 그게 뭐예요.”
“여자한테는 그런 거 함부로 묻는 게 아니야.”
으음, 그런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니 카이서스가 속에서 혀를 차며 말했다.
<끌끌, 멍청한 놈.>
‘넌 또 뭐라는 거야?’
<크크, 아니다. 이런 건 조용히 구경해야지 더 재미있지.>
‘전혀 조용하지 않거든?’
“그나저나 누나는 외할아버지의 저택에서 지내는 건가요?”
아무래도 연구를 도우려면 외할아버지의 저택에서 지내는 것이 좋겠지.
“일단은 그렇게 정해져 있는데. 음……. 가서 보고 정하려고.”
“외할아버지의 저택이라면 제 어머니와 누나도 있으니 잘 대해주실 거예요.”
나와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 거의 귀찮을 정도로 잘해주겠지.
“어, 어머님과 누나분?”
조금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로브를 내려다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좀 꾸미고 가는 편이 좋을까……?”
“네?”
영문 모를 말에 내가 의아해하며 되묻자 아리안 누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흐음, 아리안 누나의 생각은 정말 모르겠다니까.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있어서.”
애초에 얼굴이나 볼 겸 온 거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대체 뭘 준비한다는 거지?
“제가 길 안내를 해드릴까요?”
내가 따라 일어서며 물은 말에 아리안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하기에 나는 그냥 현관문 앞까지만 그녀를 배웅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며 거리의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 * *
다음 날 아침.
“후우, 긴장 풀자.”
아리안은 커다란 저택의 대문 앞에 서서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대문 옆에 달린 초인종을 눌렀다.
마법으로 작동하는 초인종은 삐익- 하는 소리를 내며 안쪽에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중년의 신사가 나와서 물었다.
“레이디께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젊은 여자가 찾아올 일은 그다지 없었기에 집사는 의아해했다.
“저는 청색 마탑의 아리안이라고 합니다. 네팔렌 백작님의 연구 협조 요청에 파견되어 왔습니다.”
그녀가 청색 마탑 소속이라는 신분패를 보이자 집사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아리안은 청색 마탑의 로브가 아닌 푸른 원피스 차림에 챙이 넓은 모자까지, 한껏 차려입은 모양새였으니까.
아무리 봐도 마법사가 아니라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였다.
“네? 아, 네. 어르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오시죠.”
약간은 당황한 눈치의 집사였으나 마탑의 신분패가 확실했기에 대문을 열었다.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들어서자 때마침 2층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응? 집사님. 그분은 누구세요?”
메이엔의 물음에 집사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어르신이 초청한 청색 마탑의 마법사십니다.”
“어머, 마법사시라고요? 제 동생도 마법사인데.”
그 말에 아리안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 여자가 바로 라엘의 누나라는 것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리안이라고 합니다. 라엘의 누님이시죠? 라엘에게 들었어요.”
“어머, 우리 라엘을 아세요?”
“네. 라엘과는 이런저런 일로 자주 만났어요.”
“외할아버지의 손님이 우리 라엘의 친구라니. 우연이네요.”
반갑다는 듯 웃음을 짓던 메이엔은 아리안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아보이시는데.”
“아, 아녜요. 제가 원래 인상이 나쁜 데다 웃는 걸 잘 못해서…….”
“아, 그런가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메이엔은 아리안을 응접실로 이끌었다.
“아참,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라엘의 누나인 메이엔이라고 해요. 걔도 참, 주변에 이런 아름다운 여자분이 있으면 말이라도 하지.”
“아, 아름답다니 무슨 그런…….”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는 아리안의 말에 메이엔이 웃으며 말했다.
“호호, 그런데 라엘도 트럼벨에서 지내고 있는데, 만나보셨나요?”
“네. 안 그래도 어제 얼굴이나 볼 겸 찾아갔다가 네팔렌 백작님이 라엘의 외조부님이라는 걸 듣고 깜짝 놀랐어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하는 아리안의 모습에 메이엔이 후후 웃으며 물었다.
“저기, 라엘과는 어떤 사이세요?”
“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질문에 아리안이 당황해선 되물었다.
“라엘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걸 보니 친한 사이처럼 보여서요.”
“치, 친한 사이요? 사이가 나쁜 건 아닌데…….”
당황하며 대답한 아리안의 모습에 메이엔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물었다.
“우리 라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네?!”
메이엔의 물음에 아리안의 눈동자가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어머, 얘도 참. 손님한테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는 거니?”
때마침 응접실로 들어선 중년 여인, 마를렌의 타박에 메이엔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궁금하잖아요. 라엘의 지인을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나도 아버지의 손님이 라엘의 지인이란 소리를 집사에게 듣고 온 거란다.”
두 모녀는 미소를 지으며 아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제 동생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아들이지만 참 좋은 아이랍니다.”
모녀의 말에 아리안의 눈이 핑핑 돌았다.
“저……. 그게……. 라엘은 성격도 좋고 저한테도 잘해주고……. 그러니까…….”
아리안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횡설수설하고 있던 차에 누군가 더 응접실로 들어섰다.
“손님을 앉혀두고 뭘 하는 게냐?”
그렇게 두 모녀를 조용히 시킨 네팔렌 백작이 1인용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프란시스 네팔렌 백작이네. 청색 마탑에서 내 요청을 받아준 건 고맙네만……. 이렇게 젊은 처자가 올 줄은 몰랐군.”
약간은 실망했다는 듯한 그의 말에 아리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청색 마탑주인 세르바인 저스트 님의 직계 제자인 아리안입니다. 연구에 방해는 되지 않을 겁니다.”
“흠, 그거야 보면 알겠지. 일단은 방부터 내어주도록 하지. 그래야 내일부터 바로 연구에 참여할 수 있을 테니까.”
“지낼 곳은 제가 마련할 테니 며칠간만 머물게 해주시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네팔렌 백작은 물론이고 마를렌과 메이엔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 *
으음~ 내 집이라는 건 역시 좋은 것 같아.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흔들의자에 앉았다.
아침 일찍 왕궁으로 갔다가 수업을 하고, 왕자와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면 마법서를 읽고 낮잠을 자고 나서 수련을 하는 것이 요 며칠 사이의 일과였다.
마법서를 읽고 나서 며칠 동안 그랬듯 낮잠이나 자려고 흔들의자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응? 근처에서 뭘 하나?”
바로 건너편 집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에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어이! 조심해서 옮겨!”
“이건 어디다 놓을까요?”
누군가 이사를 오는지 일꾼들이 가구를 옆집으로 들여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앞집은 상인 출신의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 집이었는데 빈방을 세놓는다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어제 집으로 돌아올 때 보니 그 팻말이 사라져 있다 했더니, 세입자를 구한 모양이다.
가구를 들이는 것을 창문을 통해 구경하던 도중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어라?”
깜짝 놀란 내가 집을 나와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리안 누나? 여긴 무슨 일이에요?”
익숙한 로브 차림은 아니었지만 일꾼들에게 작업 지시를 내리고 있던 것은 분명 아리안 누나였다.
청색 마탑의 로브 대신 하얀 블라우스와 푸른 치마를 입은 아리안 누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 라엘. 이번에 이 집에 세입자로 들어가기로 했거든.”
“네? 외할아버지의 저택에서 지내는 것 아니었어요?”
“음, 그것도 좋지만……. 일하는 곳에서 생활하면 여러모로 피곤할 것 같아서 따로 지낼 곳을 구한 거야.”
음, 하긴 집이 일터가 되면 출퇴근의 개념도 없어지고 맘 편히 쉬기도 힘들긴 하지.
“……가까운 편이 좋기도 하고 말이야.”
“네? 뭐가요?”
잠시 생각을 하느라 미처 듣지 못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대체 아리안 누나는 뭐가 가까운 편이 좋다는 걸까.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로브가 아닌 차림의 아리안 누나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네.
약간은 낯선 느낌에 내가 멍하니 쳐다보자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이상해?”
“네? 뭐가요?”
“내 옷차림 말이야.”
내가 쳐다보는 시선을 그녀도 눈치챈 모양이다.
나는 황급히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 무척이나 잘 어울려요. 그냥 조금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런데 왜 옷차림을 바꾼 거예요?”
내 물음에 그녀는 당황한 듯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어? 어어……. 그러니까……. 아, 로브를 입고 다니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잖아. 그게 불편해서!”
흐음, 확실히 마법사의 로브를 걸치고 다니면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긴 하지만 지금까지 잘만 입고 다녔으면서.
“로브보다는 오히려 지금 차림이 더욱 눈에 띌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듯이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왜? 뭐가 이상해?”
아리안 누나는 당황한 듯 자신의 옷차림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뇨, 전보다 더 예뻐져서 사람들이 더 쳐다볼 것 같다고요.”
펑퍼짐한 로브를 입을 때는 몰랐지만 블라우스를 입으니……. 볼륨감 있는 몸매가 두드러졌다.
차가운 인상과 늘씬한 몸매와 키, 거기다가 은연중에 풍기는 분위기까지.
미녀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그녀가 꾸며서 입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예, 예쁘다니! 너, 너도 참…….”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었다.
정말이지, 차가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수줍음이 많다니까.
<안 그런 줄 알았더니. 꽤나 하는군?>
‘내가 뭘 한다는 거야?’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아라.>
나로서는 영문을 모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