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 외가
“…그렇게 된 거예요.”
지난 일들을 간략하게 말하자 어머니와 누나는 물론 곁에서 듣고 있던 외할아버지도 놀란 표정이었다.
물론 내 몸 안에 카이서스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제외하고서 말했지만.
“네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였니?!”
어머니의 놀라는 목소리에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저예요.”
“흐음, 이름이 같기에 설마 했지만……. 그 소문이 자자한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가 내 외……. 내 딸의 아이였다니.”
아직은 외손자라는 말이 낯선지 그렇게 돌려 말하는 외할아버지였다.
“그동안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겠구나. 전쟁에도 참전하고…….”
누나가 살짝 나온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뭐, 그래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
스승님, 대스승님, 붉은 마탑의 사람들. 그리고 왕자 등등.
<왜 난 빼는 거냐! 빌어먹을 놈.>
‘그래, 그래. 너도 끼워줄게.’
<끄응.>
“그런데 아버지를 만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알았다고?”
“응.”
누나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빠와 루엔, 티엘은 어떻게 지내고 있니?”
루엔은 나의 형, 티엘은 나의 남동생의 이름이다.
“루엔 형과 티엘은 만나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조금 피곤해 보이시는 걸 제외하면 괜찮아 보였어요.”
“그러니…….”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 쉬듯 말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외할아버지는 불쾌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런 범죄자 놈은 걱정해 줄 필요 없다!”
“아버지! 그이도 나름대로 사명을 가지고…….”
“그래 봐야 암살자다.”
말하시는 걸 들어보니 외할아버지도 아버지가 암살단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어머니나 누나는 아버지와 형제들이 그런 일을 하는데도 아무렇지 않아요?”
내 물음에 어머니와 누나는 전혀 망설이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너희 아빠를 믿으니까.”
“글쎄……. 일단은 나쁜 사람들을 없애는 일이니까. 나름대로 세상의 평화에 기여한다고 생각해.”
여전히 무르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이야.
뭐, 그래서 재능이 없던 나도 아껴준 거겠지만.
모녀의 대답에 외할아버지는 마뜩찮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대충 보아하니 외할아버지는 고지식하고 깐깐한 성격인 듯하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앉으렴.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나 잔뜩 하자꾸나. 아버지도 앉으세요.”
나는 누나의 옆자리에 앉았고 외할아버지는 조금은 불편한 기색이었으나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른 외가의 친지분들은요?”
“어머니, 그러니까 네 외할머니는…….”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에게는 오빠가 하나 있는데 나의 외삼촌이기도 한 그는 네팔렌 백작가의 후계자다.
그는 외할아버지와는 달리 기사의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국경수비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는데 근 시일 내로 만나보긴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너, 만나는 여자는 없니?”
이야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튀어나온 누나의 물음에 나는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누, 누나?!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렇지만 궁금하잖니. 생긴 것도 괜찮고, 드래곤의 가호도 받고, 왕자님의 마법 선생님까지 한다며? 만나는 사람이 있을 법하잖니.”
“어머, 이 엄마도 궁금하구나.”
부담스럽게도 두 모녀가 일심동체로 나를 쳐다보았다.
외할아버지도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차를 마시고 있었으나 시선은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집안 사람들은 왜 이렇게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는 거야?!
뭐, 물론 나도 이 집안 사람이긴 하지만 말이야.
흐음, 만나는 여자라…….
나는 내 주변의 여성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일단 스승님… 은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데다가 남녀 관계라기보다는 누나와 동생 같은 사이란 말이지.
그리고 또……. 아, 청색 마탑의 아리안 누나.
하지만 아리안 누나는 아직까지 조금은 어색하고 자주 만날 수도 없지.
그 외에는……. 왕궁에서 일하며 가끔 이야기나 나누는 시녀들이 다인데.
“그런 사람 없어요.”
내 대답에 다들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그 안타깝다는 시선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그럴 수도 있지!
“그러는 누나는 만나는 사람 있어?”
내가 반발하듯 묻자 누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있다마다. 그러고 보니 말해주는 걸 깜빡했구나? 누나 내년 봄에 결혼해.”
……에엑?!
겨, 결혼이라고?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누군데?”
“루밀리온 씨라고, 왕실 근위기사를 하고 있어. 외할아버지의 소개로 만났지.”
“좋은 사람이야?”
“응, 성격도 좋고 나를 잘 챙겨줘.”
상대를 떠올리는 것인지 메이엔 누나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내 소중한 누나를 데려가는 사람이 누군지 다음에 한번 만나봐야겠어.
루밀리온이라는 누나의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들어오게.”
외할아버지의 말에 이번에야말로 집사인 것이 확실한 중년의 신사가 들어왔다.
“어르신, 왕궁에서 급히 입궁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응? 궁에서? 무슨 일이라 하던가?”
갑작스러운 왕실의 부름에 외할아버지가 의아해하며 묻자 집사가 난감하다는 듯 대답했다.
“저도 물어봤지만 이유는 알려주지 않은 채로 급히 입궁하시라는 말만 했습니다.”
“흠, 알겠네. 곧 입궁하겠다고 전하게.”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집사가 방을 나서자 외할아버지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난 아무래도 나가봐야 할 것 같구나.”
“다녀오세요, 아버지.”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어머니와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배웅했다.
“저도 같이 갈게요.”
내가 배웅 대신 같이 가겠다고 하자 세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너는 왜?”
“뭔가 느낌이 심상치 않아서요.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고 저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게요.”
어머니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학자인 외할아버지를 왕궁에서 급하게 부른다는 것은 뭔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뜻.
혹시나 카이서스의 지식이 필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도 따라가려는 것이다.
내 말에 가만히 쳐다보던 외할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궁 준비를 할 테니 잠시 기다려라.”
음, 일단은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아직까지는 편하게 대해주지는 않는군.
아무리 외손자라 해도 오늘 처음 봤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말이야.
외할아버지가 외출을 준비하기 위해 방을 나가자 어머니가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에서야 간신히 만났는데 벌써 가는 거니?”
“맞아. 굳이 오늘 안 가고 조금 더 쉬다 가도 되잖아.”
어머니의 말에 이어 누나도 툴툴거리며 말했다.
“하하, 지금까진 트럼벨에 지낼 곳이 없어서 왕자님이 궁에서 지내도록 하신 거지만 이제는 여기서 지내며 출퇴근해도 될 거예요. 뭐, 외할아버지가 허락해 주신다면 말이죠.”
“어머, 당연하지! 그럼 앞으로는 함께 지내는 거지?”
“아마도요.”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와 누나는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렴.”
“왕궁에 가거든 루밀리온 씨도 한번 만나봐.”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이 외할아버지가 외출 준비를 마치고 돌아왔다.
고상한 학자라서인지 집 안에서도 말끔한 옷차림이었기에 그다지 바뀐 것은 많지 않았다.
학자를 상징하는 갈색의 테가 없고 위가 평평한 높은 모자를 쓰고, 여름이 끝나고 조금 서늘해진 날씨 때문에 어깨에 걸친 케이프 하나가 다였다.
“이만 가자.”
“네.”
외할아버지를 따라 저택을 나섰다.
저택은 왕궁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기에 마차를 타고 가자 금세 도착했다.
왕궁의 정문에서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근위기사들이 우리를 확인하고는 경례를 취해 보였다.
“네팔렌 백작님, 그리고……. 라엘 님? 두 분이 함께 오셨군요?”
우리가 마차에서 같이 내리던 것을 보았던 근위기사의 말에 외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럴 사정이 있네. 그보다 급히 입궁하라는 연락을 듣고 왔네만.”
“아, 그렇습니다. 지금 안에서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요.”
내 말에 근위기사들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자리인지는 몰라도 왕자의 마법 선생일 뿐인 내가 참가하긴 곤란한 자리겠지.
“상부에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이런 일은 일개 기사가 판단을 내리기엔 어려운 일이기에 상부에 물어보러 갔다.
“정말로 네가 도움이 되겠느냐?”
못 미덥다는 듯 바라보는 외할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보다는 드래곤의 지식이 도움이 될 거에요.”
“흠, 드래곤의 지식이라……. 그것참 흥미롭군.”
천생이 학자라서인지 드래곤의 지식이라는 말에 큰 흥미를 보이는 외할아버지였다.
“그 드래곤과 대화해 볼 수 있겠느냐?”
“글쎄요, 그는 저 이외의 사람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싫어해서…….”
“그러냐…….”
외할아버지는 내 대답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아쉬워하는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침묵.
끄응……. 다 좋은데 아직 사이가 서먹서먹해서 딱히 할 이야기가 많지 않단 말이지.
마차를 타고 오는 그 짧은 시간에도 너무 조용해서 갑갑했을 정도다.
“상부에 보고하니 라엘 님도 같이 오라십니다. 두 분 다 따라오시죠.”
때마침 상부에 보고하러 갔던 근위기사가 금방 돌아왔다.
내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서인지 승인이 쉽게 떨어진 모양이었다.
근위기사의 안내를 받아 외할아버지와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안내되어 간 곳은 명예의 궁전 안.
국왕님과 각료들이 정무를 보는 궁전이다.
“네팔렌 백작과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라엘이 왔습니다.”
시종장이 문을 열며 한 말에 가장 상석에 앉아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국왕님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오, 네팔렌 백작 왔는가. 그런데 라엘 군과 함께 왔다고 하던데, 둘이 무슨 관곈가?”
국왕님의 물음에 외할아버지는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체념한 듯 말했다.
“저도 오늘에서야 안 사실입니다만……. 제 외손자더군요.”
그 말에 국왕님은 물론이고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가 네팔렌 백작의 외손자라고?”
국왕을 비롯한 몇몇 귀족들은 그저 놀랄 뿐이었으나 대부분의 귀족들은 경계하는 시선이었다.
아무런 연줄도 없는 줄 알았던 내가 알고 보니 네팔렌 백작가라는 귀족가의 핏줄이었다니 경계할 만도 하겠지.
나의 등장으로 네팔렌 백작가에 힘이 좀 더 실릴 테니까.
아무리 외할아버지가 권력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아닐 테니까.
“그보다, 무슨 일로 소인을 부르셨는지요?”
약간은 긴장감 섞인 분위기를 깨며 외할아버지가 말했다.
그 말에 국왕님이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아, 그렇지. 자네의 지식을 빌릴 일이 생겼네.”
“말씀하소서.”
외할아버지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 기다렸다.
잠시 침묵하던 국왕님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에 급하게 연락 온 것이네만. 라제스 영지 인근에……. 알처럼 생긴 거대한 괴생물체가 발견됐다고 하네.”
“알처럼 생긴 거대한 괴생물체라 하셨습니까?”
“그렇네. 아직까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리 공격해도 재생해 버린다 하네. 자네가 그게 무엇인지, 그리고 해치울 방법을 알아내 줬으면 하네.”
“아무런 공격이 통하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그 말에 외할아버지가 되물었다.
그리고 나도 놀라서 쳐다보았다.
<어이, 라제스라면 분명…….>
‘응, 라제스라면 분명 아버지가 있는 곳이야.’
카이서스의 말에 나는 무거워진 마음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