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 외출
왕자와 내가 피서에서 돌아온 지 한 달가량이 지난 어느 날.
대륙 제일의 상회인 시난 상회를 통해 진주를 비롯한 인어 왕국의 특산물들이 보내져 왔다.
무녀를 구해주고 패치스 해적단의 소탕에 도움을 준 보답이었다.
이미 보고를 들어 알고 있던 국왕은 왕자와 나, 그리고 피서 때 수행한 근위기사들에게 포상을 내렸다.
내가 받은 것은 포상금 50골드.
4인 가족이 5년간 생활하기에 충분한 거금이다.
하지만 카이서스의 레어에서 가져온 보석들이 있는 나로서는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 돈이 잔뜩 있으면 뭘 하냐고…….
쓸 일이 없는데 말이야.
마탑에 있을 때는 나갈 일이 없었고.
칼라마쉬의 서를 찾으러 다닐 때는 온갖 맛있는 것들을 먹긴 했지만 대스승님이 내주셨고.
왕궁에 들어온 이후에도 나갈 일 자체가 없으니…….
뭐, 어차피 왕궁에서 지내며 좋은 옷과 음식, 잠자리까지 다 제공받고 있으니 아쉬울 건 없지만.
어쨌건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던 중이었다.
아침에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왕자의 시녀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라엘 님, 로라스 왕자님이 감기 기운이 있으셔서 오늘 수업은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여름이 끝나가는 시기에 감기라니, 왕자도 안됐군.
“알겠습니다.”
덕분에 나도 오늘은 쉴 수 있겠군.
뭘 하면서 쉬지……?
“그럼 전 이만.”
“아, 잠시만요.”
용건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시녀를 불러 세웠다.
“네.”
“오늘 쉬는 김에 외출이나 할까 하는데. 가능할까요?”
어차피 쉬는 거라면 바깥 구경이나 좀 해야지.
로라스 왕자의 마법 선생이 된 이후로 피서 때를 제외하면 밖에 나간 적이 없으니까.
무슨 일인가 해서 쳐다보던 시녀가 내 말에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외출 방법을 알려주었다.
외출 사유서를 작성하고 자신이 속한 곳의 담당자에게 승인을 받은 후 왕궁을 경비하는 근위대장에도 승인을 받고 다녀오면 된다고 했다.
조금 복잡하긴 해도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군.
시녀가 가져다준 외출 사유서를 작성하고 내가 속한 봄의 궁전의 시종장에게 승인을 받았다.
“외출을 다녀오시겠다고요?”
“네, 간만에 바깥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어차피 오늘은 왕자님도 감기로 누워계시니 괜찮겠군요. 다녀오세요.”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로서 나름대로 신뢰를 받고 있기에 승인을 받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근위대장에게도 승인을 받고 성문에서 몸수색을 받은 후에 바깥으로 나왔다.
“흠, 바깥에 나오는 건 오랜만이네.”
얼마 전에 바닷가에 다녀오긴 했지만 인적 없는 사유지여서 사람 구경도 못 했단 말이지.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고급 주택가를 지나 번화가로 들어섰다.
“보시고 가세요! 저렴하고 맛있는 사과가 단돈 2브론즈!”
“꽃 사세요! 오늘 새벽에 따 온 예쁜 꽃이에요!”
아침부터 시장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흠, 별생각 없이 외출한 건 좋은데 어딜 가지?
트럼벨에는 아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야.
길거리에서 파는 음료수를 사서 마시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산책이나 하면서 도시 구경이나 해야지.
* * *
“실험은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루리스의 말에 집무실 책상에 턱을 괸 채로 듣고 있던 타이커스 황제가 대꾸했다.
“그런데 이번 실험이 실행될 장소가 어디라고 했지?”
“크라우드 왕국의 변방에 위치한 라제스라는 영지입니다.”
루리스의 대답을 들은 타이커스 황제가 피식 웃어 보였다.
“또 크라우드 왕국인가? 자네는 크라우드 왕국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황제의 물음에 루리스는 침묵했다.
대답이 없자 황제는 재차 웃으며 말했다.
“뭐,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짐은 네가 네 역할만 제대로 해준다면 괜찮으니까. 하지만 방해가 된다면……. 알고 있겠지?”
미소가 음산한 웃음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도 루리스는 담담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목숨은 이미 폐하의 것입니다. 이번 실험 장소를 크라우드 왕국으로 정한 것은……. 제 개인감정이 섞이긴 했지만 방해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루리스의 목소리에 타이커스는 그를 응시하다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가서 하던 일을 계속하라. 그리고 좋은 소식을 가져오도록.”
“예, 폐하.”
루리스가 뒷걸음질로 천천히 집무실에서 나갔다.
여전히 턱을 된 채로 루리스가 나간 자리를 쳐다보던 타이커스 황제가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내게 너의 이용 가치를 증명하는 게 좋을 거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황제의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섞여 있지 않았다.
* * *
흐음, 날씨 참 좋다.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바깥 구경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
왕궁에 있을 때는 워낙 높으신 양반들이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여러모로 눈을 의식하느라 피곤했었는데 말이지.
간만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차고 있던 목걸이가 지이잉-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마탑을 떠날 때 스승님이 선물해 주신, 소형 통신기였다.
통신기를 잡고 마나를 불어 넣자 자그마한 유리구슬에 스승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승님! 오랜만이에요. 웬일이세요?”
-얘도 참, 무슨 일이 있어야만 연락하니? 하도 연락이 없어서 연락했단다.
그러고 보니 마탑을 떠난 이후로 스승님께 연락을 안 했었지.
“죄송해요. 요즘 좀 바빠서…….”
<크크, 놀고먹느라 바빠서 잊어버린 거겠지.>
‘시끄러.’
사실 카이서스의 말이 사실이었지만 스승님은 다른 말 없이 웃어주셨다.
-훗, 그래도 얼굴을 보아하니 왕궁 생활이 꽤 적성에 맞는 모양이구나.
“음, 아주 좋은 건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네요.”
내 말에 스승님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아참, 지난번에 드래곤이 너를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괜찮니?
아, 카락스가 찾아왔던 일을 말하는 거군.
“네. 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거였어요. 제 안에 깃든 카이서스의 기운을 확인하고는 돌아갔어요.”
-그래? 그 드래곤은……. 칼라마쉬의 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니?
“네, 알고는 있지만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드래곤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세계의 뜻이라더군요.”
<뭐, 만약 그놈들이 먼저 건드린다면 우리 동족들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카이서스가 덧붙여서 말했지만 따로 스승님께 말씀드리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그런데 보아하니 왕궁이 아니라 바깥인 것 같은데. 외출을 나온 거니?
“네. 간만에 바깥바람 좀 쐬려고요.”
-그것도 좋지.
그때 스승님은 누군가 부른 듯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통신구를 보며 말했다.
-난 이만 가봐야겠구나. 가끔 연락 좀 하렴!
“하하, 그럴게요.”
통신이 종료되었다.
스승님은 여전히 바쁘신 모양이었다.
통신구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드니 주변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번화가에서 통신을 하는 마법사는 보기 드무니까.
게다가 대화에 나온 드래곤이라는 말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듯했다.
나는 서둘러 남은 음식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일은 불편하니 말이야.
음식값을 계산하고 다시 거리로 나서서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아는 척을 해왔다.
“라엘? 라엘 맞지?”
엥? 여기서 나를 아는 척할 만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의아해하며 돌아보니 낯선 얼굴이 보였다.
“누구… 시죠?”
내가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그는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라엘 맞네! 나야, 나!”
뭐지? 이거 그 말로만 듣던 나야 나 사기인가?
내가 경계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어릴 때 너랑 같이 놀았던 디크론이야.”
디크론? 익숙한 이름인데……. 그러고 보니?!
“디크론? 맨날 여자아이들한테 맞아서 울던 그 디크론?”
내 말에 디크론은 얼굴을 찌푸렸다.
“길거리에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줄래?”
“아무튼,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어릴 때 같이 놀곤 했던 녀석이었다.
분명 내가 14살 정도 될 때쯤 멀리 이사를 가서 헤어졌었지.
<뭐? 네놈한테 친구가 있었어? 놀랍군.>
‘시끄러!’
카이서스가 떠들거나 말거나 내 물음에 디크론이 대꾸했다.
“나는 시난 상회에서 일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든.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거야?”
음, 왕자의 마법 선생을 하고 있다고 하면 내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는 게 들통날 테니…….
“뭐, 그럴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잠시 여기서 머물고 있어.”
“그래?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라제스에 들렀을 때 네 아버지를 만났거든?”
“뭐?!”
갑작스러운 디크론의 말에 깜짝 놀란 내가 되물었다.
아버지를 만났다고?
그것도 라제스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식에 나는 다급히 물었다.
“아버지가 라제스에 계시다고? 다른 가족들은?”
내 물음에 디크론도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으, 응? 몰라. 나도 라제스에 잠시 들렀을 때 잠시 만난 게 다야.”
으음……. 아버지가 라제스로 돌아왔다는 건가.
그럼 다른 가족들도 라제스에 있는 건가?
그동안 까먹고 있었던 가족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라제스에서 우리 아버지를 만난 게 언제야?”
“그게……. 아마 한 달 전일걸?”
한 달 전쯤이라면 내가 바닷가에 있을 땐가.
“아버지가 라제스에…….”
내가 생각에 잠겨 중얼거리고 있자 디크론이 당황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왜 네 가족에 대한 걸 나한테 묻는 거야?”
“끄응……. 그럴 만한 일이 있어.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또 보자!”
“어? 야! 야!”
당황해서 나를 부르는 디크론을 내버려 두고 달려갔다.
이렇게 여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디크론을 오랜만에 만난 건 반갑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 기회가 없을지 몰라.
디크론이야 다음에 시난 상회로 찾아가면 만날 수 있겠지만 가족들은 다르니까.
나는 그대로 곧장 왕궁으로 돌아갔다.
“어라? 분명 외출증에는 저녁까지 외출한다고 적혀 있는데……. 벌써 입궁하시는 겁니까?”
왕궁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이 외출증을 확인하고는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네. 사정이 생겨서요.”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몸수색을…….”
반입 금지 물품에 대한 몸수색을 마친 근위병이 말했다.
“로라스 왕자 저하의 마법 선생이신 라엘 님의 복귀 확인했습니다.”
근위대에 복귀 보고를 하고 봄의 궁전으로 가서 시종장에게 보고했다.
“흠? 일찍 돌아오셨군요.”
시종장도 내가 일찍 돌아온 것이 의아하다는 눈치였다.
“왕자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지금 왕자님을 뵐 수 있을까요?”
“흠, 약을 드시고 계속 주무시다가 조금 전에 일어나셨긴 합니다만……. 일단 여쭈어보죠.”
잠시 자리를 비운 시종장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왕자님께서 만나시겠답니다.”
시종장의 뒤를 따라 왕자의 방으로 향했다.
“선생, 나를 먼저 찾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나?”
감기 기운 때문인지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왕자가 물어왔다.
“네. 한동안 휴가를 좀 주셨으면 합니다.”
“음, 휴가라? 얼마 전에 피서를 다녀왔는데도 그러는 걸 보니 뭔가 중요한 일이 생긴 모양이군?”
“네. 우연히 아버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내 말에 왕자는 조금 놀란 듯했다.
“분명 선생은 가족들과 소식이 끊겼다고 했었지. …좋아. 휴가를 줄 테니 가족들을 찾게. 기한은 따로 정하지 않을 테니 여유롭게 찾되 너무 오래 걸려선 안 되네.”
“감사합니다. 그럼 쾌차하시기를 바랍니다.”
흔쾌히 허락해 준 왕자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방을 나섰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왕궁을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버지가 라제스로 돌아왔다.
아버지나 형제들은 보기 껄끄러운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게다가 나를 아껴주던 어머니와 누이가 어디 있는지 아버지는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나는 라제스로 가서 아버지를 찾을 것이다.
왜 나를 두고 온 가족이 사라진 건지 그 대답을 듣기 위해.
나는 시종장이 가져다준, 왕자의 직인이 찍혀 있는 휴가증을 받고서는 다시 왕궁을 나섰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라제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