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 인어의 사정
“어떻게 힘없는 어린아이를 해적 따위에게 넘길 수 있단 말이냐!”
왕자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그렇게 외쳤다.
“크크크! 네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 숫자가 두렵지도 않은 게냐!”
“나는 크라우드 왕국의 1왕자인 로라스 크라우드다! 이곳은 크라우드 왕실의 사유지, 너희야말로 후환이 두렵지 않은 게냐?!”
왕자의 말에 해적단의 일부가 술렁거렸다.
아무리 악명 높은 해적단이라고 해도 왕실을 적대하는 것은 부담스럽겠지.
하지만 패치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기색이었다.
“흥! 웃기지 마라! 여기 있는 놈들을 모두 죽이고 저년을 데려가면 그만이다!”
정말이지 단순 무식하게 나오는군.
그 말에 왕자를 둘러싸고 있던 근위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감히!”
자신들을 무시하는 패치스의 말이 그들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숫자가 너무 차이 나는데……. 이럴 땐 어쩌지?
일단 마법부터 크게 한 방 날려야 하나?
“로라스 저하, 일단 머메이드와 함께 뒤로 물러나시지요.”
제라스라고 했던가, 왕자를 호위하는 근위기사들 중 가장 높은 이가 말했다.
“아니다. 나도 싸우겠다.”
하지만 왕자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일 테지.
“저하께서 계시면 저희가 마음껏 싸우기 힘듭니다. 저 타밀레라는 머메이드가 붙잡힐 수도 있고 말입니다.”
만약 왕자나 타밀레가 해적들 손에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테니까.
“끄응, 알았다.”
그 말을 듣고서야 왕자는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밀레를 업고 있던 고용인과 함께 왕자가 뒤로 물러나자 근위기사들이 머맨들을 노려보며 대치했다.
으음, 아무래도 전투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수가 적기에 우리가 먼저 달려들지는 못하지만 어째선지 머맨들도 먼저 달려들지 않았다.
<당연하지. 머맨들은 바다의 종족, 육지로 올라오면 본래의 능력을 발휘하기 힘드니까.>
아, 생선이 물 밖으로 나오면 무력해지는 것과 마찬가진가?
“머맨들은 물 밖으로 나오면 약해집니다! 물 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내 외침에 기사들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에 반해 머맨 해적단의 두목인 패치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덤벼라! 이 겁쟁이들아!”
패치스가 기사들을 도발하려는 듯 그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왕실을 지키는 근위기사들이 그 정도 도발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너나 덤벼라! 이 멍청한 어류 놈아!”
기사들 중 하나가 외친 종족차별적인 모욕에 패치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이 빌어먹을 인간 놈이! 모두 죽여 버려!”
오히려 역으로 도발에 넘어간 패치스의 외침에 머맨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아우아오오!
“전원 방어 대형으로!”
제라스의 지휘에 기사들이 삼각형의 대형을 짜며 앞으로 나섰다.
“라엘 님, 부탁드립니다.”
제라스가 부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나는 몰려오는 머맨들을 응시하며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머맨들은 물에서 나오자마자 눈에 띄게 느려졌다.
물 밖에서는 약해진다는 카이서스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물 밖에 나온 머맨을 상대로는 화염계열 마법이 효과적일 거다.>
‘응, 알고 있어.’
카이서스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속이라면 모르겠지만 물 밖으로 나온 머맨은 불에 약할 터.
“파이어 월!”
주문 영창을 끝낸 내가 몰려오는 머맨들 사이로 불의 장벽을 세웠다.
끄에에엑!
불길에 휩싸인 머맨들이 듣기 싫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불의 장벽은 땅으로 올라온 머맨들 한가운데에 펼쳐졌다.
불의 장벽이 앞서서 달려오던 머맨들을 본대로부터 갈라놓았다.
“지금이다!”
제라스는 머맨들의 무리가 나뉜 틈을 놓치지 않았다.
30명의 근위기사들이 머맨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이어 월로 일부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막았다고는 해도 숫자가 두세 배의 차이가 나는 머맨들을 상대로 기사들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머맨들을 몰아붙였다.
아무리 우리 크라우드 왕국이 소국이라지만 왕실의 근위기사들이다.
해적들 따위에게 밀릴 실력이 아닌 것이다.
거기다 전신 갑옷까지 걸치고 완전무장까지 했다.
기사들의 공세에 머맨들은 뒤로 도망치려 했으나 파이어 월로 인해 도망치는 것조차 못했다.
좋아, 이렇게 파이어 월로 머맨들의 무리를 나누어서 조금씩 상대해 나간다면 우리가 이긴다!
“흥! 이딴 잔재주가 통할 성싶으냐!”
그 순간 패치스의 고함 소리와 함께 아직까지 활활 타오르고 있던 파이어 월의 위로 파도가 쏟아졌다.
“아니?!”
불길이 걷히며 새파란 수정으로 만들어진 피리를 들고 있는 패치스의 모습이 보였다.
<흠, 저건?>
‘뭔가 아는 거야?’
<해룡의 피리인 것 같군. 서펀트의 어금니로 만든 것인데 파도를 조종하는 마법이 걸려 있지.>
그런 것이 있어?!
<파도가 닿는 곳이라면 상대하기 까다로운 물건이다. 분명 해룡의 피리는 인어들의 보물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일개 해적이 지니고 있는 거지?>
카이서스는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저 피리로 큰 파도를 불러낸다면 해안가인 이곳은 위험하다.
“크크크, 이건 쓰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인간들이여! 바다에서 머맨의 공포를 맛보아라!”
그렇게 말하곤 패치스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탓에 우리가 서 있는 곳도 발목까지 물에 잠겼다.
머맨들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조금 전처럼 파도를 조종하면 내가 쓰는 화염계 마법의 위력도 줄어든다.
한마디로 엿 됐다는 말이다.
그것을 눈치챈 기사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파도가 몰아치는 이상 파이어 월로 길을 막는 것도 할 수 없다.
맨몸으로 파도와 열 배에 달하는 머맨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다.
“크윽, 이렇게 된 이상 왕자님을 모시고 탈출한다!”
제라스가 분하다는 듯 소리쳤다.
분했지만 저 피리가 있는 이상 우리가 너무나도 불리했다.
제라스를 비롯한 기사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려는 그때.
뿌우우웅-!
어디선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니 푸른색 스케일아머를 걸치고 삼지창을 든 수백의 머맨들이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맙소사, 더 오는 건가?!”
기사들 중 하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안 그래도 상황이 안 좋은데 더 많은, 그것도 제대로 된 무장까지 갖춘 머맨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래서야 몸을 피하는 것조차 힘들지 모르겠는걸.
사태가 악화되었단 생각에 어찌해야 할지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흠, 내 기억과는 조금 다르지만 인어 왕국의 군대 같은데?>
인어 왕국이라고?
‘바다 깊은 곳에 인어들의 왕국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규모가 너무 작은 데다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건 극히 드문 일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인어 왕국으로 가본 것이 300년 전이긴 하지만 확실히 저것들은 인어 왕국의 정규군이야.>
인어 왕국군이 어째서 여기에? 혹시 해적들을 소탕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해적들도 갑작스레 등장한 인어 왕국군의 등장에 당황한 듯 공격을 멈추었다.
우리와 해적단은 전투를 멈추고 대치하며 인어 왕국군의 움직임을 살폈다.
인어 왕국군 중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타밀레 님! 무사하십니까!”
험상궂은 인상의 중년 머맨이었다.
뒤에서 고용인의 등에 업혀 있던 타밀레가 그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구스타? 구스타야?!”
“무사하셨군요!”
“응! 이 사람들이 나를 구해줬어! 그런데 저 나쁜 동족들이 나를 데려가려 했어!”
타밀레의 말에 구스타라 불린 머맨이 웃으며 대답했다.
“곧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러고는 약간 화가 난 기색으로 소리쳤다.
“저 반역자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자세히는 몰라도 인어 왕국군은 우리 편인 듯했다.
그나저나 대체 타밀레의 정체가 뭐야?
인어 왕국군이 구하러 올 정도라니.
타밀레의 정체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었으나 지금은 해적들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됐군. 모두 해적들을 공격한다!”
“오우!”
제라스의 말에 기사들이 함성을 내지으며 해적들에게 달려갔다.
갑작스러운 인어 왕국군의 등장에 해적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들보다도 숫자가 더 많은 인어 왕국군이 나타났으니까.
해적들은 인어 왕국군의 기세에 겁에 질린 듯 달아나려 했다.
“에잇! 이놈들! 도망치지 마라!”
패치스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앞뒤에서 공격당하는 해적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에잇! 두고 보자!”
“놓칠까 보냐!”
패치스도 상황이 좋지 않자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해적단은 기사들과 인어 왕국군에 포위당했다.
“에잇!”
포위당한 패치스가 해룡의 피리를 다시 불려고 했다.
“흥! 누가 두고 볼 것 같으냐!”
재빠르게 쇄도한 제라스가 검을 휘둘러 패치스의 팔을 베어갔다.
“으윽!”
패치스가 깜짝 놀라 피하느라 피리를 놓치고 말았다.
패치스는 다시 피리를 주우려 했으나 우왕좌왕하는 해적들 사이로 달려온 구스타가 한발 빨랐다.
“어딜!”
한발 먼저 피리를 집어 든 구스타가 삼지창을 겨누자 패치스는 끄응, 하는 신음을 흘리며 무기를 버렸다.
“항복!”
패치스가 항복하며 전투는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흥, 재미없군.>
너무 시시하게 끝나 버리자 카이서스가 투덜거렸다.
‘시시하게 끝난 게 다행인 거야.’
카이서스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주변을 살폈다.
인어 왕국군이 해적들을 포박하는 사이로 구스타라는 머맨이 다가오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인어 왕국군의 지휘관을 맡고 있는 구스타라고 합니다.”
그 말에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온 왕자가 대답했다.
“나는 크라우드 왕국의 1왕자인 로라스 크라우드다.”
왕자라는 말에 구스타의 얼굴에 놀라움이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타밀레를 데리러 온 건가?”
“예, 그렇습니다. 인간의 왕자시여.”
구스타의 대답에 잠시 생각하던 왕자가 말했다.
“타밀레는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해적들이 노리고, 인어 왕국군이 직접 구하러 온 건가?”
왕자의 말에 구스타는 약간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건…….”
그의 모습에 고용인의 등에 업힌 채 다가온 타밀레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구스타! 이 사람들 착한 사람들이야! 목숨 걸고 날 지켜주려 했어!”
타밀레의 보증에 구스타는 그제야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사실……. 타밀레 님은 우리들의 무녀님이십니다.”
“무녀?!”
너무도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물론이고 왕자와 근위기사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녀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구스타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녀님은 우리 인어들의 선조들과 소통하며 왕을 보좌하는 분입니다.”
에엑?! 이 어린 머메이드가 그런 대단한 존재였어?
“얼마 전에 이 해적 놈들이 국보인 해룡의 피리를 훔쳐 간 것으로 모자라 외출하신 타밀레 님을 노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뒤늦게 쫓아왔는데…….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국보와 왕을 보좌하는 무녀를 빼앗겼다면 해적들에게 나라가 휘둘릴 수도 있었겠군.
바닥에 떨어진 해룡의 피리를 주워 든 구스타가 손을 내밀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무녀님을 돌려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왕자는 잠시 침묵했다.
인어의 무녀를 우리 손에 넣는다면……. 인어 왕국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그러지.”
하지만 왕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타밀레를 저들에게 건네주어라.”
근위기사들 중 몇몇은 인어 왕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될 무녀를 순순히 건네주는 것이 아쉬운 표정이었다.
타밀레를 등에 업고 있던 고용인이 그녀를 구스타에게 인도했다.
타밀레를 안아 든 구스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타밀레 님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순순히 내어주신 것도…….”
그 말에 왕자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왕실의 명예가 있는데 어린 여자아이를 이용할까 보냐. 게다가 우리가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저기 있는 창들이 우릴 향해 날아왔겠지.”
왕자의 말대로 후열에 있던 인어 왕국군들은 당장에라도 창을 던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구스타는 웃음을 짓고는 뒤돌아보며 손을 내저었다.
머맨 병사들이 창을 내리자 구스타가 다시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리석은 분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명예를 아는 거라고 해줬으면 좋겠군. 이제 돌아갈 건가?”
“예. 타밀레 님도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이만 가봐야지요. 돌아가면 크라우드 왕국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럼 이만 돌아가 주게. 여긴 우리 왕실의 사유지거든. 저 해적 놈들에게 처벌을 내리는 것도 잊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구스타는 병사들과 해적들을 이끌고 바다로 돌아갔다.
“바이바이! 다음에 또 봐!”
병사들 사이에서 헤엄치던 타밀레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우리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우리도 이만 마저 쉬러 가자고.”
왕자의 말에 우리는 별장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