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 바다와 인어
대륙력 755년 8월 4일.
올해 따라 무더워진 날씨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힘겨워했다.
나야 열기에서 몸을 보호하는 로브를 입고 있었기에 쾌적했지만 무더위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대단할 뿐이다.
왕궁을 어떻게 지었는지는 몰라도 실내는 꽤나 시원해서 괜찮아도 바깥은 정말 더웠다.
곳곳에서 근무를 서는 근위기사들이나 근위병들은 땡볕에서도 전혀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아마 체력이 좋아서 그런가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왕자가 기거하는 봄의 궁전 뒤편에 자리 잡은 정원에 앉아 태양을 만끽하던 중이었다.
시녀에게 부탁해서 얻어 온 음료수를 마법으로 차갑게 만들어 마셨다.
지난번에 드래곤 카락스가 다녀간 이후로 나를 대하는 왕궁 사람들의 태도가 한결 더 정중해졌다.
음료수를 부탁하면 하던 일도 제쳐두고 가져다줄 정도다.
“선생! 여기 있었군?”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왕자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로라스 저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오후 3시, 분명 이시간이라면 왕자는 검술 수업을 받고 있을 시간인데.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왕자가 웃으며 말했다.
“검술 선생의 딸이 오늘 출산이라 하여 휴가를 주었어. 그래서 시간이 남은 김에 선생이나 만나러 왔지.”
왕자의 검술 선생은 근위기사단장을 하다가 은퇴한 노기사였었지.
“그렇습니까? 한데 로라스 저하의 귀한 휴식 시간을 저에게 쓰셔도 괜찮겠습니까?”
사실은 나의 소중한 휴식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나 대놓고 말할 수 없었기에 그리 돌려 말했다.
하지만 눈치 없는 왕자는 내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이에게는 얼마든지 시간을 써도 괜찮아!”
아니, 내가 안 좋다니까요.
속으로 투덜대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선생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물어볼 것이라니요?”
“매년 여름마다 피서를 가는데 말이야. 선생도 같이 가면 어떨까 싶어서. 갈 거지?”
아니, 그건 물어보는 게 아니라 ‘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해라’잖습니까.
매년 여름마다 왕자가 어디론가 피서를 떠난다는 것은 나도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였다.
왕자가 피서를 간 동안은 나도 자유의 몸이니 적색 마탑에 다녀오려고 했건만.
내가 곤란해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왕자는 무척이나 기대하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하아, 이래서야 거절하면 왕자가 무척이나 실망하겠지.
“어쩔 수 없군요. 로라스 저하께서 그렇게 말하시는데 거절할 수야 없죠.”
그렇게 대답하자 왕자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
어쩌면 내가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걸 확신하고 물어본 걸지도.
“그런데 로라스 저하는 더위 때문에 힘든 것도 아니시면서 무슨 피서십니까? 저하의 옷은 전부 추위와 열기를 막는 마법이 걸려 있잖습니까.”
그저 마법사일 뿐인 내 로브에 걸려 있는 열기 차단 마법이 왕자의 의복에 걸려 있지 않을 리가 있나.
왕족의 옷에는 언제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청결 마법과 방한, 방서 마법 등은 기본으로 걸려 있으니까.
내 물음에 왕자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기분이지, 기분! 게다가 매일 왕궁에만 있으면 지겹잖아.”
흠, 기분 전환이라……. 괜찮을지도.
“피서는 어디로 가실 겁니까?”
내 말에 왕자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바다인 게 당연하지 않나!”
바다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이참에 바다 구경을 해보겠군.
* * *
대륙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우리 왕국은 2면을 바다와 접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수도와 가장 가까운 서쪽 해안의 데오른.
항구도시이자 휴양지로 유명한 도시이다.
왕자의 호위를 맡은 근위기사들이 먼저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이동하고 나와 왕자, 그리고 수행원들도 데오른으로 이동했다.
“흠, 역시 이 바다 특유의 냄새가 좋다니까.”
데오른에 도착하자마자 왕자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 말에 속이 울렁거려 벽에 손을 짚고 있던 내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았다.
처음 맡아보는 바다 냄새는 비릿하면서도 짠 내가 인상적이었다.
“자! 그럼 별장으로 가지!”
주변에 근위기사들을 두른 채로 데오른 외곽에 위치한 왕자의 별장으로 향했다.
“와아!”
태어나서 처음 본 바다는 정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물이 있었다.
왕자의 별장은 해변의 모래사장 옆에 위치해 있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별장이 위치한 인근은 모두 왕자의 소유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럼 간만에 느긋하게 쉬자고!”
왕자는 1년 만에 별장에 온 것이 조금 들뜬 듯했다.
“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바다는 처음 보는 데다가 지금껏 수련과 왕자의 교육만 하고 지냈기에 간만의 휴식에 들뜬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배정된 방에 짐을 풀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왕자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먼저 내려와서 소파에 드러눕듯 앉아 있었다.
왕족의 권위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다.
“흐으~ 역시 여긴 편하다니까. 이렇게 늘어져 있어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말이야.”
하긴, 왕궁에는 보는 눈이 많으니 저렇게 늘어져 있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하지만 여기는 피서는 핑계일 뿐, 왕족으로서 각종 교육과 시선을 피해 쉬러 온 것이기에 왕자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제는 완전히 드러누운 채로 별장을 관리하는 고용인이 가져온 쿠키를 먹고 있던 왕자가 히죽거렸다.
“늘 혼자 와서 조금은 심심했는데, 이번엔 선생도 같이 와서 재미있겠어.”
혼자라…….
“로라스 저하는 친구를 만드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내 물음에 왕자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 않나. 왕족이란 편하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정체를 숨기고 친구를 사귀더라도 정체를 알리는 순간 사람은 변해.”
어린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인간 불신이로군.
“뭐, 선생은 예외지만 말이야.”
해맑게 웃으며 말을 잇는 왕자의 모습에 순간 가슴이 따뜻해졌다.
인간을 믿지 못해서 친구 하나 없는 왕자가 나를 믿는다는 말이니까.
“로라스 저하…….”
살짝 감동한 내가 쳐다보자 왕자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자, 기왕 바다까지 왔으니 바다 구경이나 가지!”
“네.”
바다까지 와서 실내에만 있을 수는 없지.
근위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별장을 나섰다.
아무리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고 해도 혹시 모르기에 근위기사들의 호위는 꼭 필요했다.
나와 왕자는 편안한 차림인데 기사들은 전신 갑옷 차림에다 칼과 방패까지 소지한 완전무장 상태였다.
그들은 고생하는데 우리만 노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지만 어쩌겠어.
“야호!”
반바지에 반팔 셔츠 차림의 왕자는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허리춤까지 오는 깊이까지 들어간 왕자가 파도에 몸을 맡기며 물놀이를 하다가 내게 말했다.
“선생도 같이 놀자! 정말 시원하다고!”
“그러죠.”
바다까지 와서 구경만 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도 로브를 벗어서 한쪽에 내려놓았다.
로브를 벗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훅 느껴졌지만 바다에 뛰어들자마자 시원해졌다.
“푸웁! 짜!”
머리까지 바닷물에 담갔던 나는 입안 가득 느껴지는 짠맛에 입안의 바닷물을 뿜으며 소리쳤다.
“하하, 바닷물이니 짠 것이 당연하지!”
바닷물이 짜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짤 줄은 몰랐다.
“퉤, 퉤!”
입안에 남은 소금기를 뱉어내고는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겼다.
“아아, 기분 좋다.”
파도가 넘실거릴 때마다 몸이 둥실둥실 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내가 이래서 바다를 좋아한다니까!”
왕자도 기분 좋은 목소리로 내 말을 받으며 소리쳤다.
한참 여유롭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자니 모래사장으로 나온 별장의 고용인이 소리쳤다.
“저하!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사옵니다!”
우리가 별장에 도착한 것이 10시 조금 넘어서였고, 바다에 뛰어든 것이 11시쯤이니 한 시간 정도 물놀이를 했다는 말이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네.
나와 왕자는 바다에서 나와 고용인들이 건네주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모래사장 위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꽤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로 점심을 먹고 썬 베드에 누워서 일광욕을 시작했다.
“아~ 배도 부르고 햇빛도 쨍쨍하니 기분이 좋네.”
왕자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배도 부르고 따뜻하니 잠이 솔솔 오네요.”
잠이 와서 슬슬 눈이 감기던 그때.
바다에 무언가가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드래곤 하트로 인해 좋아진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 사람의 모습이었다.
“사, 사람?!”
머리가 긴 여자로 보이는 사람은 정신을 잃은 듯 둥둥 뜬 채로 파도에 떠밀려 오고 있었다.
나는 썬 베드에서 벌떡 일어나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선생! 무슨 일인가?”
물에 떠밀려 오는 여자를 발견하지 못한 왕자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가 떠내려오고 있습니다!”
내 말에 왕자도 깜짝 놀라 썬 베드에서 일어나 바다를 쳐다보았다.
“근위기사!”
바다에 뛰어든 내가 떠내려오는 여자를 향해 헤엄쳐 가자 왕자가 서둘러 근위기사들을 불렀다.
어느새 가까이 떠내려온 여자를 붙잡은 나는 깜짝 놀랐다.
“머, 머메이드?!”
떠밀려 온 것은 인어의 여성체인 머메이드였다.
에메랄드빛의 머리칼에 아름다운 외모의 머메이드는 정신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인간의 상체에 어류의 것과 같은 하체.
조개껍질로 가슴을 가린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흠, 머메이드라. 오랜만에 보는군. 그나저나 이 머메이드, 다친 것 같은데?>
그 아름다움에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카이서스의 말을 듣고서야 그녀의 등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았다.
길게 베인 듯한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부상을 입은 머메이드를 다급히 모래사장으로 데려갔다.
“머메이드?!”
왕자의 부름에 달려온 근위기사들도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내가 건져 온 것이 인간이 아니라 이종족인 머메이드라는 것에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다친 것 같군. 일단 별장으로 옮기도록 하지. 아, 머메이드는 바닷물이 있어야 하던가? 욕조에 바닷물을 담아놓아라!”
우리 중에서 가장 어린 왕자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명령을 내렸다.
근위기사들과 고용인들은 인간이 아니라 머메이드라는 것에 조금은 꺼림칙해하는 듯했으나 왕자의 명령에 응했다.
“예!”
근위기사들이 조심스레 머메이드를 둘러메고 별장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던 왕자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은 참 신기해. 피서 온 첫날부터 떠밀려 온 머메이드를 줍고 말이야.”
“하, 하하…….”
나도 솔직히 놀랐다.
휴가 온 첫날부터 정신을 잃은 머메이드를 발견할 줄이야.
“흠, 오늘은 이만 별장으로 돌아가지. 이래서야 더 놀지도 못하겠군.”
왕자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을 입은 채 정신을 잃고 떠밀려온 머메이드를 발견하고도 태연하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일광욕이나 하는 건 무리였으니까.
별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소금기를 씻어내기 위해 샤워를 하고 응접실에 모였다.
“그 머메이드의 상태는 어때?”
왕자의 물음에 여자 고용인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피를 많이 흘린 것을 제외하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듯합니다. 부상을 치료한 후 바닷물을 담은 욕조에 눕혀두었습니다.”
“잘했어. 깨어나면 알려줘.”
“네.”
고용인들이 물러나자 왕자는 쿠키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머메이드는 어쩌다 여기까지 밀려온 걸까?”
“그러게요. 저도 실제로 머메이드를 본 것은 처음인지라…….”
내가 듣기로는 인어들은 바다에서 자기네끼리만 살아가기에 인간의 눈에 띄는 일이 적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해안가까지 떠밀려 온 거지?
그것도 정신을 잃은 채로…….
갑작스러운 머메이드의 등장에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