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 왕궁 입성
트럼벨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왕궁으로 향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적색 마탑의 로브를 걸친 내가 다가오자 왕궁의 근위병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는 라엘이라고 합니다. 로라스 저하의 초청을 받아 왔습니다.”
왕자가 주고 간 초청장을 건네며 말하자 근위병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설마 로라스 저하의 마법 선생이 되기로 하신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분이십니까?!”
이미 다 소문이 퍼져 있는 모양이다.
“네, 그렇습니다.”
내 얼굴과 초청장을 보고 신원을 확인한 근위병이 감격하며 말했다.
“오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너무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다른 근위병 하나가 팔꿈치로 호들갑을 떠는 근위병을 치며 말했다.
“흠, 흠. 안으로 안내할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근위병들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하고는 안쪽으로 기별을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 안에서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와서 나를 안내했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멋진 궁전들이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이 시종이 멈춰 섰다.
“여기가 로라스 저하께서 기거하시는 봄의 궁전입니다.”
새하얀 돌로 지어진 궁전 앞에 서서 찬찬히 구경하고 있자니 안에서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오! 드디어 왔구나!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활기차게 웃으며 달려온 로라스 왕자가 내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저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손을 붙잡힌 내가 당황해서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차리자 왕자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앞으로는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그대는 내 선생이니까!”
그렇게 말한 왕자가 내 손을 붙잡은 채로 궁전 안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직 식사 전이겠지? 같이 식사하지!”
그러고 보니 때마침 점심때였다.
왕자의 손에 이끌려 궁전 안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넓은 식당 안의 커다란 테이블의 한쪽에 나를 앉힌 왕자가 맞은편에 앉으며 웃었다.
“자, 그럼 식사를 내어 오너라.”
식당 한쪽 문이 열리며 시녀들이 2인분의 식사를 줄줄이 내어 왔다.
겉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었지만 테이블의 크기에 비하면 적은 양이었다.
10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만한 테이블에 앉은 것이 겨우 2명뿐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그런데 내가 와서 2인분이라는 건…….
“혹시, 평소에는 혼자 식사를 하십니까?”
내 말에 왕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느냐.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정무를 돌보시느라 바쁘시고, 동생들은 아직 어리니까 말이다.”
내가 오기 전까지는 혼자서 식사를 했다 이건가.
2왕자와 공주는 아직 7살과 4살이라 했던가.
아직 어린 건 로라스 왕자도 마찬가지일 텐데, 혼자서 지내는 건 물론이고 식사마저도 혼자라니.
뭔가 좀 안쓰럽군.
“자, 멍하니 앉아 있지 말고 선생도 먹게.”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왕자가 내게도 식사를 권했다.
“아, 네.”
나는 앞에 놓인 송아지 스테이크를 포크로 집어 입에 가져갔다.
“무, 무척이나 맛있군요!”
연하고 육즙이 살살 흘러넘치는 데다 각종 향신료로 맛을 더한 것이 지금껏 먹어본 스테이크 중 최고였다.
내 말에 로라스 왕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훗, 그야 왕실의 주방장이 만든 음식이니까!”
그건 주방장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거 같은데 어째서 왕자님이 의기양양해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무척이나 즐거운 듯 보인다.
삼십여 분 후, 줄줄이 나오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먹다 보니 배가 빵빵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왕자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선생은 트럼벨에 머물 곳이 없을 테니……. 브루스!”
식당의 문이 열리며 집사들이 주로 입는 복장의 중년 사내가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인 수염을 잘 다듬은 것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이쪽은 브루스, 나를 보좌하는 시종들의 장이야. 선생에게 지낼 곳을 내어주고 주의할 점 같은 걸 알려줄 거야!”
활기찬 목소리로 떠드는 왕자의 말에 브루스를 쳐다보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라엘 님, 저를 따라오시지요.”
“아, 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브루스를 따라 식당을 나섰다.
“어차피 로라스 저하의 궁전에서 지내실 테지만……. 왕궁의 다른 곳을 돌아다니시는 것은 추천해 드리지 않습니다.”
궁전의 내부를 안내해 주며 브루스가 말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하긴, 나 같은 외부인이 왕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 보안상으로도 문제가 많겠지.
봄의 궁전 내부의 안내를 마친 브루스가 멈춰 섰다.
“이곳이 라엘 님이 지내실 방입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브루스가 안내해 준 방은 무척이나 호화로웠다.
뭐, 궁전 내부에 있는 방이니 호화로운 것이 당연하겠지만……
내가 써도 정말 괜찮나……. 싶을 정도로 넓고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아, 그리고 로라스 저하를 가르치시는 건 내일 오전 10시부터 두 시간 동안입니다.”
수업 시간은 하루 두 시간인가.
“그럼 나머지 시간들은 자유 시간인가요?”
내 물음에 브루스가 웃음을 지었다.
“문제 될 만한 일만 안 하신다면 뭘 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그 문제 될 만한 행동이 뭔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자 브루스는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알아서 눈치껏 잘하시면 됩니다. 그럼 저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뭐야 그 무성의한 말은?!
알아서 눈치껏이라는 말이 제일 어렵다고!
* * *
“엥? 없다고?”
“라엘은 로라스 왕자님의 마법 선생이 되어서 왕궁으로 갔어요.”
붉은 마탑의 입구를 지키던 제임스는 낯선 손님에게 귀찮음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은 그가 마탑의 입구에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날이다.
지금은 조금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가끔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를 찾는 손님들이 찾아오곤 했다.
“흠, 왕궁이라…….”
편안한 복장을 한 파란 머리 청년은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제임스는 생각했다.
호기심이나 각종 이유로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를 만나보려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왕궁이라는 말을 들으면 포기하곤 했다.
아무리 마탑까지 찾아오는 사람이라 해도 왕궁은 함부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눈앞의 손님도 포기할 거라 생각하는 제임스였지만.
“이것 참……. 귀찮게 또 이동해야 하나?”
파란 머리의 청년은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봐요, 아무리 라엘을 만나보고 싶어도 왕궁에 함부로 갔다간 경을 칠 겁니다.”
제임스의 충고에 파란 머리 청년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는 파란 머리 청년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제임스는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마탑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제임스는 금방 그 손님에 대한 것을 잊었다.
그 손님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 * *
왕자와의 첫 수업을 하는 날.
우선은 왕자의 자질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로라스 저하, 그럼 두 손을 제게 내밀어보시겠습니까?”
나는 아직까지 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자질을 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직접 만져봐야만 했다.
내 말에 왕자는 흔쾌히 두 손을 내밀었다.
나는 왕자의 손을 붙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마법에 대한 재능은……. 아예 없는 수준은 아니지만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예전의 나에 비하면 재능이 있는 편이지만 마법사로서 대성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걸 그대로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왕자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의 마법사들에게서 내 재능의 수준은 귀가 따갑게 들었다. 그냥 취미로 배우려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라.”
뭐, 그러시다면야.
“그렇다면 우선 마나를 느끼는 방법부터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좋다! 시작하자!”
나는 왕자를 정좌시키고는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야 카이서스의 심장을 먹은 이후에 재능이 엄청나게 생겨서 혼자서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지만 보통은 이렇게 도움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다가 왕자의 재능은 낮은 수준이라 도움이 필수였다.
“제가 마나를 로라스 저하의 심장 부근으로 보낼 테니 집중해서 느껴보십시오.”
“그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약간은 들뜬 듯한 왕자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마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나 뒤늦게 마나를 느낀 듯 왕자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우옷?!”
“소리를 내시면 안 됩니다.”
왕자 같은 초보가 마나를 운용하며 소리를 낸다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마나가 폭주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붙어서 운용해 주는 것이지만.
“마나를 느끼셨으면 이제 마나가 움직이는 경로를 잘 기억해 두십시오.”
소리를 내지 말라는 내 말을 기억한 듯 왕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왕자의 등에 손을 댄 채로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등을 통해 컨트롤되는 마나가 왕자의 몸속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마나를 운용하는 것이기에 마나가 반쯤 막혀 있던 통로를 지나갈 때마다 왕자는 작은 신음을 흘리며 흠칫거렸다.
“긴장을 푸십시오. 조금 간지러우실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실 겁니다.”
조금은 긴장한 듯한 왕자를 다독이며 마나를 심장으로 이끌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마나를 운용하는 데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심장.
가장 중요한 곳이니만큼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마법을 처음 익히는 몇몇 사람들은 마나를 잘못 운용하여 심장에 무리를 줘 폐인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스승과도 같은 이가 처음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혼자서 마법을 익히기 시작한 나는 참 대단하단 말이지.
아무리 드래곤의 심장으로 몸이 바뀐 데다 드래곤의 지도를 받았다곤 해도 혼자서 마법을 익힌 거잖아?
우후후.
속으로 웃음을 흘리는 사이 왕자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헉, 딴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왕자가 잘못되기라도 했다간 내 목도 성하지 못할 거라고.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마나의 컨트롤을 세심하게 했다.
몸속을 한 바퀴 돈 마나가 심장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마나를 심장에 고정시켜서 원을 만든다는 느낌으로……. 이 감각을 기억하십시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마나가 왕자의 심장 부근에서 사르르 흩어졌다.
“아…….”
몸속에서 마나가 움직이는 첫 경험이 끝나자 왕자는 아쉬운 듯한 탄식을 내뱉었다.
“어떠셨습니까?”
내가 처음 마법을 익혔을 때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완전 신기해! 몸 안에서 뭔가 간질간질하는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기분이었어!”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마나에 대한 감상 말고요. 마나가 지나는 통로와 순서, 그리고 심장 주변에 묶어두는 감각을 기억하시냐는 겁니다.”
“음……. 대충은 기억나는데 확실히는 모르겠어.”
뭐,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면 곤란하니 내일 다시 감각을 익히도록 해보죠. 어차피 정해진 수업 시간도 벌써 끝났고요.”
“뭐? 정말?”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말에 로라스 왕자는 깜짝 놀란 듯 물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마나를 운용하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처음 마나를 운용해 본 왕자로서는 잠시라고 생각했는데 두 시간이 흐른 것이 신기할 것이다.
“마법이란 건 정말 재미있구나!”
또래의 아이처럼 웃으며 말한 왕자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가 고프구나. 선생도 나와 같이 밥을 먹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잔뜩 신이 나서 교실로 쓰는 방을 나서는 왕자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웃었다.
이것도 꽤나 재미있는걸?
나를 가르치실 때 스승님도 이런 감정이었던 걸까.
“뭘 하느냐? 빨리 따라와!”
내가 늦게 따라가자 식당으로 앞서가던 왕자가 돌아보며 소리쳤다.
“네, 갑니다!”
나는 왕자의 말에 대답하며 걸음을 빨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