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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25화 (25/150)

025화 -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

“으, 으음…….”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뜬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스승님과 대스승님의 얼굴이었다.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두 분은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났느냐?”

“대,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내가 당황해서 묻자 대스승님이 화를 내듯이 말했다.

“우리야말로 묻고 싶은 이야기다! 대체 어떻게 9서클의 마법을 쓴 게냐?!”

“저, 저도 몰라요.”

‘카이서스! 카이서스!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봐!’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카이서스를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알 수 없잖아!

내가 속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걱정스레 지켜보던 스승님이 말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지? 말하렴.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니.”

스승님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내 안에 있는 카이서스의 존재에 대해서 알렸다.

내가 드래곤 하트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빼고.

두 분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경악하며 입을 쩍 벌렸다.

“드, 드래곤이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잠시 침묵하던 두 분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물어왔다.

“그 드래곤과 이야기하게 해다오!”

“우리도 드래곤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니?”

그 말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내젓는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어요. 정신을 잃고 난 이후로 카이서스가 대답을 하지 않아요.”

“흠, 드래곤이 침묵 중이라……. 아마도 네 몸으로 메테오를 사용한 것과 연관이 있는 모양이구나.”

대스승님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떡하죠? 다들 라엘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있어요.”

스승님이 곤란하다는 듯 대스승님의 의견을 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5서클 마법사인 내가 갑자기 메테오를 사용했으니 사람들이 경악하면서도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스승님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대스승님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 그러면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는 자’라는 걸로 설정하자.”

서, 설정이라고?!

“네? 그걸 누가 믿어요?”

내가 황당해하며 묻자 대스승님은 왜 안 되냐는 듯 쳐다보며 대답했다.

“나와 네 스승이 그렇게 말하는 데다가 9서클의 메테오를 수십만 명이 보았는데 누가 못 믿겠냐.”

확실히 메테오는 드래곤이라는 위대한 존재로 설명할 수밖에 없지.

“으음.”

꽤나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아, 그런데 전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문뜩 떠오른 것을 묻자 스승님과 대스승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 * *

전쟁은 갑자기 제국군 한가운데로 떨어진 메테오 때문에 소강상태라고 했다.

제국군으로서는 4만 명의 엄청난 피해를 입은 데다 또다시 메테오 같은 엄청난 게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왕국군으로서는 당연히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이니 먼저 제국군을 공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적색 마탑의 마탑주가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자신의 제자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라는 것.

그 말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전장 한복판에 떨어진 메테오, 그리고 메테오를 사용하기 전에 보였던 인간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모습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들은 그 말을 믿었다.

그것은 제국군의 병력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국군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그에 반해 왕국군의 사기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전장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타이런 제국의 수도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 * *

쾅!

분노에 가득 찬 주먹이 책상을 두드린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라니!”

호화로운 의자에 앉아 있는 30대 남자의 외침에 커다란 책상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9서클의 마법인 메테오가 등장했습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는 데다 또 무엇이 나올지…….”

그중에서 노년의 사내 하나가 용기를 내어 간신히 대답했다.

그 말에 타이런 제국의 황제, 타이커스 프리드리히 타이런은 쌍심지를 켜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재상!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뭔가 왕국 놈들이 속임수를 쓴 것이 아니냔 말이야!”

황제의 분노로 가득 찬 외침에 재상이라 불린 노인도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때 구석에 서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폐하, 제가 본 바에 따르면 그것은 확실히 메테오였나이다.”

그렇게 말하며 걸어 나온 것은 무엄하게도 황제의 앞에서조차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내.

마법사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으나 아무런 표식도 보이지 않았다.

“루리스 경, 전장에서 언제 돌아온 건가? 그보다, 정말 메테오였단 말인가?!”

후드를 벗지도 않은 채 말하는 그의 모습에도 황제는 화를 내는 기색 없이 물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잔뜩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예. 드래곤의 가호라든가, 어떤 방법을 사용한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 메테오였나이다. 지금은 놈들의 잔재주가 드러날 때까지는 물러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루리스의 말에 황제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대륙 통일을 위한 첫걸음으로 크라우드 왕국을 가장 먼저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자네 아니었나!”

타이런 제국이 크라우드 왕국을 공격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 남자, 루리스였다.

황제의 외침에도 루리스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황제 폐하, 이미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 중이옵니다. 애초에 크라우드 왕국 정벌은 좀 더 쉽게 대륙 통일을 하기 위한 방안이었을 뿐, 약간 미뤄질지라도 하등의 문제가 없사옵니다.”

자신만만한 루리스의 대답에 황제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단 말이네. 지난번에는 다른 나라들의 참견으로, 이번에는 그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놈인가 뭔가 때문에 군사를 되돌려야 한다니!”

거대한 제국의 지배자로서 두 번의 전쟁 모두 별 소득 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하나 폐하, 대륙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물러나실 줄도 아셔야 하옵니다.”

대륙 통일이라는 달콤한 말이 황제의 노기를 가라앉혔다.

“끄응……. 어쩔 수 없지. 정전 협상에 관한 것은 재상이 알아서 하도록 하고, 모두 물러나라!”

“예! 폐하!”

황제의 말에 모두가 회의실을 나섰다.

“그대의 말, 믿어도 되는 것이겠지?”

가장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서던 루리스에게 황제가 말했다.

“신은 이미 황제 폐하께 목숨을 바친 몸이옵니다.”

루리스의 말에 황제는 만족스럽다는 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그러나 회의실을 나서는 루리스의 후드 아래로 언뜻 보이는 입술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결국 제국이 먼저 휴전 협상을 제의해왔다.

제국으로서는 뼈아픈 일이겠지만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고 소문난 나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제국의 자존심이 있는지라 아무런 배상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크라우드 왕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휴전 협상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5년간 양국은 모든 적대행위를 금한다.

이것이 협상의 전부였다.

“하아, 뭔가 맥이 빠지네요.”

내 말에 스승님이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이니?”

“지난번 전쟁도 그렇고, 이번 전쟁도 그렇고 정신을 잃고 일어나니 전쟁이 끝난다는 게요.”

“그럼 전쟁이 좀 더 길어졌으면 좋겠니?”

“아, 그건 아니지만요.”

나와 스승님, 대스승님은 야나스 요새를 떠나 수도인 트럼벨로 이동했다.

왕실에서 이번 전쟁에 큰 공을 세운 나와 스승님, 대스승님을 연회에 초대한 것이다.

“왕실의 연회 같은 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네요.”

내 말에 대스승님은 껄껄 웃으며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냥 무시하면 된다!”

아니, 무시만 했다간 나쁜 이미지만 쌓일걸요…….

그 말에 스승님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많은 사람이 너에게 다가올 거란다. 적당히 예의만 차리며 말을 아끼렴. 내가 알아서 하마.”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다간 드래곤의 가호가 뻥이라는 것을 들킬지도 모르니까.

“네.”

나는 말을 아끼라는 스승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었다.

크라우드 왕국의 왕궁이 저 앞에 보이고 있었다.

하이넨에 갔을 때 보았던 타이런 제국의 황궁보다는 작았으나 충분히 화려했다.

“멈추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우리가 왕궁으로 다가가자 정문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들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적색 마탑의 카밀라 루드비히. 왕실의 초청을 받아 연회에 참가하기 위해 왔네. 이쪽은 내 스승님과 제자라네.”

왕실에서 보내온 초청장을 내밀며 스승님이 말하자 앞을 막아섰던 근위병이 조금은 놀란 듯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나를 쳐다보았다.

“적색 마탑주님의 제자라면 그…….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내할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근위병들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하고는 안쪽으로 기별을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 안에서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와서 우리를 안내했다.

시종의 뒤를 따라가며 왕궁을 구경했다.

“역시 높으신 분들이 사는 곳은 대단하네요.”

역사와 전통이 느껴지는 왕궁의 모습에 내가 감탄하자 대스승님이 혀를 찼다.

“흥, 그래 봐야 사람 사는 곳이지. 다 쓸데없는 것들이야.”

과연 대스승님다운 말이로군.

각자의 방으로 안내된 우리는 저녁에 있을 연회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했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왕실에서 내어준 예복을 입고, 시종의 안내를 받아 연회장으로 향했다.

“은둔의 대마법사이신 키린토 마그나이저 님, 적색 마탑의 주인이신 카밀라 루드비히 님, 그리고 그 제자이시자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라엘 님이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의 입구에 서 있던 시종이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안쪽을 향해 크게 외쳤다.

솔직히 좀 쪽팔렸다.

게다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고 크게 떠들어대다니.

아무래도 왕실은 내 존재를 제대로 이용하려는 듯했다.

“오, 저 젊은이가 바로 그…….”

“생각보다는 어려 보이는군요.”

시종의 외침에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물론 대부분은 날 향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뭔가 기분이 불편했다.

“긴장 풀렴.”

내가 긴장한 것을 눈치챘는지 스승님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다행히도 처음으로 다가온 사람은 나도 아는 인물들이었다.

“오, 카밀라 님, 오랜만입니다.”

크라우드 왕국 마법학회장인 그랜돌프 님이었다.

“그랜돌프 님도 오랜만입니다.”

스승님과 인사를 나눈 그가 나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카밀라 님의 제자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아이라니, 꿈에도 상상 못 했습니다.”

“후후, 가끔은 숨겨야 할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러는 스승님도 카이서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지만.

“혹시, 그 드래곤과 대화해 볼 수는 없겠습니까?”

“제자 말로는 메테오를 쓴 직후에 침묵하는 중이라더군요.”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그보다 제가 본 메테오 말입니다. 학회에서 추정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더군요.”

카이서스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그랜돌프 님이었다.

“정말입니까? 메테오의 마나 파동은 어땠습니까?”

하지만 스승님이 메테오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자 금세 눈을 반짝이며 스승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는 듯한데, 저도 끼워주시지요.”

뒤이어 다가온 것은 청색 마탑의 세르바인 님이었다.

세 분은 금세 마법에 관한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거기다 듣고 있던 대스승님까지 합세했다.

네 명의 마법사들이 마법에 대한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주변에서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건 좀 좋군.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줄은 몰랐어.”

그러고 보니 세르바인 님이 있다는 것은 아리안도 있다는 소리다.

“아리안 누나.”

뒤늦게 그녀를 알아차린 내가 인사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에서 떨어졌을 때는 정말 놀랐어. 그런데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었을 줄이야……. 괜한 걱정을 했었지 뭐야.”

“아하하, 그랬어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드래곤의 가호를 받게 된 거야?”

“어, 그건 그러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던 차였다.

“하이만 크라프트 크라우드 국왕 전하와 마리아 크라프트 크라우드 왕비 마마께서 드십니다!”

입구에서 누군가 외친 말에 모두가 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국왕을 맞이했다.

조용해진 연회장 내부에 국왕 내외와 수행하는 시종들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고개를 들라.”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들어 연회장 가장 안쪽을 보며 소리쳤다.

“국왕 전하와 왕비 마마를 뵙습니다!”

연회장 가장 안쪽의 상석에 앉은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 사람들의 말에 가볍게 손을 들어 화답했다.

“다들 전쟁을 치르느라 고생 많았네.”

그렇게 시작한 국왕의 치하의 말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에 왕국을 구한,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여, 앞으로 나오라.”

…으, 응? 나 말인가?

잠시 멍때리고 있던 나는 아리안이 팔꿈치로 쿡쿡 찌르고서야 나를 부른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황급히 국왕의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라, 라엘이 국왕 전하를 뵙사옵니다.”

“고개를 들라.”

내가 고개를 들자 국왕이 말했다.

대부분은 흘려 넘겨도 좋은, 드래곤에 대한 칭송과 나에 대한 치하였다.

“…그러니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여, 앞으로도 우리 왕국을 위해 노력해다오.”

“네.”

나의 대답에 흐뭇하다는 듯 쳐다본 국왕이 모두에게 말했다.

“오래들 기다렸네.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하라!”

국왕이 진짜 연회의 시작을 알리자 모두가 웃으며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스승님과 대스승님의 곁으로 돌아온 나에게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대부분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는 나에게 호기심을 느끼거나 친분을 쌓으려는 자들이었다.

스승님이 말하신 대로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말을 아꼈다.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제대로 연회를 즐기지도 못했다.

결국, 연회가 파할 때까지 연회의 만찬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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