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화 - 또다시 전쟁
스승님이 마탑 간의 회담을 위해 프레첸 제국의 자색 마탑으로 가신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스승님은 자리를 비우신 와중에도 틈틈이 연락을 취해오셨다.
대부분은 마탑의 운영 대리를 맡은 칸델 씨에게 연락한 것이었으나 나를 찾기도 했다.
[잘 지내고 있니?]
“네. 스승님도 가신 일은 잘되어가고 계신가요?”
[딱히 해결 방안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모든 마탑이 협력하는 것에는 동의했단다. 곧 타이런 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협력하겠지.]
확실히 해결 방안이 나올 구멍이 없지.
하지만 모든 나라가 협력한다면 타이런 제국도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오산이었다.
“크, 큰일입니다!”
나와 스승님이 편하게 대화를 나누라며 통신실 밖으로 나갔던 칸델 씨가 다급하게 외치며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그 모습에 스승님이 통신구 너머에서 당황하며 물어왔다.
“타이런 제국이… 또 우리나라에 선전포고를 해왔습니다!”
칸델 씨의 말에 스승님은 물론이고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각국이 협력하는 것이 거의 정해진 판국에 타이런 제국이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타이런 제국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리 타이런 제국이 강대하다고 해도 다른 왕국들과 프레첸 제국을 동시에 상대하지는 못할 텐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이미 타이런 제국의 군대가 국경으로 이동 중이라 합니다.”
[…서둘러 귀환할 테니 전쟁 준비를 부탁하네.]
“네!”
맙소사, 또 전쟁이라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전쟁이야?
타이런 제국이야 워낙 대제국이라 괜찮을지 몰라도 우리 크라우드 왕국 같은 소국은 한번 전쟁을 치르고 나면 회복하는 데 한참 걸린다고.
통신을 종료한 직후 칸델 씨는 침중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가서 키린토 님께 이 사실을 알려 드리게. 그분이 어찌하실지 모르겠지만…….”
칸델 씨 입장에서는 대스승님이 우리와 함께 참전해 주시기를 바라겠지.
전쟁에서 8서클 대마법사가 한 명 더 늘어나면 무척이나 든든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통신실을 나온 나는 숙소로 향했다.
대스승님은 내 방의 바로 옆방에서 지내시는 중이었다.
똑똑-
“대스승님, 계세요?”
“들어오너라.”
어디서 구해 온 건지 다구 세트를 갖춰놓고는 차를 마시고 있던 대스승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 카밀라 녀석은 뭐라더냐?”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묻는 대스승님의 말에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하아, 가신 일은 잘되었대요. 그런데…….”
“그런데?”
“타이런 제국이 크라우드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어요.”
“또?!”
대스승님도 그건 짐작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네. 이미 국경으로 군대를 이동 중이라고 하네요.”
“흠, 전쟁의 명분이야 당연히 이번 일로 황실이 모욕당했다는 거겠지.”
우리가 칼라마쉬의 서라는 사악한 물건을 제국이 훔쳐 갔다는 것을 알렸으니까.
만약 거짓이라면 제국의 입장에서는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명분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화가 날 뿐이다.
“아무래도 저희는 전쟁에 참전해야 할 것 같은데……. 대스승님은 어쩌시겠어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대스승님은 흐음, 하는 소리를 흘리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내가 참전하기를 바라겠지?”
“네……. 그야 그렇죠. 아무래도 8서클의 대마법사가 한 명 더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크니까요.”
잠시 생각하던 대스승님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나도 힘 좀 써볼까.”
“그 말은?”
“아래의 병사들이야 죄가 없다지만 제국 놈들 뜻대로 되게 할 수는 없지.”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타이런 제국의 8서클 대마법사는 세 명, 그에 비해 크라우드 왕국 소속의 대마법사는 단 두 명.
대스승님이 참전해 주신다면 적어도 대마법사의 숫자는 같아진다.
그렇다고 해도 전쟁에서 불리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스승님도 그 말을 들으시면 기뻐하실 거예요.”
“클클, 그렇겠지.”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 일어선 대스승님이 나를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네가 1인분이라도 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5서클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1년 만에 4서클이 된 녀석이 엄살은! 네 괴물 같은 재능이면 충분히 가능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대스승님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카이서스가 말했다.
<크크, 늘 말하지만 나의 심장을 흡수한 이후의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애초에 네게 재능과 지능이라는 게 조금만 더 있었다면 지금쯤 7서클은 되었을 거다!>
이 빌어먹을 드래곤 같으니, 내가 멍청하다는 소리를 하다니.
진실을 가지고 명치를 때리는 건 너무하잖아.
그보다 카이서스 녀석의 심장이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
지상 최강의 생물이라 불리는 드래곤의 심장이니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에서 일어난 대스승님이 내게로 다가와 말했다.
“후후후, 전쟁터로 가기 전까지 더욱 혹독하게 수련시켜 주마!”
그 시선이 뭔가 음흉하게 보여서 불안해지는 나였다.
* * *
“그동안 무슨 일 있었니?”
2주 후 프레첸 제국에서 귀국한 스승님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물으셨다.
나는 며칠째 제대로 잠도 못 자서 해쓱해진 얼굴로 힘없이 웃어 보였다.
“하하……. 5서클이 되었어요.”
“5서클? 역시 스승님께 너를 맡긴 것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구나.”
하하……. 당사자인 나로서는 그다지 즐거운 경험은 아녔지만 말이죠.
게다가 5서클이 되기는 했지만 서클의 불안정함은 여전했다.
한마디로 어거지로 5서클에 오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6서클에 오르는 건 더욱 힘들 거란 얘기지.
카이서스 녀석에게도 해결책을 물어봤지만 알아서 하라는 속 편한 소리만 해대고 말이야.
내가 서클 브레이커에 오르지 못하면 죽는 건 카이서스도 마찬가지 아녔어?!
“전쟁을 앞두고 있는 터라 너의 성장을 축하해 줄 시간도 없어서 미안하구나.”
스승님은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마중 나온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스승님도 참전하겠다고 하셨단 걸 들었습니다.”
“뭐, 제국 놈들 하는 짓이 워낙에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다.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이번 전쟁도 놈들의 계획 중 하나일 테니 훼방이나 놓아줘야지.”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 말에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스승님은 감사를 표했다.
“칸델, 준비는 모두 마쳤는가?”
스승님은 나와 대스승님을 뒤로하고 칸델 씨에게 물었다.
“네. 모두 전쟁터로 나설 준비를 마치고 전장에서 쓸 물건들도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스승님이 말을 이었다.
“오는 길에 왕실에서 연락을 받았네. 이미 국경에선 전투가 벌어졌고, 우리 왕국의 1군단은 계속해서 밀리는 형국이라 하네. 서둘러 우리가 가서 도와야 해.”
“네. 곧장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스승님은 오자마자 출정을 준비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마쳐놓았던 터라 우리는 각자 짐을 챙기고 마탑을 떠날 채비를 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마탑을 지킬 사람들만 남겨두고 80명이 마탑을 떠났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여 국경에서 가까운 도시, 요새도시 야나스로 이동했다.
전쟁 발발 2주.
전쟁이 일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벌어진 전쟁으로 야나스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각지에서 모여든 군대와 용병들로 가득했다.
현재 국경에서 계속해서 밀리고 있는 탓에 적은 벌써 야나스 인근까지 와 있다고 한다.
지난번처럼 크라우드 왕국의 총 사령관, 마일렌 공작은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을 빠르게 투입시킬 것을 부탁해 왔다.
칼나란 평야를 지난번 전쟁에서 내어준 탓에 야나스 요새가 전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스승님은 마탑의 마법사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번에도 할 말이 그리 많지는 않군. 다들 무사히 살아남아서 보세.”
스승님의 말에 다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이후에 들어온 신참 마법사들은 물론, 지난번 전쟁을 겪었던 대부분의 마법사들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불리한 전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요새의 성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고함 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사령관인 마일렌 공작에게 전입신고를 한 이후, 우리는 지난번 전쟁 때처럼 각자 흩어져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이번에 내가 배치된 부대는 만약을 대비해서 대기하는 크세르스 부대라 불리는 오백인대.
부대장인 크세르스는 어반 남작가의 아들이자 스물여섯의 청년으로 이번이 첫 참전이라고 했다.
베테랑이 아닌 초짜의 지휘를 받는다니 조금 불안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네가 내 부대로 배정된 마법사인가.”
처음보자마자 하대를 해대는 크세르스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꽤나 성질이 고집불통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전장에 한 번밖에 참전해 보지 않은 나조차도 이런 상관은 피곤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적색 마탑 소속의 5서클 마법사인 라엘입니다.”
“이봐! 밖에 누구 없나!”
내 소개를 들은 그가 막사 바깥으로 소리쳤다.
“네. 부르셨습니까.”
병사 하나가 그 외침에 안으로 들어오자 크세르스가 말했다.
“이 마법사를 마법사들의 막사로 안내해라.”
“네. 마법사님, 저를 따라오십쇼.”
크세르스는 나와 그다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병사를 따라 부대장 막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막사로 이동했다.
“적색 마탑 소속의 5서클 비기너인 라엘입니다. 참고로 스무 살이니 어리지는 않습니다.”
내가 막사로 들어서며 인사하자 안에서 쉬고 있던 마법사들 중 하나가 인사를 받았다.
“반갑네. 나는 4서클 마스터인 프랑키야. 이쪽은 4서클 익스퍼뜨인 아벨. 그리고 저쪽은…….”
프랑키가 다른 마법사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크세르스 부대에 소속된 마법사는 나를 포함해 총 네 명이었다.
그리고 막사의 가장 안쪽에 있던 마법사를 발견한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아리안 누나?”
청색 마탑주의 제자, 아리안이었다.
“응? 아는 사이인가? 그럼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겠구먼.”
프랑키가 그렇게 말하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오랜만이네. 또 같은 부대에 소속될 줄이야…….”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던 아리안이 나를 보고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네, 또 같은 부대네요.”
“그보다, 벌써 나와 같은 5서클이라고? 지난번에 분명히 3서클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녀의 의아해하는 물음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 운이 따라준 덕분에…….”
드래곤 하트의 힘과 8서클 대마법사의 빡센 지도를 받아서 순식간에 5서클이 되었다고는 말하기 힘들지.
“역시 대단하구나. 이번에도 잘 부탁해.”
놀라움이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며 아리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먼저 내밀었다.
“네.”
나는 그녀의 내민 손을 맞잡으며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막사 바깥, 성벽 너머에서는 전장의 거친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운 좋게 후방의 부대에 배치받았다지만……. 조만간 전장에 투입될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나와 악수를 나누는 아리안도 그것을 아는지 조금은 굳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