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 황녀와의 식사
저녁이 되자 우리는 지난번에 황녀를 처음 만났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주변에는 몇몇 사내가 나름대로 눈에 띄지 않게 서서 주변을 통제하고 있었다.
어차피 한적한 곳이라 통제할 인원도 거의 없었지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녀님은 잠시 후에 도착하실 겁니다.”
지난번에 보았던 황녀의 호위 중 하나가 우리를 맞이했다.
“다행히 황녀님을 기다리게 하는 무례는 저지르지 않아 다행이로군.”
대스승님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는 황녀의 호위로 보이는 자들만 서 있을 뿐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황녀의 방문 때문에 전세를 낸 듯하다.
지난번에는 황녀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었기에 아무 조치 없이 다섯 호위만 대동하고 방문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황녀의 정체가 대중들 앞에서 밝혀진 상황.
그저 식사를 위해 식당을 방문하는 일에도 호위가 늘어난 것이다.
호위들의 면면에 비하면 식당이 허름하기 짝이 없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황녀임이 밝혀진 이상 좀 더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약속을 잡아도 될 텐데.
어지간히도 이 식당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아니면 황족답지 않게 소박한 성격인 걸지도 모르지.
“어서 오세요.”
자리에 앉자 식당 주인이 주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인사했다.
“그쪽도 많이 당황하신 모양이오.”
“네, 많이 놀랐지 뭐예요.”
대스승님이 웃으며 던진 말에 주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자주 찾아오던 단골 손님이 사실은 황녀였다는 사실에 아직도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주인이 내온 과즙 음료를 마시며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드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알렉스를 비롯한 근위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섰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후드를 벗으며 카리야가 물은 말에 대스승님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오늘도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저희도 방금 전에 왔사옵니다.”
다행히 제멋대로인 대스승님이라도 황족을 상대로는 예의를 차렸다.
“너무 과하게 예의를 차리시면 오히려 제가 불편합니다.”
미소를 띠고 나직하게 말하는 카리야의 말에 대스승님도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렇습니까?”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 제가 좋아하는 가게인지라 여기서 뵙자고 했는데, 괜찮으신가요?”
황녀가 그렇게 묻는데 안 괜찮다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대스승님은 음식의 맛을 즐기는 데 지장만 없다면 외관이나 분위기를 신경 쓰는 분이 아니었다.
“허허, 그럴 리가요, 이 늙은이도 이 식당을 좋아하잖습니까. 오히려 황녀께서야말로 실망이 크시겠습니다.”
무슨 말이냐는 듯 황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대스승님이 재차 말을 이었다.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졌으니 이제는 전처럼 여유롭게 이곳에 식사하러 오기도 힘드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대스승님의 말에 황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 괜찮습니다. 아, 그래도 이곳의 음식을 더 이상 먹지 못하는 것은 아쉬우니 아주머니는 제 전속 주방장으로 초청할까 합니다.”
이곳 주인아주머니를 황궁까지 데려가겠다니.
정말 이 식당의 음식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네?! 쇠, 쇤네를요?!”
미리 전해 듣지 못했었던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주인아주머니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싫으신가요?”
“그, 그럴 리가요! 쇤네 가문의 영광입니다요!”
웃으며 묻는 황녀의 말에 주인아주머니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평범한 식당의 주인에서 황녀의 전속 요리사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신분 상승이다.
“우선 오늘의 추천 메뉴로 3인분 부탁해요.”
“네!”
생각지도 못하게 신분이 상승하게 된 주인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기색으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허허, 그러면 오히려 이 늙은이가 더 이상 이 가게의 음식을 먹지 못하겠군요.”
대스승님이 조금은 아쉽다는 듯 말하자 황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국의 궁정 마법사가 되신다면 언제든 드실 수 있을 거예요.”
아직까지 공석으로 비어 있다는 타이런 제국의 궁정 마법사 자리를 제안하는 말에 대스승님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 늙은이는 그런 높은 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한곳에 정착할 마음도 없습니다.”
대스승님의 정중한 제안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하이넨에 들르실 때 같이 식사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죠?”
“허허, 초대만 해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화기애애한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다가 내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런데 황녀님, 대스승님은 무슨 이유로 보자고 하신 건가요?”
설마하니 잡담이나 나누려고 번거로움까지 무릅쓰고 만나려 한 것은 아닐 텐데 말이야.
내 물음에 황녀는 깊고 푸른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누군가를 만날 때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 그건 아니지만……. 황녀님이시잖아요. 뭔가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
“않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겠죠.”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는 갑자기 피식 웃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황족이라는 신분도 꽤나 피곤한 거랍니다.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하고, 가고 싶은 곳도 가지 못하죠.”
“…….”
씁쓸함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나와 대스승님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실 지난번 일로 황제 폐하께 한동안 외출을 허락받지 못하게 되었어요. 이번도 대마법사님과의 식사를 빌미로 얻어낸 외출이에요.”
그럼 허락이 없으면 계속 황궁에 갇혀서 살아야 한다는 거야?
그건 좀… 불쌍하잖아.
내 시선에서 그런 뜻을 읽었는지 황녀가 괜찮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황실 여인의 운명이 다 그런 걸 어쩌겠어요. 얌전히 지내다가 정략결혼의 대상이 되고……. 그런 거죠. 그러다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답니다.”
웃음을 짓고는 있었으나 서글픔을 숨기지는 못했다.
황녀라는 신분에게도 저런 고민이 있군.
“허허, 그래서 이 늙은이와 뭘 하고 싶으신 겁니까?”
대스승님이 웃으며 묻는 말에 황녀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둔의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분이라면 다른 것을 바라지 않고 저와 이야기를 나눠주실 테니까요.”
하긴, 8서클의 대마법사임에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돌아다니는 대스승님이라면 그렇겠지.
상대가 황녀라 해서 굳이 잘 보이려고 한다거나 뭘 바라진 않겠지.
그럴 거라면 아까 전의 궁정 마법사 제안에 잠시라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허허, 황녀님 같은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저로서도 영광이지요.”
대스승님과 황녀는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 그런데 나는 별로 올 필요가 없었던 것 같은데.
멀뚱멀뚱 앉아 있는 내가 지루해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황녀가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그쪽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이름이 뭐죠?”
“라엘이라고 합니다.”
“라엘 군은 아직 어려 보이는데도 여행을 다니는군요.”
“어……. 저는 열아홉 살입니다.”
“네? 열아홉이요?”
역시나 생각보다 내 나이가 많다는 사실에 당황한 모양이다.
며칠 전 황녀가 시내에 나타났던 것으로 떠들썩할 때 들은 대로라면 그녀는 스무 살이다.
겨우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어려 보이니 뭐니 했으니 자신도 떨떠름하겠지.
“으음, 그렇군요. 두 분은 언제부터 함께 여행을 다니신 건가요?”
“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하려면 나의 정체, 그리고 타이런 제국에 들어온 이유까지 말해주어야 했기에 일부만 말해주었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런데 사손 지간이 여행 중이신데 키린토 님의 제자이자 라엘의 스승은 함께 다니지 않나요?”
보통 스승과 제자가 함께 다니지 사손 지간이 함께 다니는 것은 드문 일이니까.
그녀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스승님은 바쁘셔서요.”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었는지 그녀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음식이 준비되었는지 주방에서 주인아주머니가 음식을 내왔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나와 스승님의 여행 이야기, 그리고 황녀의 황궁 생활이 주된 이야기였다.
황녀는 특히 황궁에서 자신을 살피는 유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마음씨가 착하지만 걱정이 많아서 언제나 안절부절못한다느니 뭐니…….
그녀의 이야기는 대부분 유모와 시녀들과 있었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그 외의 이야기를 할 만한 게 없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식사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황녀가 말했다.
“간만에 정말 즐거웠어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황녀님.”
“허허, 이 늙은이에게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나와 대스승님의 대답에 황녀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도 또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보게 되겠지요.”
대스승님의 말에 황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대스승님이라면 다시 보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럼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늦으면 오라버니께서 화내실 거예요.”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운 게 역력한 표정으로 말하는 황녀에게 우리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녀와 근위기사들이 식당을 나서고 난 후,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식당을 나와 여관으로 돌아가는 중에 내가 말했다.
“황녀의 신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친절한 사람이었네요.”
내 말에 대스승님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즉위하자마자 전쟁을 일으킨 황제와 혈육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구나.”
황족이라면 뭔가 대하기 어렵고 거만할 거란 생각이 있었는데.
대스승님은 물론이고 나에게조차 예의를 차리고 말하는 그녀에게선 높은 사람의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였다.
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적국의 황녀라는 것이 정말 아쉬울 정도였다.
만약 우리나라에 저런 왕족이 있었다면, 또 대중 앞에 자유롭게 나설 수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을 거다.
왕국의 마탑에 소속된 일개 마법사인 나와 적대 제국의 황녀인 그녀.
아마 앞으로 만날 일은 없겠지.
그럼에도 그녀와는 다시 만날 것 같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 *
황녀와 식사를 한 날로부터 또 사흘이 지났다.
아직까지도 스승님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스승님에게서 연락이 늦네요.”
혹시나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내가 걱정하며 말하자 대스승님이 대답했다.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금방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좀 더 기다려야 할 게다.”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한 대스승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제국을 상대로 해야 하는 일이니 금방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겠지.
“그것보다 오늘은 스테이크나 먹으러 가자꾸나. 지난번에 하이넨에 왔을 때 괜찮았던 식당이 있다.”
대체 대스승님은 얼마나 되는 식당을 알고 있는 걸까.
대마법사라기보다는 그냥 식도락을 좋아하는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