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화 - 하이넨으로
칼라마쉬의 서를 찾아 적색 마탑을 떠난 지 한 달하고도 보름째.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휴우.”
내가 쪼그려 앉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자 곁에서 걷고 있던 대스승님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젊은 놈이 무슨 한숨이 그렇게 많느냐?”
“그렇지만 아무리 찾아도 칼라마쉬의 서는 보이지 않잖아요.”
“너무 조급해하지 말거라.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 터이니. 정 안 되면 놈들이 알아서 나오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는 대스승님께 나는 눈을 가볍게 찌푸렸다.
“놈들이 나올 때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계의 문을 열 때가 아닐까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너무나도 태평한 대스승님의 대꾸에 순간 황당했으나 워낙 괴짜이신 분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다니기만 하는 것에 지친 내가 가만히 앉아 있자니 대스승님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러면 잠시 딴짓을 해보는 것은 어떠냐?”
“딴짓이요?”
“그래, 상행을 떠나는 상단을 따라다닌다든가. 그것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일이니 칼라마쉬의 서를 찾는 것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냐.”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원해서 그런 것 같은데.
뭐, 어차피 그냥 돌아다니는 것보다 상단 호위가 덜 지루하겠지.
게다가 여비까지 아끼고 길 안내까지 받을 수 있으니 대스승님 말대로 일석이조고 말이야.
적색 마탑에서 출발할 때 스승님께 여비는 넉넉히 받았었으나 대스승님을 만난 이후 조금은 쪼들리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었다.
“음, 그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클클, 그렇지? 기왕 말 나온 김에 당장 알아보러 가자꾸나. 마침 이 근방에 도시가 있으니 자리를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두 마법사를 거절할 상단은 없을 것이다.
대스승님의 말대로 이 근방에는 타이런 제국의 도시 중 하나인 카모니 시가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카모니 시에 도착한 우리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곧장 상인조합으로 향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마법사로 보이는 우리가 들어서자 조합원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우린 떠돌이 마법사네. 기왕 돌아다니는 김에 여비도 아끼고 편하게 다닐까 하는데……. 멀리 가는 상단이 있는가?”
대스승님의 말에 조합원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없는 자리도 만들어 드려야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조합원이 조합 소속 상인들의 행선지가 적힌 서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장거리 상행은 베디쉬 항구로 가는 것과 수도인 하이넨으로 가는 것이 있군요. 어느 쪽으로 소개시켜 드릴까요.”
음, 아무래도 항구 도시로 가는 것보다는 수도로 가는 것이 칼라마쉬의 서에 대한 단서를 얻기 쉽겠지.
“하이넨으로 가는 걸로 하지.”
대스승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렇게 말했다.
“하이넨으로 가는 상단이라면 눈물꽃 여관으로 가서 데오르간 씨를 찾으시면 됩니다. 참고로 눈물꽃 여관은 여기서 나가서 왼쪽 길로 쭉 가시다 보면 있습니다.”
여관의 위치까지 알려주는 친절함에 대스승님이 허허 웃었다.
“고맙네, 젊은이.”
상인조합원에게 감사를 표하곤 우린 곧장 눈물꽃 여관이란 곳을 찾아 나섰다.
조합원의 말대로 상인조합을 나와 왼쪽 큰길로 쭉 가다 보니 눈물꽃 여관이 나왔다.
여관에 들어서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하이넨으로 가는 상단의 데오르간 씨가 여기 묵고 계신가요?”
“파멀 상단의 데오르간 씨라면 203호에 묵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여관 주인에게 인사를 하곤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203호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방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누군가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콧수염을 보기 좋게 기른,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하이넨으로 가는 파멀 상단의 데오르간 씨인가요?”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자신을 찾는 우리의 모습에 데오르간 씨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저희는 떠돌이 마법사인데 데오르간 씨의 상단이 하이넨으로 가신다고 들어서요. 같이 동행할 수 있을까요.”
나의 대답에 잠시 생각하던 데오르간 씨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추가 용병을 고용할 필요도 없고 여유 자금도 없습니다만…….”
“보수는 따로 필요 없네. 길 안내와 숙식 정도만 제공해 주면 되네.”
내 뒤에 서 있던 대스승님의 말에 데오르간 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다면야 환영입니다. 그 전에 실례지만 서클이 어떻게 되시는지?”
“저는 4서클이고 이분은 6서클이십니다.”
사실대로 8서클이라고 말하면 여러모로 귀찮아지기에 대스승님은 6서클인 척하기로 미리 말을 맞춰놓았다.
자신의 서클을 숨겨야 한다는 말에 기분이 상했던 대스승님이었으나 귀찮은 일이 잔뜩 생길 거라는 내 말에 그러자고 하셨다.
그래도 자기 입으로 거짓말하기는 싫어하셨기에 내가 대신해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6서클이요?!”
6서클이라는 말에 데오르간 씨의 얼굴에 잠깐 놀라움이 떠올랐다.
4서클이야 그렇다 쳐도 6서클이라면 어디서든 데려가려고 안달일 텐데 고작 떠돌이 마법사라니.
6서클도 그렇지만 4서클도 낮은 서클은 아니다.
“증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지.”
데오르간 씨의 말에 대스승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태프를 들어 보였다.
순식간에 대스승님의 스태프 끝에 이루어지는 여섯 개의 마나 고리.
그것을 보고서 확실히 6서클이라는 것을 확인한 데오르간 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의 마법사가 보수도 없이 함께 동행해 준다는데 싫어할 리가 없다.
“문제는 없겠죠?”
내 물음에 그는 희색이 완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문제가 있을 리가요! 숙식에 관한 건 제가 잘 준비해 두겠습니다.”
흠, 여행이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다.
확실히 대스승님의 말대로 상단과 동행하기로 한 것은 좋은 생각일지도.
“좋아요. 그럼 언제 출발하나요?”
“내일 아침 7시쯤에 북문 앞으로 오십시오. 늦으면 곤란하니 일찍 오셔야 합니다.”
신신당부하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대스승님과 함께 근처의 다른 여관에 방을 구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카모니 시의 북문으로 나가니 여러 대의 마차가 늘어서 있고 그 주변을 이십여 명의 용병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꽤나 규모가 있는 상행이었다.
“아, 오셨군요!”
동료 상인들과 함께 짐을 살피고 있던 데오르간 씨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맞이해 줬다.
“이제 곧 출발하나요?”
“네. 시간 딱 맞춰서 오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마차들 중 맨 뒤의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저 마차에 자리가 있으니 타고 가시면 됩니다.”
그가 말한 지붕이 달린 짐마차에는 짐이 반 정도 실려 있고 남은 자리에는 짚이 깔려 있었다.
아무래도 6서클의 노마법사를 위해 짚까지 깔며 자리를 준비한 듯하다.
애초에 짐마차다 보니 그렇게까지 좋은 자리는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준비한 정성이 보였다.
“허허, 고맙네.”
대스승님과 나는 데오르간 씨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자, 이제 갑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을 알리는 데오르간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컹이는 마차에 앉아 나는 칼라마쉬의 서 감지기를 꺼내 들었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바늘이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다.
대체 언제쯤 칼라마쉬의 서를 찾을 수 있으려나.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찾아주면 좋겠는데.
그보다 칼라마쉬의 서를 가져간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마계의 문을 여는 책을 가져가선 대체 뭘 할 생각이지?
<뻔하지 않느냐.>
‘응?’
나의 고민에 카이서스가 간만에 입을 열었다.
‘뻔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크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마련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카이서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멍청하긴, 그야 당연히 자신들은 다를 거라는 믿음으로 마계의 문을 열고자 하는 거지.>
‘다를 거라는 믿음?’
<남들은 몰라도 자신들은 마계의 존재들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지. 누구보다 멍청한 믿음이지만 말이야.>
‘한마디로 그걸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라 이거군.’
<그것 외엔 칼라마쉬의 서가 어디 쓸 데가 있겠느냐?>
‘으음……. 무기로 쓴다니, 그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어떻게 되긴, 당연히 마계와의 전쟁이지.>
마계와의 전쟁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천 년 전에도 일어났던 전쟁이 또 일어난다면……. 무척이나 귀찮아질 거다.>
카이서스는 고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고대에도 칼라마쉬의 서가 있었던 거야?’
<정확히는 그때 만들어진 거지.>
‘고대에 있었던 마계와의 전쟁은 어땠어?’
내 물음에 카이서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끔찍했지.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지. 젊었던 나 역시도 참전했었는데, 나의 동족마저도 자연으로 돌아갔던 참혹한 전쟁이었다.>
‘드래곤이 참전했었어?’
<물론이지, 드래곤은 이 세계를 지는 존재이니까.>
‘그런 드래곤이 죽기 싫다고 내 몸을 빼앗으려 했었지.’
내가 투덜거리며 한 생각에 카이서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드래곤은 외부에서 이 세계를 지킬 뿐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는 게냐?”
카이서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대스승님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연히 머릿속의 드래곤과 이야기 중이라는 건 말할 수 없지.
“아, 칼라마쉬의 서를 가져간 자들의 꿍꿍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마계의 문이 열리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도요.”
내 말에 대스승님은 풍성하게 자란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나겠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래서 이렇게 칼라마쉬의 서를 되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죠.”
하지만 찾지 못한다면……. 훔쳐 간 이들이 칼라마쉬의 서를 해독해서 마계의 문을 열게 된다면…….
“벌써부터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모든 것은 순리대로, 어떻게든 되겠지.”
태평하게 그렇게 말한 대스승님은 바닥에 깔린 짚을 몇 번 두드리더니 그대로 드러누웠다.
“난 낮잠이나 자련다. 너도 쓸데없는 걱정은 관두고 쉬기나 하려무나.”
그 말대로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바뀌는 일은 없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대스승님처럼 바닥에 드러누웠다.
푹신하게 깔린 짚 덕분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누운 채로 마차 뒤로 보이는 풍경을 쳐다보았다.
* * *
하이넨으로 가는 일주일 동안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거의 다 와갑니다! 다들 조금만 더 수고해 주십시오!”
“오우!”
선두의 짐마차를 몰고 있던 데오르간 씨의 외침에 마차들을 호위하던 용병들이 환호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잔금을 받고 술을 마시거나, 여자를 살 생각에 들뜬 것이다.
소란스러워진 밖의 상황에 나도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백색의 성벽.
제국의 위세를 드러내 보이기라도 하듯 성벽마저도 높고 화려하다.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타이런 제국의 심장부가 눈에 들어왔다.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사방에 가득하고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하나같이 처음 보는 것들이다.
내 고향 라제스나 크라우드 왕국의 수도 트럼벨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마차가 커다란 창고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함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데오르간 씨가 나와 대스승님이 탄 마차로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허허, 우리가 고맙지. 하는 일도 없이 밥만 축내고 편하게 왔으니 말일세.”
물론 짐승이나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면 나나 대스승님이 엄청난 활약을 했겠지만.
“하하, 함께해 주신 것만으로도 든든했습니다.”
6서클 이상 마법사의 존재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기 그지없다.
데오르간 씨, 그리고 일주일간 함께 지내며 친해진 몇몇 용병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는 시내로 들어섰다.
그 순간, 품 안에서 무언가 진동이 느껴졌다.
의아해하며 진동의 근원을 찾은 순간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칼라마쉬의 서 감지기가 잘게 떨리며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