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 적색 마탑
나는 적색 마탑주라는 누나의 뒤를 따라 마탑의 상층으로 올라갔다.
첨탑의 꼭대기에는 마탑주실이라는 팻말이 적힌 문이 하나 있었다.
첨탑 꼭대기면 꽤나 방이 좁을 텐데, 이런 곳을 마탑주가 쓴다고?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모양인지 그녀가 웃으며 문을 열었다.
“들어오너라.”
그녀가 문을 열어젖힌 내부의 광경은 내 눈을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좁은 첨탑 꼭대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방이 펼쳐져 있었다.
“어, 어어?!”
놀란 내 모습에 마탑주 누나가 웃으며 말했다.
“마탑에 공간 확장 마법은 기본이 아니더냐?”
<크크, 멍청한 녀석.>
카이서스의 비웃음은 무시하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첨탑의 좁은 꼭대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부가 넓었다.
“그런데 누……. 아니, 마탑주님. 어째서 신분을 숨기신 거예요?”
적색 마탑주라는 것을 밝혔더라면 수월하게 들어올 수 있었을 텐데.
“아, 내 소개를 하지 않았었니? 나는 카밀라 루드비히, 적색 마탑주란다.”
너무나 뒤늦은 자기소개에 내가 눈을 살짝 찡그리자 그녀는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라엘……. 그냥 라엘이에요.”
내가 이름을 밝히자 그녀는 넓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의자에 앉으며 지금껏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마탑주님은 어째서 저에게 적색 마탑에 오라고 하신 거예요?”
내 말에 그녀는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지난번에는 뭘 좀 생각하느라 잠시 여행을 떠났을 때란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마나의 파동이 격렬하게 느껴져서 그 근원지를 찾다가……. 그러다가 널 만난 거란다.”
마나의 파동이라면 내가 마나 수련을 할 때의 그것을 말하는 건가.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만나고 보니 이제 고작 1서클이라는 것에 놀랐지. 게다가 재능도 있어 보이고……. 마나도 우리 적색 마탑에 어울리게 화염의 기운을 띠고 있지 않겠니?”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내 마나의 속성을 알아챈 모양이다.
“그래서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뭐가 그래서냐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내 취미가 쓸 만한 인재를 모으는 거라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 마탑으로 오라고 한 거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작 1서클인데 그런 마나의 요동침이라니…….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아주 높아. 우리 마탑에 들어오지 않겠느냐?”
나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 지금은 2서클이에요.”
가슴을 훑듯이 매만지는 그녀의 손길에 당황하며 대답했다.
“후후, 알고 있단다. 2개의 고리가 느껴지는구나.”
내 가슴에 손을 얹었던 것은 성취를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재능에 비해 서클이 낮은 걸 보니 뒤늦게 마법을 익힌 모양이지?”
“네. 세 달 정도 되었어요.”
세 달이라는 말에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 달 만에 2서클이라고? 대단하구나. 스승도 없다고 했었으니……. 독학으로 익힌 것이냐?”
“어……. 네. 책을 보고 배웠어요.”
사실은 머릿속의 드래곤에게 배운 것이지만.
“놀랍구나. 더욱 흥미가 생겨……. 너, 내 제자가 되겠느냐?”
적색 마탑주의 수제자.
쉽게 높은 서클이 될 수도 있을 테지만 또 한 가지 이점이 있다.
바로 유명해질 수 있다는 것.
적색 마탑주의 수제자가 된다면 마법사들 사이에서 금방 유명해질 것이다.
마법사인 아버지도 그 소식을 들을지 모르지.
<크크, 보는 눈은 있는 여자로군.>
나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네! 제자로 받아주세요!”
“좋다. 너는 이 순간부로 적색 마탑의 주인, 카밀라 루드비히의 제자가 되었느니라.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보거라.”
나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법을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적색 마탑이라는 강력한 집단 주인의 제자가 되다니.
“저……. 그런데 스승님은 꽤 젊어 보이시는데 어떻게 적색 마탑의 주인이 되신 거죠?”
내가 지금껏 궁금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마탑의 주인이라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서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마탑주라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 물음에 그녀는 그것이 궁금했냐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내 나이가 올해로 일흔하나이니라. 마법의 경지가 높은 덕에 젊어 보이는 것뿐이지.”
…할머니였어?!
당황한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다는 듯 카밀라 님이 웃어 보였다.
“왜, 내가 할머니라 당황했느냐?”
“그, 그게…….”
내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괜찮단다. 익숙하니까. 다른 건 궁금한 것이 없느냐?”
“있어요! 제가 마탑의 울타리 앞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으셨다는 듯 나오신 건 어떻게 한 건가요?”
만약 그녀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마탑으로 들어오는 데 고생하거나, 아예 쫓겨났겠지.
내 물음에 그녀는 씨익 웃어 보였다.
“이 주변으로 들어서는 모든 이들은 내 시선을 피할 수 없단다.”
이 일대를 모두 감시할 수 있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물론이고 카이서스도 놀랐다.
<흐음, 이 일대에 누가 들어오면 곧장 알 수 있는 알람 마법을 설치해 둔 건가? 꽤나 귀찮을 텐데……. 아마 습격 따위를 대비한 모양이군.>
카이서스가 속으로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주문을 외우더니 메시지 마법으로 보이는 것을 사용했다.
“칸델? 내 방으로 잠시 오도록 하게.”
잠시 후 메시지 마법을 받은 상대인 칸델이라는 남자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응? 이 소년은 누굽니까?”
“어른입니다!”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칸델 씨의 말을 수정해 주었다.
<진짜 어른은 그런 말은 안 한다. 오히려 어리게 볼수록 좋아하지, 크크.>
머릿속에서 카이서스가 나를 비웃었다.
“그렇겠지. 아무튼 누굽니까?”
내 말을 무시하는 듯한 칸델 씨의 말에 스승님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제자로 삼기로 한 아이네. 탑 이곳저곳을 보여주게.”
“또 제자를 얻으셨군요.”
칸델 씨의 대답에서 내가 유일한 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또, 라는 건 저 말고도 다른 제자가 있으신 건가요?”
뭔가 심각한 분위기의 대답에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나에게 칸델 씨가 말했다.
“그래, 네 위로 한 명의 사형이 있었단다.”
있다가 아니라 있었다고? 뭔가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는 칸델 씨의 모습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일단 날 따라오게. 마탑을 안내해 주지.”
“네.”
칸델 씨의 뒤를 따라 스승님이 거주하는 첨탑을 내려가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5층짜리 첨탑은 모두 적색 마탑의 주인인 스승님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그 주변을 둘러싼 열 개의 건물이 바로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이 거주하고 연구하는 곳이었다.
첨탑과 열 개의 부속 건물 전체가 바로 적색 마탑이었다.
여러 건물 중에서 식당과 도서관의 위치까지 알려준 칸델 씨가 나를 첨탑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로 데려갔다.
“자, 여기가 자네가 쓸 방이네.”
2층짜리 건물의 1층 끝에 있는 방으로 안내한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곧 있으면 저녁 식사 시간이니 짐을 풀고 식당으로 오게. 저녁 식사 때는 상주 중인 인원들 대부분이 모이니 아마 그때 마탑주님이 자네를 소개하실 거야.”
“네, 알겠습니다.”
칸델 씨가 돌아가자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 안에는 침대와 책상, 의자와 옷장 정도만이 놓여 있을 뿐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방 안에 풀고는 칸델 씨가 말한 대로 식당으로 향했다.
조금 일찍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마법사들이 식당에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는 의아해했다.
“저 아이는 누구지?”
“새로 온 신입인가?”
다들 의아해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직접 나에게 다가와 묻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길게 늘어선 테이블 중에서 끄트머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식사 시간이 되자 식당에는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로 가득 찼다.
젊은 사람부터 중년, 노년의 할아버지까지.
백여 명의 마법사들은 나이와 성별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다들 자리에 앉아 식사를 기다릴 때 느지막이 스승님이 들어섰다.
마탑주의 입장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테이블의 가장 안쪽 상석에 앉은 스승님이 모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소개시켜 줄 아이가 있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나에게 눈짓했다.
무척 긴 테이블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시선이 확실히 느껴졌다.
어쩐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아서 조심스레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많은 시선에 당황할 법도 한데도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아마도 드래곤 하트로 인해 정신력도 강해졌기 때문이겠지.
그런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어 보인 스승님이 입을 열었다.
“내가 새로 제자로 맞이한 라엘이라는 아일세. 얼마 전의 여행 중에 길을 가다가 재능이 뛰어나 보이기에 우리 마탑으로 올 것을 제의했지.”
그녀의 말에 다들 나의 재능을 살펴보기라도 하듯 훑어보았다.
수십 명의 시선이 날카롭게 나를 훑는 것이 당황스럽지는 않았으나 기분이 조금 나빴다.
“게다가 마법을 익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2서클에 도달했다더군.”
“호오.”
그녀의 말에 다들 흥미로워하는 소리를 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자, 그럼 저 아이를 내 제자로 삼는 것에 불만을 지닌 자 있는가?”
스승님의 말에 반대 의견을 표출하는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 라엘, 앞으로 나오너라.”
스승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하자 칸델 씨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
내가 앞으로 나가자 스승님이 칸델 씨의 손에서 받아 든 것을 나에게 건넸다.
그것은 적색 마탑의 타오르는 불꽃이 새겨진 붉은색 로브였다.
“자, 너는 이것을 받아 걸쳐라. 이것은 우리 마탑의 일원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징표니라.”
그녀의 손에서 로브를 받아 든 나는 원래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원래 걸치고 있던 로브는 이런저런 마법이 걸린 좋은 것이었지만 지금 받은 것도 꽤 좋은 것이었다.
“열기에서 몸을 보호하고 실드 마법이 내장되어 있다네.”
화염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적색 마탑의 마법사에게 어울리는 로브다.
칸델 씨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새로 받은 로브를 걸쳐보았다.
몸에 맞추기라도 한 듯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스승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로 돌아가라는 듯 손짓했다.
“그럼 오늘의 전달 사항은 끝이니 다들 식사하시게.”
그녀의 말에 마탑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테이블로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구운 소고기와 야채, 그리고 빵과 수프.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탑답게 식사도 괜찮았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는 다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때였다.
“쳇! 누구는 몇 년을 마탑에서 지냈어도 수습생인데, 누구는 들어오자마자 마탑주님의 제자라니.”
“불공평한 일이야.”
식당이 있는 건물을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나 들으라는 듯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세 명의 젊은 마법사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가 황급히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불만이 있으면 당당하게 이야기할 것이지 숨어서 투덜대는 꼴이라니.
하아, 아무래도 순탄치만은 않겠어.
어쩐지 앞으로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