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 붉은 머리의 여자.
카이서스의 드래곤 하트를 흡수한 이후 머리도 좋아진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정확히 생각난 것이다.
“드디어……. 집인가.”
저 멀리 보이는 도시를 보며 감회에 잠겨 있자 카이서스가 툴툴거렸다.
<널 쫓아낸 가족이 뭐가 좋다고 돌아가려는 거냐?>
“미우나 고우나 가족이니까. 게다가 나를 쫓아낸 건 아버지와 형제들이지, 어머니와 누나는 나를 아껴주셨거든.”
솔직히 어머니와 누나가 없다면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능력만을 중시하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아무런 재능도 능력도 없는 나를 무시하고 차별했다.
게다가 형제들도 아버지를 닮아 대놓고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기 일쑤였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내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을 나오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이젠 상황이 달라졌단 말씀, 재능도 생기고 마법도 익혔으니 더 이상 나를 무시하지는 못할 거야.”
<고작 1서클 가지고?>
“네 말대로 재능이 많아졌다면 금방 서클이 높아지겠지. 게다가 가르치는 사람이 바로 드래곤이잖아.”
은근슬쩍 추켜세워 주는 나의 말이 기분 좋았는지 카이서스가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렇고말고! 아무리 네가 멍청한 인간이라도 드래곤인 내가 직접 가르칠 테니 인간계 최강의 마법사도 금방이지!>
아니, 그건 좀 기대가 너무 커서 부담스러운데.
아무튼 최강의 마법사라니 두근거리는 건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1서클인 채로 돌아가면 무시받을 텐데, 근처에서 수련을 하다가 돌아가는 건 어떠냐?>
카이서스의 말이 일리가 있는지라 나는 고민에 잠겼다.
아버지의 성격상 1서클은 마법사 취급도 안 해줄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2서클까지는 올리고 가야지 사람 취급을 받겠지.
“좋아. 그럼 근처에서 수련을 좀 하다가 가도록 하자.”
<크크, 그러든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 라제스로 향했다.
라제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여관부터 찾았다.
[잠자는 양]이라는, 작지만 깔끔해 보이는 여관이었다.
“어서 오세요!”
“방 하나 주세요.”
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어 종업원에게 건네주었다.
“네, 2층 맨 오른쪽 방입니다, 마법사님.”
여관 종업원이 벽에서 열쇠 하나를 가져다 나에게 건넸다.
마법사님이라……. 로브와 스태프를 들고 있기에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실제로 마법사가 되었기는 하지만 이렇게 대접을 받으니 기분이 좋다.
나는 웃으며 여관 2층의 방으로 올라가 짐을 풀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으, 좋다.”
밖에서 딱딱한 맨바닥에 누워 자다가 이렇게 지붕 아래에서 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기분이 좋았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냐. 빈둥대지 말고 마나 수련이나 해라.>
끄응, 이제 막 도착해서 조금 쉬려고 했는데.
“가르쳐 주기 싫다던 때는 언제고 왜 이렇게 성화야?”
<크크, 네가 빨리 강해져야 내가 쓸 몸을 구하기도 쉽지 않겠느냐.>
한마디로 자기 욕심 때문이란 거군.
하지만 나도 하루빨리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몸을 일으켰다.
침대 위에 앉아서 정신을 집중했다.
주변에 떠도는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하자 주변의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어, 이상하다? 보통 마법사들의 수련은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공기가 요동치지는 않던데.
내가 당황한 것을 눈치챘는지 카이서스가 말했다.
<당황하지 마라. 내 심장으로 변화한 신체는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다르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마나를 흡수하는 데 정신을 집중하느라 나는 대답도 못 했다.
다행히도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알아챈 카이서스가 계속해서 설명했다.
<나의 심장을 지닌 네가 다른 인간들보다 더 격렬하게 마나를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렇게 말하고 잠시 침묵하던 카이서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수련은 조용한 곳에서 하는 게 좋겠다. 이러다간 괜히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군.>
그의 말에 나는 마나를 전신으로 한 바퀴만 돌리고는 수련을 멈췄다.
그러자 그제야 공기가 요동치던 것이 잦아들었다.
후우, 이 근방에 마나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마나의 요동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
…그럼 뭐 어때?
몸 안의 마나를 한 바퀴만 돌렸을 뿐인데도 벌써 창밖에서는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허기를 느끼며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녁 시간인 터라 여관 1층에는 식사와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 먹을 것 좀 주세요.”
“뭘로 드릴까요?”
“음……. 추천 메뉴로 알아서 가져다줘요.”
“네,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주방으로 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앉아서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중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저 누나는 누군데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지?’
속으로 의아해하자 카이서스가 대답했다.
<왜? 마음에 들기라도 하느냐?>
‘에엑! 설마 이 녀석 방금 내 생각을 읽은 거야?’
내 생각에 카이서스가 분노한 듯 말했다.
<이 녀석이라니! 위대한 존재인 이 몸에게 감히!>
‘정말이냐?! 아니, 그보다 어떻게 내 생각을 읽은 거야?!’
<크크크, 나는 너의 의식 속에 존재하니 강렬한 생각 정도는 읽을 수 있다.>
‘뭐야, 그거. 무서워……. 내 사생활은 어쩌라는 거야?’
<알 게 뭐냐. 그보다 저 여자, 네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만?>
확실히 카이서스의 말대로 나와 눈이 마주쳤던 누나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삼십 대 초반 정도일까.
마법사인 듯 붉은 로브를 걸치고 있기에 몸매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외모였다.
“이봐, 꼬마야.”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다지 예쁘지 않았다.
시비라도 거는 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꼬마 아닌데요?”
분명히 내 키가 또래에 비하면 작은 편이긴 하지만 꼬마는 아니라고!
‘젠장, 신체를 변화시켜 줄 거면 키도 크게 만들어줬으면 좋았잖아!’
<크크, 드래곤은 인간의 외형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카이서스 때문에 더 기분이 상했다.
로브처럼 새빨간 머리칼의 여자는 내 대답에 피식 웃더니 물었다.
“몇 살이지?”
“열아홉이요.”
“너, 마법사니?”
“이제 고작 1서클이긴 하지만……. 그런데요?”
그녀의 말에서는 뭔가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서 존댓말이 절로 나왔다.
“흠, 1서클이라…….”
“그건 왜요.”
무시하는 듯한 그녀의 말에 약간 기분이 상한 내가 따지듯이 되묻자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분이 상했던 것도 금방 잊어버릴 만큼 뇌쇄적인 미소였다.
“조금 전에 마나의 요동이 느껴져서 말이야. 혹시나 너 때문인가 해서.”
역시나 마나의 요동을 느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무, 문제 될 거라도 있나요?”
내가 조금은 당황하여 묻자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란다. 1서클짜리 꼬맹이가 그런 마나의 요동이라…….”
흥미롭다는 듯 혼자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나는 발끈했다.
“꼬맹이 아니라니까요!”
내가 또래보다 키도 작고 앳된 얼굴이긴 해도 어엿한 19살, 성인이라고!
내가 발끈하여 소리친 말에 그녀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하지만 어딜 봐도 꼬맹이인걸?”
<음, 맞는 말이로군.>
그 말에 나는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왜 갑자기 시비죠?”
내가 화를 내자 그녀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내가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버릇이 있어서.”
“실례라구요!”
일단은 사과를 했으니 넘어가 주기로 했다.
결코 예뻐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마나의 파동을 느꼈다면 그녀도 마법사일 터, 나보다 강할 것 같아서이다!
<당당하게 말하지 마, 멍청아.>
내 생각을 읽은 카이서스가 딴죽을 걸었으나 무시했다.
“아무튼, 꽤나 재능이 있어 보이는 초보 마법사를 발견한 것이 반가워서 말을 걸었단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구나.”
재차 사과를 하는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았다.
지금껏 재능 없다는 소리만 들어온 나에게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말은 기분 좋은 칭찬이었으니까.
“흠흠, 뭐 그렇게까지 사과하신다면 넘어가 드리죠.”
애써 의젓한 척을 하는 내가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에 내가 재차 눈을 찡그렸다.
“뭐가 우습죠?”
“귀여워서.”
그 말에 내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화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서 그런 거다.
나도 이제 성인인데, 귀엽다고?!
무척이나 예쁜 누나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귀엽다는 말보다는 멋지다든가 남자답다는 말이 더 좋거든요?”
“하지만 귀여운 걸 어쩌니.”
“으으…….”
<크크크, 재미있는 여자로군.>
‘시끄러.’
웃음을 터뜨리며 이 상황을 즐기는 카이서스에게 한마디 하고는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볼일은 그게 다인가요?”
“아, 그렇지. 혹시 너, 스승은 있니?”
“스승이요? 없는데요.”
<이놈이? 이 위대한 존재에게서 마법을 배우면서 스승이 없다니!>
‘그렇지만 너는 필요에 의해서 가르쳐 주는 거지 스승이라기엔 좀……. 게다가 가르쳐 주는 게 너무 어렵다고.’
<내가 어렵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르침이 너무 고차원적이라 멍청한 네 녀석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가르치는 자질이 없는 거겠지!’
속에서 카이서스와 말다툼을 하는 틈에 붉은 머리의 여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혹시 마탑에 들어갈 생각은 없니? 다른 마법사들과 교류하고 가르침을 받으면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텐데.”
“마탑이요?”
학문과 마법 발전을 위해 마법사들이 모여서 세운 탑.
분명 마탑에 들어간다면 나도 빠르게 강해질 수 있겠지만…….
대륙에 10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탑에 들어가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오죽하면 마탑에 들어가려고 평생을 수련하는 마법사도 있을 정도니까.
“마탑의 수습생으로 들어가서 가르침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수습생이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를 받아줄 마탑이 있을까요?”
위에 말했다시피 마탑에 들어가려고 평생 수련하는 마법사도 있는데.
고작 1서클인 나를 받아줄 곳이 있을까?
내 말에 그녀는 말 잘했다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생각이 있다면 적색 마탑으로 와서 나를 찾으려무나.”
적색 마탑이라고?!
적색 마탑이라면 대륙에서 10개밖에 없는 마탑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마탑이었다.
설마하니 이 누나, 적색 마탑의 소속이었어?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나를 보며 가볍게 웃어 보인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서 여관을 나가 버렸다.
<발정했느냐? 얼굴에 피가 몰렸다만?>
‘그딴 거 일일이 설명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건 발정이 아니라 반한 거라고 하는 거야!’
<크크크, 그렇겠지.>
새빨갛게 변했을 얼굴을 손으로 매만지며 나는 생각했다.
혹시 적색 마탑으로 들어간다면 저 누나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나 저 누나의 이름도 모르잖아.
뭐라고 말해서 찾아야 하지?!
* * *
우선 적색 마탑은 다음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카이서스가 있으니 급한 것도 아니니까.
급한 것은 마법을 수련할 적당할 장소를 찾는 것이었다.
“언젠간 집에 들어가야 하니 라제스를 벗어나긴 싫고……. 어디에 집을 구하지?”
집을 구할 돈은 카이서스의 둥지에서 가져온 재물이 있으니 걱정이 없었다.
<조용하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구하는 것이 낫겠지.>
카이서스의 조언에 따라 나는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집을 찾아 나섰다.
도시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
나무꾼이 살던 곳이었다는데 이사를 가면서 내놓았다고 했다.
집을 떠나면서 어머니께 받은 돈이 꽤 남아 있었기에 카이서스의 보물을 팔지 않고도 집을 살 수 있었다.
“윽, 먼지 좀 봐.”
꽤나 오래 비어 있었는지 집 안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다행히 부서진 곳은 없어 보였으니 다행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쓸고 닦으며 새집을 청소했다.
“후, 이만하면 괜찮겠지?”
<아직도 더러운 것 같다만?>
카이서스의 시선으로는 성에 차지 않게 누추해 보이는 모양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괜찮았다.
“내가 괜찮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러든가. 그보다, 이제 청소를 끝냈으니 수련을 시작해라.>
“뭐? 하루 종일 청소하느라 피곤한데 좀 쉬면 안 될까?”
내 말에 카이서스가 버럭 소리쳤다.
<그렇게 느긋해서야 어느 세월에 강해져서 내가 쓸 몸을 구할 수 있겠냐! 어서 수련이나 해!>
크으, 소리 좀 치지 말라고.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라 안 들을 수도 없는데 머리가 울린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다고. 하면 될 거 아냐.”
나는 투덜거리며 막 청소한 바닥에 앉아 마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요동치며 마나가 내 몸을 향해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