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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단지 쥬지육림을 꾸릴 뿐이다-16화 (16/151)

〈 16화 〉 16화 암시장

* * *

기분 탓일까, 평상시에도 다니면서 길었다고 느낀 길이, 오늘은 안개가 끼어 유난히 길다고 생각됐다,

하지만 자신의 느낌이 묘하다고 해서 약속 장소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한스는 무작정 걸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길을 걷는 행인, 하다 못해 순찰 중인 경비 한 명 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 였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봤을 터인데, 요상해도 너무 요상했다,

그리고 도무지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느낌도 들지 않아, 한스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지각 확정인가…”

이러다가 해가 지기라도 한다면 기다리다 지친, 마중인도 돌아갈테고, 마리우스의 명령도 이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급해진 한스는 조금 더 빨리 걸었다, 그런 그의 눈이 안개의 너머에서 점멸하고 있는 불빛을 포착했다.

“갑자기 왠 것이…”

아무런 전조도, 소리도 소문도 없이 나타난 불빛이 꽤나, 아니 상당히 수상쩍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도,

그것이 자신을 인도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은 한스는, 이 괴상하기 짝이 없는 안개와 구불구불한 골목길에서 빠져 나가려면 저것을 이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런…”

분명 점심 식사를 든든하게 한 그였지만, 이 괴상한 곳을 헤매기 시작한 순간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그 덕에 다시금 허기라는 괴물이 한스를 찾아왔다, 분명 허기를 줄이기 위해 간편식을 준비하리라고 마음 먹었던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거늘,

또 다시 이런 사태에 직면하게 되자 한스는 어이가 승천하였다, 그리고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에야 말로 반드시 간편식을 준비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앞에서 떨어질 듯 말 듯 하며 이동중인 빛 무리의 뒤를 계속해서 따랐다, 그러자…

“응?”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한, 무거운 공기만이 전부였던 골목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의 발소리와,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는건가?”

한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불구불한, 긴 골목을 빠져 나오게 되자, 안개도 빛 무리도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어느 새 말끔히 자취를 감췄다.

“꿈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거쳐왔던 골목길을 확인하고자 한스는 눈을 돌렸다, 그러자 정말로 꿈이었는지, 허름한 건물과 그 사이에 있던 골목길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 참.”

묘한 점쟁이 노인에 이어, 도저히 설명이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요상하기 짝이 없는 경험,

곧 약속 장소로 향해야 한다는 최우선 사항을 떠올린 한스는 허겁지겁, 현 장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후우, 늦지 않게 도착한 듯 하군.”

한스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마중인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곁눈질을 했다, 어디를 봐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외에는 보이지 않았기에 그는 설마 자신이 늦은 것은 아닐까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여기가 맞는데…’

장소가 틀린 것이 아닐까 하고 전전긍긍하던 한스의 귀에, 낯선, 마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스 선생님 맞습니까?”

“읏!”

바짝 날이 선 무기와도 같이 곤두선 그의 육감으로도 접근하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하였고,

한스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몇 걸음 움직여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그의 눈에 말쑥하게 차려 입은 한 사내가 멋쩍게 웃으면서, 건물의 그늘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이 비춰졌다.

“실례했습니다, 너무 일찍 나오셨기에 설마 해서…, 하하.”

“그, 그렇습니까.”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 정도로 깜짝 놀랐지만, 한스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찍 나왔다는 말을 들은 그는, 그렇게나 오랜 시간을 허비 했는데, 어째서 이런 말을 듣게 된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혹시나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에 빠져든 한스의 귀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우스 상단장님과 사전에 이야기한대로, 우리 주인님께 향하겠습니다, 길이 좀 복잡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서 따라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한스가 대답을 하기가 무섭게, 마중을 나온 사내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한 순간에 싹 지우고 속보로 이동을 시작했다,

인파 사이를 종횡무진, 마치 제 집의 안방처럼 거침 없이 이동하는 사내를 한스는 정신을 집중하여 쫓았다,

어느 상점 안으로 들어서서 계단을 타고 윗층으로 향했다 싶더니 지붕으로, 그리고 옆 건물로 이동해서 쪽문을 통과했다.

“후우…”

익숙치 않은 복잡한 길에 한스는 약간의 피로감을 느꼈다, 그리고 뭔가의 법칙이 있다고

느껴지도록 이동하는 마중인(이제 와서는 마중을 나왔다기 보다는 자신을 시험하거나 골려 먹기 위해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을 단 한번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따라갔다.

“잘 오셨습니다 한스 선생님.”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어떤 문 앞에서 한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서서히 작은 문을 열면서 그는 절도와 우아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움직임을 취하며 말했다.

“왕국에서 가장 크기로는 이견이 없는 암시장에 어서오십시오.”

물품이 일반적인 시장과는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이 시장이, 무엇이 특별하기에 그런 의식 같은 이동을 해야 했는지 궁금증이 동한 한스가 물었다.

“대체 이 시장에 무엇이 있기에 이렇게 힘들게 빙빙 돌아서 와야 하는 겁니까?”

“혹시, 아무것도 모르는 겁니까 선생님?”

“무얼 말입니까?”

“후후, 아닙니다, 모르는 편이 즐거움이 더 커지니까요, 이쪽입니다.”

마중인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말한 이상, 분명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모순 된 생각이 드는 한스였다.

“최근에, 누가 보더라도 입이 떡하니 벌어질 물건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음, 그렇습니까.”

“선생님처럼 이 시장의 매력을 잘 모르는 분이라도 가치를 알 수 있는 물건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사내의 뒤를 따라가면서 한스는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이 곳을 판단했다고 생각했다, 가격은 일반적인 시장과 비교하면 확실히 비쌌지만,

그것은 가격만을 생각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좀처럼 보기 힘들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무구,

구하기 힘들다고 수문이 난 진귀한 식재료 등등등, 확실히 가치는 있지만 그의 흥미를 끌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안내인의 뒤를 따라갔다.

“여기입니다 선생님.”

안내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한스는 별난 동상과 부적을 파는 노점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한스의 눈 앞에 척 봐도 이 암시장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으리으리한 건물이 비춰졌다.

“주인님께서 선생님을 뵙기 위해 일정을 비워두셨으니, 안내만 해드리고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윽.”

“선생님, 무슨 문제라도 생긴겁니까?”

“아뇨, 별 일 아닙니다.”

“하하, 그렇다면 조금만 더 즐겁지 않은 남정네의 안내를 따라와주십쇼.”

한 순간, 자신의 후두부를 덮친, 날카로운 도구로 후비는 것과 그리 다를바가 없는 고통은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하고 생각하며 한스는 사내의 뒤를 따랐다.

“주인님께서는 이 안에 계십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선생님.”

한스는 열린 문으로 떠밀리다시피 해서 방 안으로 들어서게 됐다, 그리고 안내를 맡았는 사내는 안개처럼 자신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방 안의 풍경은, 한 사람의 것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장식과 실용품으로 가득 차있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시선을 뺏긴 한스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오시게, 마리우스 상단의 한스 총괄님.”

“아, 안녕하십니까, 어…”

“됐네, 마리우스님께서 설명을 하나도 안 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이 자명한 일이지, 그런 일을 굳이 자네에게 따질 생각도 없고,

그런 속 좁은 짓을 할 정도로 그릇이 작지도 않으니 안심하게나.”

덧붙여서 자신에게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면 문제가 일어날리는 없을 것이라고 사내는 말했다,

그 후 남자는 기합 소리를 거하게 내면서 거대한 몸을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방 문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 이동한 뒤, 어리둥절하고 있는 한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상품들이 있는 곳이지, 사람이 물건과 같은 곳에서 지낼 수는 없잖은가.”

한스는 거구의 사내의 뒤를 따라, 웅장하면서도 절로 경외감이 드는 건물의 내부를 가로 질러서 더욱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밑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큰 체구의 남자가 멈춰서자, 한스 또한 멈췄다, 그러자 아까와 마찬가지의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이 이러한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며, 한스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는 사내의 뒤를 말 없이 따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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