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15화 점쟁이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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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절정의 파도를 맞이한 탓에 정신을 잃은 밀리안느를 조심스럽게 소파 위에 눕힌 한스는,
흐트러진 자신의 옷 매무새를 간추리기 시작했다, 고른 호흡을 내뱉는 그녀의 흉부와,
뒤집은 믹싱 볼과 같은 형태가 된 그녀의 풍만한 유방을 잠시동안 넋 놓고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어 제정신으로 돌린 한스는 객실을 나섰다.
“흐아앗!”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비명횡사 하는, 필사의 각도에서 날아온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한스는, 이런 살벌한 공격을 자신에게 가한 원흉을 바라봤다.
“쳇, 그걸 용케도 피하네.”
자신이 진정으로 죽기를 바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소녀에게 한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정말로 죽을 것 같으니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참입니다만.”
“정말로 죽어줬으면 좋겠는걸?”
아직은 어린 티가 남아있는 소녀가 빛나는 햇살 같은 미소로 살벌한 이야기를 하면, 보통은 당혹스러워 하겠지만,
한스는 이런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기에 이제는 익숙하다는 느낌 보다는 진저리가 난다는 감각만이 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이사나양.”
“이번에야말로 당신이 죽는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내 기대를 저버린 당신이 참 미워.”
이사나라고 불린, 금발에 양갈래 머리를 한 소녀는, 한스를 찔러, 생명에 심각한 피해를 가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치 못한 단검을, 허벅지에 채운 칼집에 넣었다.
“이사나양의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하나만 알아둬, 다음에 또 내 눈 앞에 보이면 그 때가 바로 당신 제삿날이야.”
“죽고 싶지는 않으니 명심하겠습니다.”
한스는 독기어린 소녀의 말을 적당히 새겨듣고, 표표하게 걸어 아래층으로 향햇다, 으레 있었던 일이다,
목숨으로 공갈 협박을 당하는 것도, 혐오 발언을 듣는 것도 익숙했었다, 물론 최근에는 이런 류의 일을 당한 적이 없는 그였지만 말이다.
우중충하고 우울한 느낌이 들게 하는 구름 낀 하늘과 마찬가지인 골목길을 지나고, 시장의 중심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근처에서 가장 큰 주점을 기준으로 나뉘는 두 갈래 길에서 왼쪽으로 향한 한스는, 마리우스가 지시한 장소로 순조롭게 향하고 있었다,
슬슬, 시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도 끝을 맞이하는 지점, 오가는 행인의 수도 적고, 노상도 없는, 주택가가 시작되는 곳에,
별나게도 천막을 펼치고 장사를 하고 있는 자가 존재했다, 입간판을 보아하니, 점을 쳐주거나 액막이를 판매하는 듯 했다,
한스는 그것을 보고 장사도 잘 안되는 이런 곳에 판을 펼치다니, 참으로 별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크으, 오늘도 텃구만, 슬슬…, 응?”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했는데, 저긴가?, 아니 저 집은 폐가가 아닌데…, 이게 참…, 곤란하게 됐군.”
한스는 시장 이외의 구역에 발을 들인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에, 이 근방에서 유명하다고 화자되는 폐가에 대해서 당연히 어두울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도시 안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치명적인 판단을 한 그는 일단 앞을 향해서 계속 걸어 나가려고 했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자신과 연관이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이보 젊은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저 말입니까, 어르신.”
“허면, 여기 자네말고 다른 누가 있다는 말인가?”
노인의 말마따나 지나가는 행인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한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노인은 젊은 친구가 벌서부터 노망이 들었냐고 말하며 면박을 줬다.
“그래서 무슨 용무신지요 어르신, 저는 갈 길이 바쁩니다만…”
“거 젊은 친구가 되게 말이 많구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테니 이리 오게나.”
“지금 그럴 시간이…”
“입 다물고 오지 못하겠나?”
“하…”
약속 시간까지 그다지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고집스러운, 자신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노인을 그는 얼마든지 뿌리치고 갈 수가 있음에도,
이 분위기에 압도 되어 그럴 마음조차 들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한스는 노인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을 보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천막 안으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한발짝 내딛자 그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전신을 부드러운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느낌,
그리고 대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설치 된 천막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바깥의 풍경이 아득히 멀어진 것만 같은 감각이 들었다.
“뭘, 촌놈처럼 두리번거리고 있나, 빨리 자리에 앉게나.”
“이런 곳은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음, 역시 처음인가…”
“역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혼잣말이니, 잔소리 말고 어서 앉기나 하게, 두 번이나 말하니 입이 아파 죽겠어 그냥!”
“아, 알겠습니다.”
피부에 주름이 없는 곳이 드물고, 근육이 줄어들어 등이 굽은, 그야말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외견의 노인이지만, 왜인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에 한스는 압도됐다.
“그래, 젊은 친구, 대체 자네는 뭔가?”
“예?”
“아니 왜 대답을 못 하는겐가, 뭣하는 사람이냐고 물은걸세, 젊은 사람이 그렇게 말귀가 어두워서야 어디 밥이나 벌어먹고 살겠나, 쯧쯔쯔.”
한스가 상당히 부실해 보이는 나무 의자에 걸터앉자, 노인은 그의 모습을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유심히 관찰하면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흠…, 자네…, 흠흠…”
“뭐, 뭡니까?
노인은 작은 테이블 너머에 있는 한스에게 상반신을 쭉 내밀어서, 마치 신비한 동물을 본 것 마냥, 한참동안 이모저모 꼼꼼히 뜯어봤다.
“젊은 친구, 자네 원래대로라면 여기에 있을 수 없는 몸이구먼.”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한스의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가로젓고, 수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젊은 친구가 모르듯이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구먼.”
“어르신께서 모른다면 누가 아는겁니까!”
“세상의 이치를 설명한다고 한들, 그 이치를 하나도 모르는 자네가 단박에 이해할 리가 없잖은가!”
한스의 성급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노인은 혀를 끌끌거리면서 수염을 연거푸 쓰다듬었다.
“크흠…, 이치를 모르는 자가 성급해질 수도 있는 것을 내가 너무 과민 반응 했구먼, 미안허이.”
“아,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 슬슬 가봐야…”
다시금 의자에서 엉덩이를 띄워,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한스에게 노인은 손바닥을 보이며 또 다시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어허, 젊은 친구가 그리 성급해서야 될 일도 다 말아먹을거라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마음 편히 먹고 있게나.”
“아니, 저는…!”
“어허 걱정 말래도 자꾸 그러는가, 금방 전에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한 사죄로 이제는 다른 것을 봐줄 테니 편히 있게나.”
“하아…”
벗어나려고 마음 먹을 때마다 방해하는 노인의 행적이나, 좀처럼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운 이 요상한 분위기 덕에 가지도 못하고 이 바늘 방석 같은 곳에 자꾸 눌러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음~ 그래그래, 자고로 사내란 지금의 자네처럼 행동이 태산과 같이 무겁고 진중해야 하는 법일세.”
“그렇습니까.”
한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불편해 하건 말건 노인은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대로 행동했다.
“자, 그럼 어디볼까, 그래, 내가 아까 봤던 것이 정확했구먼, 자네, 어제도 내일도 아닌 곳에서 왔구먼!”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한스는 다시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기에 정확한 내막을 알고자 노인에게 물었지만 결과는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으흠, 과거가 안 보인다라…, 정말로 재미있구먼,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노인은 수정에 얼굴을 들이박을 정도로 가까이 들이댔다, 그렇게 한참을, 한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수정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나서야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자네, 먼 미래도, 지난 날과 똑같이 안 보이는구먼, 그래도 한 가지는 제대로 보였으니 안심해도 좋네.”
“그게 대체 뭡니까?”
“이제 가는 곳에서, 안쪽으로, 가장 안쪽으로 향하게, 깊고 깊은 곳에서 약해진 것을 반드시 찾아야만 하네, 반드시 그래야만 할게야.”
“허어…”
도저히,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던 한스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듯이 자리에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젊은 친구, 적절한 때에 가는구먼, 가는 것은 좋은데, 이것 하나만 기억하게나.”
“정말, 얼마나 제 시간을 허비할 생각인겁니까, 어르신!”
“허허, 그러지 말고 잘 듣게, 멀리서 오는 병사들을 조심하게나.”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시는겁니까?”
“뭘 말하는겐가?”
한 순간에 돌변하는 노인의 상태를 보며, 한스는 이 자가 설마 치매는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하면서 말했다.
“출병에 대해서 알고 말씀하신거 아닙니까?”
“아니, 나는 속세의 일이라면 정말 하나도 모른다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한스의 물음에 장사 도구를 정리하던 손길을 잠시 멈춘 노인은, 무슨 뚱딴지 같은 것을 묻는겐가 젊은 친구,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보이는 것을 말했을 뿐이라네.”
“그, 그렇습니까…”
한스가 허탈하게 웃고 있자, 눈 깜짝할 새에 짐 정리를 마친 노인이 천막을 건들며 말했다.
“뭘 바랬는지는 모르겠네만, 오늘 장사는 끝이니 돌아가게나, 그리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보세나.”
한스는 참으로 요상하고 괴팍한 점쟁이 노인의 천막에서 빠져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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