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엔딩
* * *
“가장 중요한 계획을 위해 몇 개의 계획을 드러내놓으면. 그중의 하나가 진짜인 줄 착각하더라. 진짜는 밑바닥에 깔려 있는 데.”
***
나는 굴레에 갇혀 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거나, 길에서 멈춰서 있겠다 해도.
[큰 흐름]은 나를 이끌어 끝을 향해 나아가게 만든다.
김성현이 신아린을 공략하여 마왕이 강림한 신아린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는 본래의 결말.
그 이후 김성현은 자신의 하렘 멤버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며, 가끔 신아린을 그리워하는 그런 결말이었다.
내가 쓴 소설에 빙의하여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에게 육변기가 되어 살아가는 결말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1회차 때.
나는 굴레를 인식하지 못했다.
내가 만들고 버린 세상이 나를 조종하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결말을 바꾸고 싶었다. 김성현이 가져야 할 것들을 미리 선점하고, 내가 알고 있는 설정을 찾아내어 성장했다.
하지만 김성현은 결국 나를 공략하게 되었고, 내가 숨겨놓은 본심을 알게 되었다.
나는 김성현과 싸워 패배하였고, 사지가 절단된 채 몽마의 환락가로 떨어졌다.
그곳에서 백치가 될 때까지 윤간당하다가. 내가 죽은 건지, 김성현이 내가 준비해놓은 하르마게돈에 죽은 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입학식으로 회귀하여 2회차가 되었다.
회귀를 깨닫고. 곧장 김성현의 머리를 터트리자, 3회차가 시작되었다.
다리를 자르고, 각성을 막자. 마왕을 막을 방법이 없어 또다시 입학식으로 돌아왔다.
몇 번의 반복된 회귀 끝에 나는 정해진[굴레]를 깨달았다.
반드시 세계를 멸망시킬 [마왕]은 예정대로 신아린에게 강림하여 김성현에게 공략당한 뒤. 죽어 모든 힘을 잃어야 했다.
내가 만들어낸 마왕의 설정이 굴레의 중점이었다.
[김성현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재앙]이라는 설정.
결국 끝을 보려면 김성현을 이용해야 했고, 나는 회귀를 하며 쌓은 지식으로 유물들을 끌어모아 방법을 찾아낸 다음 자살했다.
개연성에 맞춰 [설정]을 만들어내 구현해낸 ‘기아스’를 통해 내 기억을 잠시 봉인하고 김성현에게 접근하여 사랑에 빠진 착각을 하며 곁에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김성현은 또다시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는 내 본심을 알아내어 나를 또다시 몽마의 환락가로 던져버렸다.
하지만 김성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필이면 그날이 마계에서 몇천 년에 한 번. 가장 큰 달이 뜨는 날이었고, 윤간을 당하던 내게 [혼돈]의 달빛이 닿았다.
[혼돈]은 자신을 구하는 대가로 굴레를 벗어날 또 다른 [혼돈]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는 [혼돈]과 계약한 뒤. 그 즉시 머리가 터져 다음 회차로 넘어갔고, 그때부터 김성현에게 공략당하기 직전에 자살하는 것으로 시간을 벌며 힘을 길렀다.
그리고, 수백 번의 회귀 끝에 [기어오르는 혼돈]의 본체가 세계의 뿌리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고. [혼돈]을 세계의 뿌리에 뿌리자 나는 죽어 다시 회귀하게 되었다.
[기어오르는 혼돈]은 계약대로 또 다른 [혼돈]을 만들어냈다.
수백 번의 회귀동안 단 한 번도 변함없이 흘러가던 입학식이 변했으니까.
"…야!"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남자애를 돌아보는 아주 예쁜 인형이 있었다.
"아니…. 다 했으면 나도 작성해야 하니까…."
분명 자신의 아빠에게 금제 당하여 감정 없는 인형이었던 신아린은 자신에게 무어라 말하는 남자애에게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좁혔다.
나는 그 순간, 오르가즘에 도달한 듯 뇌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수백 번의 입학식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정해진 굴레를 벗어난 적이 없던 상황에서 새로운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변수이자 순수한 혼돈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를 공략할 플래그가 세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아린은 변수이지만, 아쉽게도 빙의자였을 뿐. 나와 같은 회귀자가 아니었다.
내가 회귀하면 신아린은 빙의를 당한 시점으로 돌아가게 되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정해진 틀 안에서만 변수를 일으켰다.
그러기에, 나는 신아린을 이끌어야 했다. 내가 수백번을 회귀하면서 쌓아놓은 기억을 바탕으로 신아린을 이용하여 이 굴레를 벗어나고, 세계를 없앨 방법을 찾아냈으니까.
새로운 기아스를 만들어내, 신아린과 김성현을 엮은 뒤. 나는 신아린의 심상 속에 세계의 뿌리 속 [미궁]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별다른 기대는 안 했다. 어차피 [기어오르는 혼돈]은 이미 세계의 뿌리에 갇혀 있던 ‘패배자’였으니까.
[혼돈]조차 세계의 필연성과 억지력을 버텨낼 힘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것조차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신아린은 계획대로 굴레가 끝날 때까지 절대 죽으면 안 됐으니까.
[큰 흐름]은 소설의 결말에 도달해 세상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 뒤에는?
소설의 끝나면 그 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런 필연도, 억지력도, 굴레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이야기가 써지길 기다리는 흰 종이일 뿐. 정해진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왕은 큰 흐름대로 반드시 공략당할 운명이었기에 내가 원하던 세계를 멸망시킬 종말이 아니었다.
내가 세운 계획은 그런 허접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일부러 조민성에게 내 기억 중 ‘일부’를 보여주었다.
하르메게돈이 일어나고, 신아린의 몸에 마왕이 강림하는 기억을….
일부러 내 본 계획을 숨기기 위해, 보여주기식으로 계획 몇 개를 드러내 보였다.
설정대로 신아린을 사랑하는 조민성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하르마게돈을 막아내고 퇴장했다.
본래 영또플에서도 신아린이 재앙의 그릇임을 알면서도 조민성은 신아린을 위해 김성현과 싸우다가 죽게 되는 설정이었다.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멍청한 천재.
하지만 그 여자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그런 불쌍한 캐릭터였다.
조민성은 [큰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퇴장하였고, 나는 개연성을 이용해 세계의 설정 중 하나를 바꿔냈다.
신아린에게 언젠가 말했던 재앙의 그릇이라는 말을 개연성으로 삼아.
이중적인 의미로 바꿔냈다.
마왕을 강림하여, 세계를 멸망시킬 재앙의 그릇이라는 뜻과 재앙을 낳을 수 있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마왕의 힘과 신재호의 무력화 능력을 받아 [파훼]의 힘을 얻어낸 신아린처럼.
신아린이 김성현과 굴레에서 벗어나 내가 바라는 대로 행복하게 되어 자식을 낳게 되면 신아린의 [파훼] 능력과 김성현의 공략 플래그의 달인 능력을 얻은 자식은.
그 어떤 것이든 [파훼] 할 수 있고, 그 누구도 저항하지 않는 누구도 공략할 수 없는 종말이 될 것이다.
굴레에서 벗어나, 세계의 억지력도 통하지 않고 마왕처럼 김성현이라는 약점도 있지 않은 절대적인 능력을 갖춘 종말.
하지만 신아린이 죽는다면, 그 종말을 태어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신아린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김성현에게 반드시 공략당하여 패배할 운명인 마왕을 흡수하여 신아린의 몸에 강림했다.
그리고 신아린의 심상속에 들어가, [혼돈]이 갇혀 있는 미궁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이것이 함정이고, 너는 김성현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주려.
물론 [혼돈]이 정말 신아린을 침식시킬까. 걱정했지만 역시 조민성은 신아린을 위해 심상 속에 자신을 숨겨두었다.
내 계획대로 조민성은 넌지시 뱉었던 설정을 추론해 신아린이 자신의 힘을 [파훼]하여, 살아남을 방법을 깨닫게 했다.
그동안 조민성을 살려둔 이유, 마지막 퍼즐이 맞아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조민성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었고, 만족스럽게 퇴장하였다.
나는 이미 마왕의 몸을 흡수해 마왕의 능력까지 얻어놓은 상태였기에, 신아린이 나를 죽이기를 기다리면 됐다.
당장에라도 검을 휘둘러 마계와 인간계의 절대적인 경계선을 [파훼]하거나, 김성현의 목을 잘라낼 수 있음에도. 멍청하게 시간을 끈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봤자.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할 테니까.
결국 신아린은 심상에서 벗어나 몸의 제어권을 되찾으려 했고, 못이기는 척 살짝 제어권을 놔주자.
거리낌 없이 자기 심장을 찔러, 강림을 [파훼]한 신아린은 그대로 나를 죽였다.
그리고는 스스로의 힘을 파훼시켜 본래의 결말을 비틀어, 해피엔딩을 만들어냈다.
우습게도
그게 내‘진짜’계획이었는 데.
나비는 새끼가 없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는 것이지, 새끼부터 시작하는 나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왕의 권능인 새끼 나비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설정이었다.
죽음으로 모든 능력을 봉인 당하지만, 그 어떤 죽음에서도 벗어나 부활할 수 있는 능력.
이것으로 [무력화]로 자신의 힘을 없앤 뒤. 성노예로 삼아 자식을 낳게 만들던 신재호에게서 [죽음]으로 벗어나. 마계로 돌아와 힘을 길러 다시 한번 마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나는 계획대로 죽었고, 모두에게 잊혀졌다.
그리고 새끼 나비가 되어 다시 삶을 부여받았다.
시간이 흘러.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주인님.”
그동안 아기였던 나를 길러준 예리엘이 공손하게 내게 허리를 숙였다.
방주에서 있었던 칠격과의 싸움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예리엘을 세뇌해 미리 내가 부활할 곳에 대기시켜 놨다.
나는 그동안 힘을 되찾았고, 신아린과 김성현 사이에서 종말이 태어나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종말을 만나는 날이 되었다.
수백 번은 경험했던 초월 아카데미의 입학식을 아주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입학식에서 한눈에 그토록 기다리던 종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성현과 똑 닮은 얼굴. 하지만 눈은 아린이를 닮아 흑요석같이 밝게 빛났다.
지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김시우는 김성현의 자식이 맞는지. 입학식에서 벗어나 창고로 숨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나는 몇십 년 만에 웃을 수 있었다.
드디어 수백 번의 회귀 끝에 찾아낸, 창조주를 배신한 세계에 복수 할 수 있는 방법이 눈앞에 무방비하게 홀로 놓여 있게 됐다.
즐거움을 숨기지 못하고, 창고로 다가가 문을 열자. 끼익 하는 녹슨 경첩의 소리마저 아름답게 들렸다.
멍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시우의 모습에 치솟는 행복에 온몸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아주…오래 기다렸어.”
수백 번의 회귀, 그리고 굴레를 넘어. 결국 도달했다.
이제 이 종말은 나를 통해 각성하게 될 것이고, 그 누구도 막지 못할 종말이 될 것이다.
나는 기쁨마음을 담아 종말에가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안녕, 내 완벽한 종말아.”
그래, 이게 창조주를 배신한 너희들에 대한 내 보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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