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시간이 흐르고
* * *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평소처럼 소란스러운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다.
“아침부터 피망 시져!!!”
“나도 피망 싫어!!!”
“이모, 햄 안 먹으면 나 줘!”
“나는 아이스크림 먹을래!”
“아침 씨리얼이라며!”
항상 소란스러운 식사 시간이지만, 오늘은 어린 동생들을 통제할 얘들이 먼저 식사를 끝내고 아카데미 입학식을 준비하고 있어서. 더욱 시끄러웠다.
“야! 조용히 안 해!”
한서아의 외침에도 애들은 겁 없이 빼엑대며 피망을 그릇에서 빼내거나, 옆 사람의 그릇에 몰래 집어넣기도 했다.
“엄마, 나됴 피망시져….”
옆자리에 앉아 피망을 숟가락으로 툭툭 쳐내는 시아의 중얼거림에 나는 한숨을 쉬고, 시아를 달래줬다.
“시우 오빠처럼 키 크려면 피망 꼭 먹어야 하는데?”
“엣! 머야 시우형처럼 크려면 피망 먹어야 해?”
토우코의 아들인 시로가 옆에서 그 말을 듣고는, 눈을 질끈 감더니 피망을 입에 집어넣었다.
“으윽, 그래도 맛없어.”
“미트볼이랑 같이 먹어야 맛있을 텐데….”
“맞아! 역시 이모는 똑똑해!”
시로가 그리 말하며 미트볼과 함께 피망을 먹자. 옆에서 지켜보던 시아도 서툰 손길로 미트볼과 피망을 숟가락에 담아 꼭꼭 씹어먹었다.
볼이 씰룩씰룩 움직이는 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자식을 키우는 게 어째서 새로운 행복을 찾는 거라는 말이 있는지 조금이나마 공감할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는 임신으로 아카데미에 자퇴하고, 성현이와 함께 신재호가 살던 본가에서 살기로 했다. 그 뒤 하렘의 멤버들이 하나씩 임신하면서 계획대로 한 지붕 아래서 살기로 했다.
성현이의 피가 이어진 아이들의 숫자만 11명이 되었는데. 나는 나이 차이가 있는 시아와 시우 남매.
토우코는 시아와 같은 나이인 4살의 시로, 사쿠라 이란성 쌍둥이 남매를 낳았고,
유지아는 남자 세쌍둥이를 낳았다. 유신,유석, 유수라는 이름의 세쌍둥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쑥쑥 성장하고 있었다.
한서아는 한봄, 한울, 한서, 한주라는 이름의 4명의 자식을 낳았다. 한봄이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남자였다.
하지만 제일 불같은 성격을 가진 건 한봄이라 동생들은 한봄이 눈치만 보다가 한봄이가 사라지면 금세 소란스레 날뛰었다.
오늘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건 가장 먼저 태어난 시우와 한봄이었다.
시로에게 시아를 부탁하고, 입학식을 준비하는 시우의 방으로 향해 노크하려 했을 때.
안에서 들려오는 성현이의 목소리에 살짝 문에 귀를 기울였다.
“아빠도 아카데미 들어가기 전까지는 별 볼 일 없는 놈이었어. 그런데 입학식 때부터 네 엄마를 처음 딱 만나고! 인생이 쫙 변했지. 아, 참고로 아무도 없는 층의 화장실에는 절대 가지 마라. 갑자기 누가 화장실 막 들어와서 동정”
똑똑똑
노크하고 방문을 열자, 성현이가 헛기침을 하며 시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튼 뭐, 입학식 끝나고 다 같이 저녁 외식인 건 알지? 호텔 식당 빌렸으니까 늦지 말고 집에 오고.”
“네. 알았어요.”
시우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대견한 미소를 지은 성현이는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시우의 눈이 커지는 것으로 보아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아 도끼눈을 한 채 노려보자. 성현이는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발급받은 학생증은 챙겼지?”
“네….”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시우에게 다가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며, 볼에 뽀뽀를 해줬다.
예전에는 뽀뽀해달라고 그리 칭얼대던 얘가 요즘에는 부끄러워하는 게 조금 슬펐다.
머리카락은 좀 잘랐으면 좋겠는데. 시원하게 이마를 드러내는 게, 더 멋있다고 몇 번 말했지만.
시우는 자신감이 없어 자꾸 얼굴을 가리고 싶어 했다.
괜히 머리가지고 스트레스를 주기도 싫어서, 놔뒀더니 앞머리가 눈을 찌를 기세였다.
성현이의 예전 모습과 똑 닮은 시우. 시골 똥강아지 같은 순박한 눈으로 시우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아빠처럼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예전 성현이가 떠올랐다. 각성하기 전 열등감과 질투 덩어리던 나쁜 놈과는 반대로 시우는 내 아들이지만 너무나도 착해서,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동갑내기이자, 이복남매인 한봄이에게 계속 끌려다니며 학교생활을 했지만. 아카데미에 들어가 좋은 사람을 만난다면…. 성현이의 능력을 이어받은 시우도 소심한 성격을 버리고 얼마 못 가 성현이를 뛰어넘을 것이다.
성현이뿐만이 아니라 내 핏줄도 타고났으니까!
“그럴 수 있을 거야. 네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한다면…. 너는 네 아빠보다 더 멋있는 사람이 될 거야. 아직 17살이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
이제 막 17살이 된 아이에게 사랑을 논하는 건 빠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갑자기 든 생각에 나는 시우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널 임신한 것도 17살이었네?”
별 뜻 없이 갑자기 든 생각이라 그리 말했는데. 시우는 몸을 움찔하더니,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역시 부모님은 천생연분인 것 같아요.”
“응? 맞긴 하는데…. 갑자기 왜?”
“아까 나가기 전에 아빠도 그런 말을 했거든요. 엄마를 임신 시킨 게 1학년 때….”
싸늘하게 굳어가는 내 얼굴을 확인 했는지. 시우가 말끝을 흐리며, 침대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 그럼 저는 입학식 갔다 올게요.”
“그래, 잘 갔다 와.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시우가 밖을 나가자 시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한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김시우! 5분이면 된다더니 15분이나 걸리냐!”
“미안….”
“아오, 이 답답이. 아 됐으니까 차기사님 기다리니까 얼른 와!”
그 대화를 들으며, 시우가 한봄이 같은 여자를 만나면 어떤 부부생활을 할지가 그려져 웃음이 나왔다.
방을 빠져나와 시아에게 가자. 아침 식사를 끝내고 시로와 사쿠라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잠깐 앉아, 토우코와 함께 아이들과 놀아준 뒤. 시아를 맡기고 성현이를 찾았다.
본가 자체가 워낙 크기도 했고 방도 많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따로 별관까지 지어서 그냥은 찾기 힘들어 도우미분에게 성현이의 위치를 물어 별관에 취미 생활을 위해 만든 게임방에 숨어 있던 셩현이를 찾아냈다.
컴컴한 방음부스 안에서 큰 모니터 앞에 소파에 앉아 축구 게임을 하던 성현이가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보고 황급히 게임을 일시 정지 했다.
“어, 어…. 왜 자기야.”
“여보,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자. 성현이가 침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게 나도 아빠니까 어느 정도 내가 살아왔던 경험을 토대로 조언을….”
“쉿.”
성현이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고, 손을 뒤로해 마력으로 방음부스의 문을 닫자. 성현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오늘 나 좀 피곤한데…. 그리고 아직 나 씻지도 않았”
“괜찮아. 냄새나는 게 더 좋아.”
“애, 애들도 아직 집에 있잖아. 시아는 누가보고!”
“괜찮아 방음부스잖아. 그리고 토우코도 있고 유모님들도 계시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곧 토우코도 올 거니까 아쉬워하지 말고….”
내 마지막 말에 성현이는 딸꾹질을 하며, 팔을 엑스자로 교차하며 가슴을 가렸다.
“아니, 토우코는 왜….”
“알잖아, 불타는 나이인걸. 이왕 하는 거 같이 즐기는 게 더 좋으니까.”
두려운 표정을 짓는 성현이에게 미소를 지으며, 나는 손을 밑으로 향했다.
***
초월 아카데미의 입학식으로 가는 차 안. 뭐가 그리 불편한지 숨 쉬는 것처럼 불평을 내뱉는 한봄이의 모습에 시우는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한숨을 흘렸다.
하필이면 그 날인가…? 매일 신경질적으로 빼엑 대는 목소리로 갈구기는 했지만, 아침부터 이리 짜증 내는 건 적었는데….
이럴 때 입을 닫고 있으면, 더욱 날뛰는 성격이기에 어떻게든 화를 달래주려 시우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그, 오늘 기분 안 좋아?”
“당연하지! 너는 늦게 오지! 엄마는 자꾸 치마 입으라고 하지! 교칙에도 나와 있잖아! 치마와 바지 둘 중 하나만 입어도 된다고! 근데 왜 자꾸 치마를 강요하는 거야!!! 난 바지가 좋다고!”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는 한봄의 말에 시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달래줄 말을 찾아야 했다.
“그, 그렇지. 근데 이모는 네가 너무 남자처럼 옷 입는 것 때문에 그러”
“남자처럼?”
한봄이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제야 말을 잘못 꺼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우는 후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원래 남자였다고! 진짜 나는 빙의한 거라니까? 어? 야 너 안 믿냐? 씨발 안 믿지 너.”
한봄이의 다그침에 시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믿는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한봄이는 계속해서 화를 냈다.
자신을 남자라고 말하는 한봄이의 모습에 시우는 예전의 한봄이가 그리웠다.
그 착하고 여자력이 넘치던 한봄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자신이 소설에 빙의 됐다고 자신은 원래 남자였다며, 치마가 아닌 평소에 잘 입지도 않던 바지를 입기 시작한 중학생 때부터.
[본래 남자였는데 미소녀가 되었습니다] 라는 컨셉의 중2병은. 도저히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입학식장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히스테리를 부리는 한봄이를 겨우 진정시키고 입학식이 진행되는 강당으로 향했다.
강당 안에 들어가기 전에 가방을 맡기고 학생증을 건네, 팸플릿을 받았다. 안내받아 강당으로 들어가 인적 사항이 적힌 종이를 적어내고, 정해진 의자에 앉았다.
[30분 뒤, 입학식이 시작됩니다. 접수를 끝낸 학생은 팸플릿을 확인해주시고 배정된 좌석에 앉아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곧 입학식이…]
입학식 순서가 적힌 팸플릿을 보고 있자니,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안 보이는 곳에서 숨어서 휴대폰으로 소설을 읽다가 끝날쯤에 자리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시우는 강당 밖을 나가서 좋은 곳이 없나 둘러보다, 시우는 조금 전 아빠의 조언이 떠올랐다.
‘절대 화장실은 가면 안 돼!’
이유가 있어서 그런 조언을 한 게 아닌가 싶어, 아카데미의 본관으로 가는 통로를 발견해 본관 건물의 계단을 통해 밖을 나와. 운동장의 구석에 열려 있는 창고를 발견했다.
입학식이 진행되는 강당과 멀지 않아서, 강당 안에서 들려오는 안내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라면 타이밍 맞춰서 끝날 때 즘에 제자리로 돌아가면 될 것 같았다.
흙먼지 냄새가 나는 창고 안에서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매트리스 위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소설을 읽었다.
[거지 영웅은 SSS급 영웅이 된다] 라는 소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주인공이 성장하여 SSS급의 영웅이 된다는 판타지 소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주인공에 동질감을 느낀 걸까. 시우는 어젯밤 잠이 오지 않아 무심코 본 이 소설을 읽는 데 재미가 붙었다.
즐겁게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시우의 귀로 누군가 창고를 향해 걸어오는 듯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선생님인가 싶어. 숨을 곳을 찾았지만, 창고 안에는 몸을 숨길만 한 장소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의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게 화면을 끄고 그냥 지나가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끼익
하지만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창고의 문을 열었다.
어두운 창고 안에 적응된 눈 때문에 햇빛의 역광을 받아 문을 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 사람이 여자이고, 되게 좋은 목소리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주…오래 기다렸어.”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감정이 담겨 있는 그 알 수 없는 말에 왜인지 모르게 시우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햇빛에서 빠져나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현실적인 외모를 가진 백발의 미소녀의 모습에 시우가 눈을 떼지 못하고 멍청히 바라보자.
백발의 미소녀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뒤로 해. 새하얀 마력을 손끝으로 방출해 창고의 문이 닫혔다.
자신에게 다가온 마치 신의 만들어낸 예술품 같은 미모를 가진 새하얀 인형 같은 미소녀를 바라보며. 시우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시우에가 다가간 소녀가 얼굴을 가까이하자, 중독성 있는 기분좋은 향기가 훅, 하고 끼치자. 왜인지 모르게 시우는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시우의 귓가를 간지럽히듯, 아름다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안녕, 내 완벽한 종말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