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56화 (156/160)

〈 156화 〉 양자택일

* * *

비밀의 방에 모인 우리는 말 없이 성현이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침묵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성현이와 찍었던 사진들을 바라보며 추억을 떠올렸다.

가장 오래된 사진. 지금 생각해도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요구했나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요구를 하던 성현이가 떠올랐다.

시골 똥 강아지 같은 순박한 눈으로 처녀막을 보여달라고 애원해. 결국 그 애원에 넘어가 처녀막을 보여주다. 약속을 어긴 성현이 때문에 처음 혀로 애무를 당한 날이기도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 날이 처음으로 성현이와 같이 사진을 찍은 날이라는 것이다.

그때의 성현이를 떠올리면 그 변태 같은 성욕에 한숨이 나오다가도, 순수하게 내 전부를 열망하던 것이 조금은 좋았던 것 같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낳으면 지금 성현이의 모습과 닮았을까. 아니면, 예전의 성현이를 닮았을까.

물론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외모가 달라졌지만, 결국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마령화를 한 채 내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던 아레아를 슬라임처럼 꾹꾹 누르며 촉감을 즐기고 있을 때.

갑작스레 무언가 내 속에서 터져나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윽!”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온몸의 혈관이 찢겨나가며 근육이 뒤틀리는듯한 격통에 나는 이상을 느끼고 아레아를 내게 다가오는 한서아에게 던졌다.

“에? 으아아앙! 뭐, 뭐야!”

갑자기 자다가 하늘을 날게 된 아레아가 놀라 소리쳤지만, 나는 온몸을 부숴버리는 것 같은 격통에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아, 아린아!”

“오, 오지마…!”

걱정스레 내게 다가오는 토우코에게 소리치며, 나는 결국 의식을 잃었다.

***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주변을 살펴보니, 언젠가 보았던 기시감이 느껴지는 카페였다.

손님 한 명 없는 카페 안의 테이블 위. 오랜만에 보는 아주 익숙한 디자인의 노트북이 눈에 들어왔다.

8년도 더 된 고물 노트북이라 사용 시간이 10분이 지나면 발열 때문에 윙윙­거리는 쿨러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지만, 오랜만에 보는 노트북은 반갑게만 느껴졌다.

노트북에 다가가 의자에 앉자. 영또플을 기다리며 스토리 분석을 작성했던 파이어 위키의 홈페이지가 떠올랐다.

나는 이 소설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주인공에 나를 대입하기도 했고, 주인공을 응원하며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기에 알지 못하는 결말을 기다리며, 의미 없는 열정을 불태웠다. 주인공과 히로인들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을 바랐다.

그래서 소설에 빙의하는 꿈을 꿨던 걸까? 꿈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다. 소설이 끝나기를 염원한 탓에 신아린이 되는 꿈을 꾼 것일지도 모른다.

“꿈이 아니야.”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백진희?”

“안녕, 아린아. 아니, 아니지…. 반가워, 한성진.”

그리 말하며 내게 손을 내미는 백진희의 모습에 당황해 무심코 내민 손을 붙잡았다.

작고 가늘었던 내 손이 본래의 내 손으로 변해 있음을 깨닫고 몸을 내려다보자, 원래의 모습이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

“백진희 여긴 어디야?”

“아니, 이제 나는 백진희가 아니야. 신아린이지.”

“뭐…?”

내 의문을 해결하듯, 백진희의 모습이 변하더니 나의 모습…. 아니, 신아린의 모습으로 변했다.

“일단 앉아서 대화 좀 할까?”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신아린’에게 나는 어색함이 느껴졌다. 거울 속의 또 다른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내 맞은편에 앉은 신아린은 대뜸 내 손을 붙잡았다.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 고맙다고.”

“…갑자기?”

“넌 내 소설을 사랑해준 독자니까.”

그 말에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네 소설을 사랑하긴 했지만, 인기를 질투하여 욕도 하고 휴재한다 하면 커뮤니티에 작가 욕을 한 바가지씩 쓰기도 했었으니까.

소설을 좋아한 독자는 맞지만, 작가에게는 나쁜 독자인 내가 감사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그래서 너에게는 진짜 영또플의 결말을 알려주고 싶어.”

“결말을…?”

그 말에 흥미가 생겼다. 과연 너는 어떠한 결말을 준비했을까. 내가 예상하던 것을 뛰어넘어 내게 기쁨을 줄 결말을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까?

고생 끝에 김성현이 세계를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는 고전적이면서도 언제나 그렇듯 만족스러운 결말은 아닐까?

그런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빛내자, 잡은 손을 놓고 신아린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규칙적으로 치며 말했다.

“내가 신아린의 설정에 대해 말해준 거 기억해?

기대했던 답변과는 달랐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마지막 히로인이자, 최후의 빌런이라는 거?”

“맞아. 너는 마지막으로 아카데미에서 김성현에게 공략당해 김성현을 사랑하게 되는 히로인이고, 아카데미의 졸업식 날. 마왕이 네 몸에 빙의하여 세계를 멸망시키는 빌런이 되는 존재야.”

“알고 있어. 그래서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에 성현이가 마왕을 공략하러 간 거잖아.”

내 말에 신아린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턱을 괴고 나를 응시했다.

“큰 흐름이라는 거 말해준 적 있지?”

“응, 기억해.”

“영또플의 결말은 마왕이 네게 빙의하고, 김성현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너를 죽이는 새드엔딩이야.”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신아린을 바라봤다.

김성현을 그토록 힘들게 만들고서는 보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결말이라고…?

“도대체 왜 그런 결말을 만든 건데?”

“해피엔딩은 진부하잖아?”

당연하다는 듯이 즉답하는 신아린의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물론 누군가에게 해피엔딩이란 뻔한 결말일 수 있다.

행복하게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서로 사랑을 하며 남은 삶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뻔한 것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하고, 자식을 낳고, 슬픔에 눈물을 흘리는 그런 뻔함.

남에게는 지루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나는 현실에서 느끼지 못한 것들을 소설에서 대리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소설을 보는 이유는 주인공에게 몰입하여 응원하고, 공감하며.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같은 생각을 하는것이 좋았다.

마치 가족 또는 친구의 이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독자의 기억에 남게 하기 위해, 또 다른 떡밥을 남기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새드엔딩으로 끝나는 소설을 싫어했다.

아는 사람이 갑작스레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찝찝함과 불쾌함을 느꼈다.

물론 작가는 그 찝찝함과 불쾌함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으면, 자신의 의도대로 된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실도 시궁창인 내게 소설까지 시궁창인 기억은 그저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 불행한 기억일 뿐이다.

“마왕을 공략해봤자, 시간이 지나면 너는 자연스레 각성을 하게 되고 세상은 멸망하겠지. 큰 흐름은 억지로라도 마왕을 네게 빙의시켜 김성현이 너를 죽이게끔 만들 거야. 그게 정해진 흐름이자 운명이고 소설의 결말이니까.”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신아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배신감 같은 게 느껴졌다. 영또플의 중후반 내용은 시련이 닥치면 보상이 온다.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방식을 기반으로 진행되었으니까.

김성현이 혼자 칠격과 가디언즈 사이에 끼어 힘들게 세계를 위해 마인과 싸우고, 결국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세계를 구하는 결말은…. 김성현에게 어떤 보상이 있는 걸까?

“내가 네 행복하길 원한다고 한 말 기억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 손에 죽어야 하니까…. 행복하길 원한 거였어?”

그 말에 신아린은 몸을 곧추세웠다. 씁쓸한 미소와 함께 작게 고개를 젓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독자를 죽게 할 수는 없지. 약속했잖아 절대 널 죽게 놔두지 않을 거라고.”

백진희가 내 방으로 찾아온 날. 그런 말을 했었다.

“절대 널 죽게 놔두지 않을 거야.”“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성현이가 나를 죽이지 않고 세계를 구할 방법이 있는 것일까? 작가라면 분명히 어떤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귀로 들려오는 말은 그런 기대감을 부숴버렸다.

“내가 널 대신해서 죽을게.”

갑작스러운 그 말에 뇌가 정지했다.

무슨 뜻인 걸까. 나를 대신해 희생한다고…?

“난 마왕을 흡수했어. 그리고 신아린의 몸에 강림한 상태야. 이제 내가 백진희가 아니라 신아린이 된 거지. 결말대로 이제 곧 김성현이 나를 죽이러 올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자기 손으로 죽이려.”

그 말을 하는 신아린은 기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죽이러 오는 김성현이 상상된다는 듯이 행복하게.

“왜 그렇게 좋아하는데…?”

“날 배신한 성현이에게 복수하는 거니까. 말했잖아, 난 반드시 복수 할 거라고. 내 죽음으로 복수하는 거지.”

씨익, 웃는 신아린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아파졌다.

“너를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 줄게. 김성현에게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돌아가. 그게 못난 내 소설을 사랑해준 독자를 위한 작가의 선물이야.”

그리 말한 신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마인화를 사용했다. 허공에서 검을 만들어낸 신아린은 그대로 검을 휘둘러 [무언가]를 베어냈다.

“이게 본래 네가 살던 세계선이야. 돌아갈 준비는 됐어?”

그 물음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기분.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와 남아서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을 운명. 그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하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지만….

왜인지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현이에게 죽는다면…. 너는 어떻게 되는데?”

“이미 내가 회귀할 수 있는 흐름을 넘어섰으니, 진짜로 죽는 거지.”

그 말에 내가 충격받은 얼굴을 하자. 신아린은 손을 휘휘 저으며, 웃으며 말했다.

“이미 수백 번은 질리도록 죽은 몸이야. 몸도 마음도 나는 지쳤어. 이 지독한 악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찢긴 세계선에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내 방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으로 들어간다면, 나는 예정된 죽음을 피하고, 본래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너에게 못 할 짓을 많이 해서 미안해.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결말을 위해서는 이 방법이 제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말한 신아린은 허리를 숙여 내게 사죄의 인사를 하고는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김성현이 날 죽이려 찾아왔어. 아쉽지만 이만 가봐야겠어. 잘 돌아가.”

그리 말하고는 신아린은 카페의 밖으로 나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세계선의 앞에서 망설였다.

살아남을 기회인 걸까, 아니면 백진희의 또 다른 함정인 걸까.

하지만 본능적으로 나는 이 세계선을 넘으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을 보는듯한 그리운 느낌. 원래의 세계가 자신에게서 벗어난 나를 알 수 없는 힘으로 끌어당겼다.

[이곳은 네가 있을 세계가 아니다.]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자.]

본질을 찾아가려는 회귀본능인 걸까. 나는 세계선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보고 싶었던 친구들, 부모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

백진희가 사라지자 혹시 몰라 백진희에게서 미리 받아놓았던 스노 글로브를 이용해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들어온 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여자들이었다.

“신아린!”

하지만 방 안. 어디에도 아린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 주인?”

어디선가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에 황급히 주변을 살펴보다, 침대 밑에 숨어서 몸을 출렁거리며 떨고 있는 아레아를 발견했다.

“비골! 괜찮아? 아린이는?”

“그, 그게…. 갑자기 마인으로 변하더니, 마기를 터트려서 전부 기절시키고는 밖으로 나갔어.”

아레아의 말에 황급히 밖으로 나가려는 데. 마령화를 해제한 아레아가 내 팔을 붙잡았다.

“주, 주인! 여주인 엄청 위험해…. 난 알, 알 수 있어! 잘못했다가는 주인도 죽을지 몰라….”

본능적으로 격의 차이를 깨달았는지. 아레아는 몸을 덜덜 떨어대며 두려워했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애들 깨어날 때까지 옆에 있어 줘.”

“아, 알았어….”

아레아에게 뒤를 맡기고 칠격과 함께 비밀의 방을 빠져나와 아린이를 찾았다.

얼마 못 가 느긋하게 교정을 걷고 있는 아린이의 뒷모습을 발견한 나는 아린이에게 달려갔다.

“아린아!!!”

내 외침을 들은 아린이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나는 아린이의 모습에 달려가던 것을 멈추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린이 맞아?”

백진희가 쓰고 있던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아린이가 맞다고 확신했지만….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맞아. 네가 죽도록 사랑하는 아린이.”

그 말에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린이가 아닌 백진희임을 깨달았다.

“너…. 아린이의 몸에 빙의한거야?”

“응. 그리고 이제 이 세계를 멸망시킬 거야.”

그리 말하며 오른손을 옆으로 뻗자, 칠흑 같이 어두운 검이 나타났다.

“마계와 인간계. 그 둘을 나누는 절대적인 경계선을 [파훼]하면 어떻게 될까?”

신아린의 몸에서 마기가 터져 나오며 검을 감싸기 시작했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이 세계는 끝나 김성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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