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기어오르는 혼돈
* * *
“수고했어 성현아.”
아기가 된 마왕을 안아 든 백진희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칭찬하듯 내게 말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뭐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하는 백진희의 모습에 무어라 따지려다가 신한림의 제지에 멈췄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나?”
그 물음에 백진희는 미소를 지으며, 마왕의 발목을 붙잡아 사냥감처럼 공중에 들었다.
“응. 원래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새하얀 마력이 백진희의 몸에서 터져 나오며 마치 보호하듯 주변에 거대한 빙벽들이 만들어졌다.
“일단 얘기는 나중에. 제압부터 하자.”
그리 말하며 신한림이 패도의 기운이 담긴 검을 휘둘렀지만, 빙벽에는 작은 흠집만 났다.
모두가 빙벽을 뚫기 위해 공격을 가했지만, 빙벽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아기가 된 마왕의 발목을 붙잡아 공중에 대롱대롱 들고 있던 백진희는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백진희의 다음 행동에 충격을 받아 공격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칠격도 백진희를 바라만 봤다.
백진희는…. 아기가 된 마왕을 자신의 보지에 집어넣고 있었다.
살이 찢어지며 피가 흐르는데도, 기쁜 표정으로 발부터 시작해 머리까지. 마치 출산하는 것을 역재생시키는 듯한 모습으로 마왕을 자신의 안에 집어넣었다.
거대한 마기가 백진희의 몸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빙벽이 터져나가며 백진희의 새하얀 마력이 검은 마기로 변해 있었다.
!
백진희의 내부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포효했다. 마왕의 마기보다 더욱 짙고 강대한 마기가 쉼 없이 백진희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다들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킨 채 백진희와의 전투를 준비할 때. 돌연, 옥좌의 방을 짓누르던 마기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마왕의 입었던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채. 백진희는 도도한 구두 소리를 내며, 아무런 경계 없이 나와 신한림이 서있는 곳을 지나쳐 옥좌로 향했다.
또각또각
그 어떠한 힘을 내보이지 않았음에도, 나와 신한림은 그저 우리 사이를 지나가는 백진희의 선연한 존재감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백진희는 자연스레 옥좌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는 우리를 내려보았다.
경멸과 무시가 담긴 눈빛. 마치 왕이 아랫것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시선임에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마치 자비를 베푼다는 듯이 말하는 백진희의 말에 순간 무언가가 마음속에 치솟았지만.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기에 입술을 깨물고 참아냈다.
“이게 뭔지 맞추면 궁금한 거 대답해 줄게.”
자기 이마에 있는 블랙 다이아몬드 문양을 툭툭 건드리며 장난치듯 말하는 백진희의 모습에 일리아가 더는 소리쳤다.
“이 미친년이 진”
“쉿.”
백진희가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그러자 욕을 내뱉던 일리아의 입이 강제로 닫혔다.
“성현이랑 대화하는데. 건방지게 끼어들지 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벌어지지 않자 일리아가 미간을 구기며 성난 콧바람과 함께 백진희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신한림이 급히 제지했다.
“진정해. 적의 도발에 넘어가지 마라. 평소처럼 행동해.”
신한림의 말에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경과 동화되어 모습을 감췄다.
“언령이 강화됐군. 마왕의 힘을 흡수한 건가?”
“글쎄? 아직 비밀을 풀지 못했으니까 대답 안 해줄래.”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그리 말하던, 백진희는 손을 뻗어 마기를 방출했다. 그러자 사람의 뼈로 만들어진 것 같은 거대한 모래시계가 옥좌의 앞에 나타났다.
“얼른 문제를 푸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백진희의 그 말에 알펜시아가 다가와 속삭였다.
“일단 문제를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딱히 싸울 생각은 없어 보여.”
그 말에 나도 동의했다. 백진희는 정말로 내가 문제를 맞히길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저게 뭔지는 짐작이 가?”
신한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 보는 문양이야.”
“어쩔 수 없지. 그럼 아무거나 던져봐.”
고개를 끄덕이고 백진희에게 말했다.
“각인 같은 거 아니야?”
“틀렸어. 그리고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으면 틀렸다고 말할 거야.”
그리 말하며 백진희가 손짓하자, 모래시계 안의 모래가 떨어지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조급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백진희에게 소리쳤다.
“힌트라도 좀 주든가!”
“흐응, 그럴까? 좋아, 내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면 그럴게.”
나에게 질문을 한다고?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자. 신한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질문이 뭔데?”
내 물음에 백진희는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린이를 사랑해?”
“뭐…?”
“아린이가 죽으면. 따라 죽을 만큼 사랑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직감일까? 왜인지 모르게 백진희의 질문이 꺼림직하게 느껴졌다.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아린이를 사랑해.”
내 대답에 만족한 듯, 환한 미소를 지은 백진희는 자신의 이마의 블랙 다이아몬드 문양에 검지를 갖다 대며 말했다.
“네가 경험했고 겪었던 것과 같은 거지만, 다른 종류야. 그 누구도 이것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이것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너는 이미 알고 있어.”
“그게 무슨…?”
“힌트는 끝이야. 잘 생각해봐.”
오히려 힌트를 듣기 전보다 더 모호해진 머릿속에 입술을 깨물고 머리를 쥐어짤 때. 뒤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칠격이 막고 있던 마족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황급히 몸을 돌려 마족과 전투를 준비할 때. 검은 구체가 쏘아지더니, 마족들의 몸을 모조리 터트려버렸다.
순식간에 자신을 도와주러 온 마족을 죽여버린 백진희는 웃으면서 말했다.
“방해꾼은 없애줬으니. 얼른 풀어봐.”
“이런…. 미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마족을 몰살시킨 백진희를 보고 알펜시아가 작게 욕을 내뱉었다.
나는 머리를 저어, 잡생각을 지우고 백진희가 말한 힌트를 계속해서 떠올렸다.
내가 경험했던 것? 그것이 뭘까.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보며 추론을 했다.
내가 이것의 존재는 모르지만, 그것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알고 있는 것. 그리고 다른 힘을 경험한 것.
내가 알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백진희와 나 사이에 관련된 얘기일 것이다.
미노타우로스의 고환? 아니, 이건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파툴가의 마법 장갑? 얼추 힌트와 들어맞는 것 같긴 하다.
다른 파툴가의 유물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몽마의 환락가에서 이것을 사용해서 경험해봤으니까.
하지만 저 블랙 다이아몬드 문양과 관련이 있는 걸까?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내뱉어봤다.
“파툴가…?”
“틀렸어.”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백진희가 손짓하자, 이제 모래시계는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아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럼 뭐지? 내가 경험했고 알고 있는 것? 백진희가 알고 있는 게 도대체….
아….
“기아스.”
내 작은 중얼거림에 쏟아지던 모래가 마법처럼 공중에서 멈췄다.
나는 멈춰진 모래시계를 확인하고는 백진희를 보며 말했다.
“정답은 기아스야.”
아린이와 기아스를 사용했고, 그 힘을 경험했으며 다른 기아스의 존재는 모르지만. 그것이 어떠한 힘을 가졌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짝짝짝!
정답을 맞힌 것을 축하하듯, 백진희는 나를 보며 박수를 쳤다.
“맞아. 이건 내가 따로 만들어낸 기아스야.”
그 말에 [이해력]이 폭주하며 좀 전의 상황이 이해되었다. 마왕의 몸에 접촉한 순간 백진희의 이마에 나타난 문양.
기아스가 발동하는 조건이 마왕의 몸을 만지는 것이었다.
“이해했나 보네? 맞아. 네가 찾던 내 기억의 원본. 그건 기아스로 마왕의 육체에 숨겨져 있었어.”
그래서 비밀의 방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숨겨 두었다는 기억조차 없애버렸으면서, 결국 백진희는 자신의 계획대로 나를 따라와 마왕 공략에 도움을 주고는 기억을 되찾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아, 참고로 시간제한이 있으니 중요한 것만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
백진희가 손가락을 튕기자. 모래시계가 다시 움직여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정리해 백진희에게 물었다.
“기아스는 뭐야?”
“내가 새로 만들어낸 설정. 개연성을 이유로 이미 있는 이야기를 설정으로 만들어낸 거지.”
백진희의 말에 나는 눈을 좁히고 노려보며 물었다.
“그럼 기아스를 나와 아린이에게 건 이유는?”
“아린이와 네가 정말로 사랑하길 원했으니까.”
그 말에 나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우리 둘의 사랑을 원한 걸까.
“어째서 우리 둘이 사랑하길 원했는데?”
“큰 흐름이 끝 나는 가장 큰 영향을 가졌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곧 알게 될 거야.”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백진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모래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왜 네 상태창이 사라진 거야? 아린이도 상태창이 사라졌는데….”
내 질문에 백진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흐응. 거리는 콧소리를 내었다.
“드디어 만족스러운 질문을 하네? 그 이유는 간단해. 내가 수백 번을 회귀한 끝에 찾아낸 네게 저항 할 수 있는 하나의 설정 때문이야.”
“무슨 설정인데?”
“[기어오르는 혼돈].”
백진희의 말에 심장을 옥죄는 듯한 느낌을 들었다.
“그게…. 무슨…?”
“누군가는 억지력, 필연성이라고 부르는 게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 그래서 그것 자체를 부정하는 존재를 만들어냈지. 아니, 이미 존재했지만, 억지력으로 갇혀 있던 것을 강제로 끄집어냈다고 해야 하나?”
“그게 너와 아린이와 무슨 상관인데?”
“나는 이미 [혼돈]에 잠식되었거든. 네가 날 배신하고 몽마의 환락가에 집어 던졌을 때. 수많은 인큐버스에게 둘러싸여 윤간당하고 있을 때. 아주 미약한 [혼돈]이 달빛으로 찾아왔어.”
아린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백진희의 전생 회차에서 내가 백진희의 사지를 절단하고 몽마의 환락가로 가는 스노 글로브를 이용해 백진희를 그곳에 버렸다고.
“나는 계약을 했지. 너에게 복수하는 대가로 [기어오르는 혼돈]을 풀어주기로. 수백 번의 회귀를 하며, [기어오르는 혼돈]의 본체를 찾아 헤맸지. 결국 세계의 뿌리를 찾아내어 [혼돈]을 뿌리자. 잿빛 섬광이 터지고 쾅! 난 그대로 죽어버렸어.”
옥좌에서 일어난 백진희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세계선이 아주 잠시, [혼돈]에 빠져 입학식으로 회귀하고 있을 때. 우연히 아린이라는 변수가 이 세계에 빙의해 갇혀버렸고, 나는 그 변수에 [설정]을 추가했지. 마왕이 아린이의 몸에 빙의하면 마왕이 되는 게 아니라….”
백진희가 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기어오르는 혼돈]에 잠식되어 세계를 멸망시킬 마신이 된다고.”
얼굴에서 손을 뗀 백진희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신한림이 가면을 직시하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실성한 사람처럼 고통스러운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가, 가면을…. 보면 안, 안돼….”
필사적으로 내뱉은 신한림의 말에도 나는 어째서인지 가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백진희의 가면에 익숙함을 느꼈다. 미궁 속에서 아린이가 두려워하던 것.
수많은 눈알들이 박혀 있는 살점들이 흉악하게 모여 있는 괴물.
아린이의 심상에 잠들어 있던 괴물이 [기어오르는 혼돈]이었다는 것이 [이해]되었다.
“마왕의 힘은 내게 흡수되었고, 나는 이미 [혼돈]이야. 아린이는 그릇으로서 이미 충분한 성장을 했지.”
백진희의 주변에 마기들이 터져 나오며 옥좌가 가루가 되며 부숴졌다.
가면의 뒤. 왜인지 나는 백진희가 나를 향해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네가 죽을 만큼 사랑하는 아린이가 되어 세계를 멸망시키는 거야.”
콰아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공간이 우그러지며, 백진희의 모습이 사라졌다.
* * *